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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과 삶 (레 2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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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삶 (레 25:8~12)
  

미신과 신앙의 차이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험하다는 장소에 가서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이런 행위를 미신이라고 부릅니다. 미신을 관찰해 보면 그들은 자신이 변하기보다는 신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점을 치고,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함으로 자신의 인격과 생활이 새롭게 변화되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와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신의 마음을 변화시켜 자신이 원하는 복을 받기 원합니다. 반면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만남으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과 정신을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신은 내가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신을 변화시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신앙은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신의 뜻에 따라 내가 변화되어 신의 뜻을 이뤄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회개는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히브리어의 의미로 회개는 180도 돌아서는 것입니다. 헬라어의 의미로는 내 정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정신의 세계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고 선포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려며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정신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430년간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절기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절기들은 종교 의식으로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절기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절기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정신이 실현되는 세상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있는 희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키며 살아야할 하나님의 정신이 그대로 담겨 있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6일을 일하고 7일째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6년을 일하고 7년째는 안식년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안식년에는 사람만 쉬는 것이 아니라 땅까지도 쉬는 해입니다. 하나님은 안식년을 일곱 번 지키고 50년째가 되는 해를 희년으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희년이 되면 사람과 땅이 쉬는 것은 물론이고 사들인 땅이 있으면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돈을 빌려 주었으면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고, 종들에게는 자유를 주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순간에는 다시 희망을 볼 수 있는 사회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안식년과 희년에 하나님의 정신을 담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정신을 가지고 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집에 가셔서 레위기 25장 전체를 한 번 깊이 묵상하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면서 고통과 서러움의 세월을 보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서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라고 선포하십니다. 바로가 지배하던 세상은 힘 있는 자들과 가진 자들에 의해 눌리고 억압 받는 세상이었다면 하나님이 지배하는 가나안 땅은 힘 있는 자와 가진 자에 의해 힘없는 자와 가난한 자들이 위로를 받고 희망을 볼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생활에 억압된 생활이었다면 가나안 땅은 애굽과는 다른 변화된 세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기 원하는 세상은 이사야서 11장 6절에서 9절의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 번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구약 982면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싶어 하시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년과 희년의 제도를 주시며 그것을 지켜 이런 세상을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년과 희년에는 ‘흐름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흐름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물이 평평한 곳에 머물며 흐르지 않고 고이게 되면 썩어 역겨운 냄새가 납니다. 우리의 몸에 있는 혈액도 심장을 중심으로 흐르지 않고 한 곳에 고이면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기고 결국은 사람이 죽습니다. 넓은 바닷물도 흘러야 합니다. 바닷물이 흐르지 않으면 적조 현상이 일어나 생명체가 살 수가 없습니다. 태풍이 한 번씩 불어와 물을 흐르게 만들 때 그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나라 경제와 세계 경제도 흐름이 원활해야 합니다. 경제가 흐르지 않고 한 곳에만 쌓이면 그 경제는 곧 문제가 생깁니다. 

