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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막 1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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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막 12:13~17)


한 사람이 어린 딸과 함께 산지에 살면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딸은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바동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 양을 가시덤불에서 떼어내었으나 그 양은 이미 여러 곳에 긁히고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상처가 나고 여러 곳에 긁힌 자국을 보면서 어린 소녀는 양이 너무 불쌍하여 울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잘라 버려요.” 다음 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그 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나무 가까이 갔을 때 그 소녀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그 가시나무 위에 앉더니 작은 부리로 양이 가시에 긁히면서 남겨 놓은 털들을 쪼아 모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새는 부리 가득히 털을 물고는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던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아빠.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무의 가시들은 작은 새가 집을 지을 수 있는 부드러운 털을 모으는 일을 하는가 봐요”하고 말했습니다.

사실 대자연은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로 얻은 것이 가리지라면 이 얼마나 화나는 일입니까.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에 실패한 수험생들. 밤낮 없이 기도하며 노력을 해도 교회는 성장하지 않고 가라지 같은 신자들만 늘어갈 때, 내가 낳고 길러 성공한 자녀 되기를 기대했는데 방탕한 탕자가 부모를 속상하게 했을 때, 그들이 느끼는 실망과 분노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가라지에 신경 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가시나무가 거기 있어 양들을 괴롭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음 쓸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가라지나 가시나무라도 뽑거나 베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의 끝 날에 심판하실 이가 따로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가시나무도 가라지도. 좌절과 실패와 죄에 시달린 우리의 형제자매들도 다 품에 안고 언젠가 우리 주님이 보상하실 때까지 기다림이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세상에는 책잡으려고 시비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위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을 넘어뜨리고 싶은 마음들이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나보다 못한 그런 사람이라든가 나보다 나중에 시작한 사람이 나를 앞서 나간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서 그 이유를 찾아 교훈을 삼으려고 하기보다는 왠지 그 사람이 밉고 암만 생각해도 잘난 것이 없는 사람인데 참으로 불공평하다는 생각부터 드는 것이 우리네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나보다 밑에 있던 사람이 어느 사이엔가 같은 입장이 되더니 이제는 나보다 윗사람이 된다고 한다면 정말 견디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에게서 나보다 나은 구석을 찾을 수가 없어요. 내가 볼 때는 무언가 구린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흔히 하는 것이 그 사람의 흠을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유대 장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보면 신비롭기도 합니다. 어떻게 저 사람에게서 저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일까 싶기도 합니다. 무어 외모가 잘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런다고 출신 성분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저 갈릴리 나사렛 촌사람일 뿐입니다. 자기들이 알기론 배운 것도 별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을 통해서 자기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런 역사들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래 그들 마음에 “어떻게 하면 책을 잡을 수 있을까? 예수라고 털어서 먼지가 안 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한번 시험해 보자” 하는 마음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서 그들이 와서 묻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어찌 보면 칭찬처럼 들리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높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의도는 어디까지나 책잡으려는 것입니다. 그건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쪽으로 대답하더라도 시빗거리가 될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신은 참되십니다. 아무꺼리는 일이 업으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니 좀 가르쳐 주십시오. 정말 궁금해서 그럽니다.” 라고 해서 먼저 예수를 한껏 칭찬해 줌으로 말미암아 듣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결코 자기들이 예수를 시험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위장을 합니다. 

