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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눈물 (눅 19: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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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물 (눅 19:41~44) 
 
 
피와 땀과 눈물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3대 액체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피는 용기의 상징입니다. 피를 흘림으로 새역사를 창조합니다. 피흘릴 각오를 하면 반드시 새 역사가 창조됩니다. 땀은 노력의 상징입니다. 땀을 흘리면 값진 성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눈물은 정성과 사랑의 상징입니다. 눈물의 강이 흘러가는 곳에 감동이 있고 사랑과 나눔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생의 모든 위대한 것들은 인간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들입니다. 피땀, 피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절대로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자신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들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피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을 일으키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제가 잘아는 목사님 중에 개척교회를 해서 크게 성공적인 목회를 하신분이 있는데 그분은 체 20-30명정도 밖에 모이지 않는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못한다고 쫓겨나다싶이 해서 피눈물 흘리면서 개척을 했는데 지금은 엄청난 큰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목회를 잘하는 목사님으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 작은 교회에서 평안이 젊은 날을 보내버렸다면 그런 역사를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 때 시골교회에서 자신에게 피눈물을 쏟게 한 사람들이 당시에는 마귀처럼 보였는데 지나놓고 보니까 은인이었다고 회고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피눈물은 큰 결단을 이루게 합니다. 피눈물을 흘리면 반드시 큰 일을 이루게 됩니다. 큰 일들은 대부분 피눈물이라는 댓가를 요구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시지 않았다면 인간의 구원은 성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눈물에 대해서 나누고 우리가 흘릴 눈물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33년 생애에서 몇 번이나 울었을까? 성경에 그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도 사람인 이상 성장 과정과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들처럼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눈물과 관련된 성구가 3회 나옵니다. 아마 공생애 기간 이전에는 차치하고라도 그 기간 동안에도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 누가복음에 각각 한 번씩, 그리고 히브리서에 간접적으로 한 번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첫번째 예수님의 우신 기록은 요한복음인데 나사로의 무덤에서였습니다(요11:35).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고 슬퍼하는 나사로의 누이들을 보면서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두번째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는 조용히 우셨지만, 여기서는 큰 소리로 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번째 운다는 단어는 단순히 주님이 눈물을 금치 못하시고 주님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한숨을 쉬고 흐느끼며 고통에 차서 부르짖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신 예루살렘은 인간들의 죄악이 한데 똘똘 뭉쳐 있는 중심지를 뜻할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본문의 주님 말씀대로 "알았으면 좋을 뻔 한 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숨겨져 있었던 사람들" 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성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크게 우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답답하여 우신 것입니다.  
세번째는 히브리서인데 히 5:7절에서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눈물의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볼 때 감동적인 사실들이 참 많습니다만 특히 "예수께서 우셨다" 라는 그 눈물에 감동의 리더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울지 않는다고 강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눈물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성을 위해 우시는 울음이요, 그토록 완고하게 자기 길을 고집하고 그의 사랑을 거부하며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뻔뻔스럽게 그의 은혜를 요구했던 그 거역의 백성들을 위해 우시는 울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눈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물을 아낍니다. 나약하게 보이기 싫어서일 것입니다. 특히 남자들에게 눈물은 절제하거나 금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됩니다. 그래서 눈물을 막습니다. 오죽하면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웃으면 복이 온다'며 웃음은 적극 권하면서 눈물은 애써 말립니다. 그러나 체험해본 사람들은 눈물 뒤의 절묘한 카타르시스를 압니다.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나면 경직된 근육이 풀리고, 침침한 마음이 개운해지고, 탁한 영혼이 맑아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눈물을 웃음만큼 강한 영육간의 치료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물 흘리기를 부끄러워 말아야 합니다. 슬플 때, 위기에 닥쳤을 때, 가슴을 찢는 감동의 순간에, 자신을 압도한 그 감정을 분출하여 강같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로다 약속해주셨습니다. 

눈물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감격의 눈물, 감사의 눈물, 슬픔의 눈물, 기쁨의 눈물, 통분의 눈물, 참회의 눈물, 아픔의 눈물, 외로움의 눈물, 연민의 눈물, 감동의 눈물 등등...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통한의 슬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눈물 없는 사람, 눈물 없는 세대를 향해 "애곡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나무라기까지 하셨습니다.

성도는 눈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늘 있어야 합니다. 스펄젼은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에게 많은 눈물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눈물은 귀하고 복된것인데,특별히 어떤 눈물을 흘려야만 합니까?   

첫째,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시 6:8에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울음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눈물로 회개하는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런 사람을 귀히 쓰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임받은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를 철저하게 눈물로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변명하기에 바쁩니다. 합리화시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회개의 눈물이 없으면 변화도 없고 갱신도 없고 회복도 없습니다. 

죠지 뮬러는 고아를 돌보고 기도하는 분으로 유명한데, 그가 어느날 기도하는 중에 자신이 죽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취미에 대하여 죽고 기호와 개성, 책망과 칭찬에 대하여 죽는 자신을 보았는데, 그때로부터 온전히 하나님께만 순종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지만 철저한 회개로 용서함을 받고,위대한 역사를 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의 감격에 눈물흘리는 사람입니다. 한번도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감격적인 눈물을 흘려보지 못했다면 "신앙의 진수"를 아직 경험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기 전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결코 구원의 눈물 같은 것은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은 이후로 이 감격의 눈물이 일생동안 그를 지배했던 사람입니다. 너무 많이 울어서 "안질에 걸렸다"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눈 때문에 서신을 대필시키기도 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가장 큰 일들을 이룬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동안 많은 순교자를 냈지만 그 많은 순교자들은 모두 구원 받은 감격의 눈물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게 되며 부흥되어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에 대한 눈물이 항상 있는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놀랍고 신령한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셋째, 남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절대 고독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함께 사랑과 마음을 나누는 눈물입니다. 함께 울어주는 눈물의 리더십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고독해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교회에나 또 어느 때나 존재합니다. 그들은 가슴이 찢어지고 아픈 사람들이요 눈물의 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눈물은 때로는 눈에 띄기도 하지만 보통 남몰래 흘립니다.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 그는 벌써 리더쉽을 가진자이며 좋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것만으로도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가 생기고 복음의 문이 열리기도 합니다. 
이미 고인이 되었습니다만 장영희교수는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을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내것 내가 먹고 네것 네가 먹으면 되지 나눌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다는 그런 식의 인생관은 옳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시위대 뜰에 가두기도하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토굴에도 가두고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진흑구덩이에도 집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위협을 가한 그 백성들을 사랑해서 하나님 앞에 긍휼을 호소하는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바벧론으로부터 70년만에 돌아오게 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이 기도가 그 백성을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칼빈은 "기도와 눈물이 우리의 무기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후버는 "원자탄을 가진 나라보다도 기도하는 성도가 많이 있는 나라가 가장 강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눈물은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는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회개의 눈물,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 남을 불쌍히 여기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한 눈물의 기도는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 교회위에 놀라운 역사를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의 눈물의 기도는 응답과 축복으로 열매 맺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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