흐름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들어 놓으신 자연의 법칙이고, 생명의 법칙입니다. 이 흐름의 법칙이 깨지면 무질서해지고 고통이 생깁니다. 그것은 개인도, 공동체도, 나라도,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세상은 이런 하나님의 흐름의 원칙을 깨뜨립니다. 그 흐름을 자기중심으로만 쌓아 두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고통과 갈등의 세계를 만듭니다. 전쟁과 기근, 역사가 피로 물든 이유를 보면 바로 흐름이 한 곳에 막혀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우리 생활에 미움과 분노, 갈등의 원인은 나를 중심으로 흐름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중에 레위기와 신명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인 흐름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추수를 할 때 다 거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논과 밭의 네 귀퉁이의 것은 남겨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추수할 때 이삭이 떨어지면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의 몫으로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년에는 농사를 짓지 말고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모든 곡식은 거두지 말고 가난한 자들에 먹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년마다 소득의 십분의 일을 더 내어서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흐름의 정신’의 절정은 오늘 본문에 있는 희년 제도입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가난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제도가 희년제도입니다. 50년이 되는 희년이 되면 모든 토지와 종들과 빚을 풀어 주라는 것입니다. 사람과 토지는 어느 누구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역량의 차이와 삶을 살다 보면 예기치 못했던 일들로 인해 어려워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 절망이 영원히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잠시는 어려워질 수 있고, 절망적일 수 있지만 견디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살면 다시 희망을 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난하고 약해도 희망을 볼 수 있는 곳, 그 사회가 좋은 곳입니다. 그 곳이 바로 사람이 살 만한 세상입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역량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사회의 약자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바로 하나님의 정신이 살아 있는 사회입니다. 힘있고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흐르는 온정과 사랑으로 인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웃음을 찾고, 희망을 볼 수 있는 그런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 생활을 하던 애굽에서 해방시키셔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가나안 땅에는 두 개의 호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호수이고 하나는 사해입니다. 한 번 영상을 보겠습니다. 갈릴리 호수와 사해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와 사해는 크기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해가 큽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갈릴리 호수에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삽니다. 갈릴리 호수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토지까지 비옥하게 만들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이렇게 풍요로울 수 있는 것은 헐몬 산에서부터 흘러 들어오는 물이 있고 한편에서는 아래로 흘려 내려 보내는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은 고이면 썩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들어오는 물이 있고 나가는 물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깨끗한 물로 보존이 되고 그 안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삽니다. 반면에 사해는 갈릴리 호수 보다 수 십 배가 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가 한 마리도 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어떤 식물도 자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해는 염도가 높아 어떤 식물도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바다라고 사해라고 부릅니다. 사해가 어떤 식물도 살 수 없을 만큼 염도가 높은 이유는 갈릴리 호수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받아들이기는 하는데 흘려보내는 곳이 없습니다. 그냥 받아 담아두기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어 썩는 것입니다. 뜨거운 태양열에 의해 물이 증발하면서 자연스럽게 염도만 높아져 어떤 식물도 살 수 없는 죽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갈릴리 호수와 사해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해의 삶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와 같은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사해와 같이 자기중심적으로 받기만을 원하고 쌓아두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살 때 바로 그곳에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희년제도에 담겨 있는 흐름의 정신입니다. 

지난주에 불교계의 큰 어른이신 법정 스님이 입적하셨습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삶으로 보면 우리 시대의 큰 어른이었습니다. 구원의 문제를 떠나 그 분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삶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 보다 훨씬 더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 분이 주장한 ‘무소유’의 정신을 세상을 떠나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분이 말하는 무소유는 소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에 매이지 않는 삶입니다. 법정 스님은 숨을 거두기 전에 자신이 글로 남겨 놓은 빚을 더 이상 이 세상에 두고 싶지 않다고 자신의 이름으로 쓴 모든 책을 절판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마지막 가는 순간에도 관도 없이 수의도 없이 자신이 입던 승복을 입고 그대로 화장 되었습니다. 무소유의 정신을 가는 순간에도 그대로 실천한 우리 시대의 큰 거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바로 흐름의 정신의 절정을 이루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흐름의 정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흐름의 정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와 땀 한 방울 남김 없이 쏟으시며 흐름의 정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희년제도의 정신을 온몸으로 사시며 본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그 분을 따르며 섬기는 교회는 희년 제도 속에 담겨 있는 흐름의 정신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복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사회의 어두운 곳을 향해 흘러 보내지 않고 교회를 중심으로 쌓아 두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온갖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교회는 사해가 아닌 갈릴리 호수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세상을 향해 흘러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흘러 보내면 보낼수록 더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일들이 아직은 작은 일들이지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지역의 가난한 이웃 38가정을 월 10만원씩 지원하고 모잠비크에 87 가정을 지원하고 돈이 없어 수술을 못하는 아이들에게 수술비를 제공합니다. 가정이 어려워 공부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합니다. 빛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일 년에 15명 이상 실로암 병원을 통해 수술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일 년 재정의 36% 정도가 어려운 이웃과 사람을 세우는 일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교회가 더 아름답게 성장해 하나님의 흐름의 정신을 더 귀하게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은 우리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은 희년제도에 담겨 있는 흐름의 정신이 살아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강, 재물,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향해 흘러 보내야 합니다. 주신 건강을 가지고 한 주일,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어려운 이웃을 찾아 몸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며 흐름의 정신을 실천할 때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고 보람과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에게 재능과 재물의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흐름의 정신을 실천할 때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열매는 말이 아닌 삶으로 맺어집니다. 희년제도 안에 담겨 있는 흐름의 정신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해 우리 가정과 일터, 교회와 우리들이 머무는 삶의 터전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가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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