우리네 하는 말도 가만히 들어보면 상대방을 칭찬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은 이런 점도 좋고 저런 좀도 좋다. 이것도 잘 하고 저것도 잘한다.” 그리고는 꼭 하는 말이 “하지만 한 가지 고칠 점이 있다.”
그러니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 “하지만” 이라는 말에 따라오는 말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 하지만, 그렇지만, 한데, 그리고서는 이것도 문제 저것도 문제 이것도 고쳐야 되고 저것도 고쳐야 하고 그러면서 지적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마음이 정말 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냐? 정말 그 사람이 그런 문제점들을 바로 잡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말을 한다거나 정말로 그것이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내가 좀 기분 나쁜 일이 있다던가. 상대방의 모습이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그렇게 내가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실은 나도 안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그런 말을 할 때 상대방이 고분고분 인정을 하고 알았다고 “내가 노력할게” 하기보다는 반발을 보이기가 십상이라는 것을 나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사람들은 내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틀에 맞지 않는 상대방의 모습에 대해서는 그 모습을 그대로 인정해주기 보다는 아니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내면의 이유는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단지 내게 보인 대로만 알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보인 모습만으로 쉽게 단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며칠 밤샘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면 내 의지와는 달리 늦게까지 잠이 들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힘든 일을 마쳐놓고 이제 하루 마음 편히 쉬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그가 늦게까지 잠들어있는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이 게을러터져서는……. 지금이 몇 시야? 언제까지 잠자리에 있을 거야?” 나 어제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고 말해도 암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참으로 속상합니다. 아니 남의 입장은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입장이 바뀌면 나는 더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전에 내가 했던 것 이상으로 나도 당하게 되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너희가 심은 그대로 거둔다고 하신 말씀처럼 내가 누군가를 욕보인다면 나도 누군가로부터는 욕먹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손가락질 한다면 그런 나를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름대로 잘 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어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솔직한 마음이 그 사람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또 한편 구석에는 그 사람이 넘어지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우리로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악한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주는 간교한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부러워하다가 나중에는 속상해요. 왜 나는 저렇게 못하는가 싶기도 하고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하는 것이 뭔데 하는 마음도 듭니다.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내게는 이런 것이 없고 저런 것이 없어서 그렇지 그런 것만 갖추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런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나보다 못한 입장에서 앞서 나가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배경도 있고 뒤를 밀어주는 사람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것 같은 사람이 옆에서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앞서 갈 수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왜 그런 사람이 없는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언가 저 사람을 돕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출신 성분이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에게 남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일을 해도 기분 좋게 일하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을 해도 별로 흥이 안 나고 기분만 상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사람과 또다시 같이 일하려고 하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을 피할 것입니다. 마지못해 같이 일한다고 해도 부딪히지 않으려고 아주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일하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여기 대제사장들처럼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책잡으려고 덤벼들 때는 이것처럼 피곤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완전히 낭떠러지입니다. 세금을 내라고 해도 시비가 될 수 있고 내지 말라고 해도 시비가 될 수 있습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도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니 누구라도 입을 열어 말하지 않고 모른 척 하고 넘어가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걸 지금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것도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 것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칭찬하는 것처럼 하면서 상대방을 물 먹이는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완전히 사람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문제를 먼저 바로 잡고자 하지 않고서는 결코 상대방을 바로 세울 수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나는 못해도 너는 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닌 나도 잘 못하지만 노력할게 우리 함께 노력하자고 하는 이런 자세가 정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던 그 의미를 바로 알아 함께 돕고 함께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결코 그들과 다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시비하지도 않았습니다. 너희들 그럴 수가 있니 누굴 넘어뜨리려고 그러냐고 하면서 화를 내지도 않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들이 시험하는 이유를 모르시는 분도 아닙니다. 또 그 정도 해결 못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시험하는 이유도 알고 너 그거 고치라는 이유도 알지만 그게 결코 쉽지 않다고 하는 것을 상대방도 압니다. 

그러면서 내게 그렇게 말을 할 때는 그런 자기부터 해보지 하는 마음과 더불어 당신이나 잘하라고 하는 말이 목까지 올라옵니다. 물론 그걸 입을 열어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쟁입니다. 그렇게 되면 함께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서로 마음이 상해버립니다. 또 하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 내가 하나 양보하면 그래서 둘이 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둘의 양보를 요구해 오더라는 것입니다. 왜 누군들 마음에 드는 구석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것도 문제 저것도 문제라고 계속해서 말하면서 고쳐라 고쳐라 하는데 나도 고쳐야 된다, 나도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닌데 맞다 내게 그런 부족한 점이 있다 그렇게 고쳐야지 하면서도 왜 그렇게 속이 상합니까? 나도 문제라는 것은 알아요. 어떤 음식이 몸에 좋다고 할 때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안다고 해서 먹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입에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먹기가 싫을 수도 있습니다. 왜 싫은데 하면 할 말이 없어요. 그냥 싫은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과 감동하심과 가르쳐주심을 따라야 합니다. 

성령의 지혜와 지식의 은사가 우리 가운데 있으면 그래서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면 그 어떤 시험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고 내가 상대방에게 어떤 말을 할 때도 정말 상대방이 마음으로부터 고마워하도록 지혜롭게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내가 대답을 할 때도 말을 해준 사람이 민망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가져오니까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어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건 바치라 말라의 문제가 아닌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이제 가이사의 것이냐 하나님의 것이냐를 판단하는 것은 너희가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이사의 것이라면 당연히 가이사에게 바치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라면 하나님께 바치면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 대해서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더 흔들어 볼 수가 없습니다. 

무언가 꼬투리가 잡혀야 더 시비를 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누가 무어라고 한다고 해서 속상해할 것이 없습니다. 단지 주님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입을 열어 서로 마음이 상할 수 있다면 입을 다무십시오. 그리고 대답할 말을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저도 종종 그런 실수를 합니다만 제발 그만 좀 하라고 그러는 당신은 뭐 어쩌고 저쩌고 하지 마십시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오늘을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 은혜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바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내게 있어서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아니 말을 바꾸십시다. 내게 있어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흔히 내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아니 한국 사람들은 우리라는 말도 많이 합니다. 내 것 우리 것 내 집 우리 집 사랑하는 우리 아내 우리 남편 이건 깊이 생각하면 좀 이상한데도 그냥 흔히 그렇게도 말을 합니다. 

집이야 당연히 우리 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내나 남편에게 우리 아내 우리 남편이라고 하는 건 좀 그렇습니다만 우리 정서는 그냥 그렇게 말하고 받아들입니다. 내 자식, 내 아들 내 딸, 내 사업 내 돈 내 시간 등등 내 것 또는 우리 것이라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문제는 내 것이라고 하는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내 돈이라고 하지만 원치 않는 곳에 써야 될 때도 있고 쓰고 싶지만 쓸 수 없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건강이나 생명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는 내 생각대로 따라준다고 해서 마음까지 하나는 결코 아니고요 결과가 내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내 몸 내 시간 내 삶조차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고는 싶은데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 못할 때도 있고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몸이 따라주지를 않거나 가진 것이 부족해서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은 그냥 안타까운 것뿐이지만 정말 불쌍한 것은 없어서가 아니라 충분한데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게을러서 못하기도 하고 그냥 의욕이 없어서 안하기도 합니다. 귀찮아서 안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냥 싫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안 해도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싫어도 해야 하고 형편이 안 돼도 해야 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싫어도 밥은 먹어야 합니다. 얼마동안은 안 먹고 버틸 수도 있겠지만 언제까지 안 먹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때가 있다고 하는데 물론 안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자신에게 불행입니다. 나중에 후회해 봐야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그중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은 내 것인 양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시간도 돈도 다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것을 인정한다면 마땅히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아는데 힘들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이해가 되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힘들기 때문에 더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서 우리들에게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간도 물질도 마음도 다 바치라는 것은 결코 그것들을 내게서 빼앗기 위해서가 아닌 더 좋은 것으로 풍성하게 채우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을 그릇이 충분한지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시험하십니다. 받을 그릇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주신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흘러버릴 것입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는데 컵에 물을 따라놓습니다. 그런데 식사 중에 사이다나 콜라를 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물을 따라 버리고 난 다음 그 빈 컵에 콜라나 사이다를 따라서 마십니다. 그것이 싫다면 빈 컵을 따로 준비를 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물이 하나 가득 담겨있는데 거기다 그냥 따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백배로 우리들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시간을 드리면 건강과 평안을 주시고 물질을 드리면 더 풍성하게 채우시고 형통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작가 아더 고든씨가 저명한 정신치료의사 스밀리 블란톤씨와 인터뷰를 하려고 뉴욕에 왔습니다. 그들은 첫 모임을 가진 뒤 점심 식사를 같이 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더씨는 식당에 앉아 박사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블란톤 박사가 식당에 도착하여 보니 아더 고든씨의 표정이 자못 이상하게 비쳤습니다. “아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여기 앉아서 옛 일을 생각해 보았지요. 지난날에 만일에 이일을 했으면, 만약에 어떠했다면 하는 여러 가지 가정들을 생각해보았지요.” “우리 사무실로 갑시다. 

들려드릴 말씀이 있어요.” 블란톤 박사가 말했습니다. “여기 이 테이프에 나오는 다른 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모두 내가 치료했던 환자이지요. 잘 들어보세요.” 테이프가 끝나자 블란톤 박사가 고든씨에게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통점을 발견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요, 뭐 뚜렷한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요.” 정신치료 의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한 가지가 있지요. 이 사람들이 모두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했더라면' 하는 말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말은 마치 독약과도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같은 말을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해내겠다.”
이 같은 긍정적인 자세는 미래를 지향하며 새로운 날. 새로운 출발을 약속합니다.
더군다나 나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도록 하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고 또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은혜를 우리들에게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더군다나 부정적인 말은 사단이 주는 말이요 긍정적인 말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하는 말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항상 나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 나의 삶의 모든 것이 은혜로 가득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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