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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말전도(本末顚倒) (약 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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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말전도本末顚倒 (약 1:12~18)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 생의 시련 앞에서

봄을 시샘하는 찬 바람이 분다곤 해도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산수유, 생강나무의 노란 꽃망울을 바라보면 상큼한 설렘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법 흥취가 있는 어느 분은 봄이 되어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 봄이 오는 것이라 말했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봄은 참 좋은 계절입니다. 계절이 돌고 돌면서 인연들이 맺어지기도 하고, 풀어지기도 하면서 한 세월 사는 게 인생일 겁니다. 살다 보면 참 많은 이들과 얽혀 살아갑니다. 

차돌처럼 단단한 사람도 있고, 눈물 주머니인양 마음이 푸석푸석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을 견디어낼 장사는 없는 법입니다. 바늘에 찔려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던 사람도 흰 머리가 늘고, 주름이 깊게 패이고,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삶이 참 부질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씁쓸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처럼 유한하고 삶은 불확실합니다.

예기치 않았던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당황합니다. 하지만 시련에 굴복하는 순간 우리 삶은 무너지고 맙니다. 시련에 맞서 견디고 또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생은 든든히 서갑니다. 내일이면 만나게 될 형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밤새도록 얍복강 나루에서 전전반측輾轉反側하던 야곱은 어느 순간 자기를 급습한 어떤 이와 더불어 한판 씨름을 벌입니다. 그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던지 야곱의 엉덩이뼈가 탈골되기까지 했습니다. 동녘 하늘로 새벽빛이 희부옇게 밝아올 무렵 그 낯선 존재는 자기를 놓아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더욱 그를 단단히 붙들고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런 검질김이 야곱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고보는 여러 가지 박해와 불이익에 시달리던 교인들에게 믿음을 따라 사느라고 겪게 되는 시련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면서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시험’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페이라스모스 πειρασμός, peirasmos’는 시련, 시험, 유혹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시련’이라고 이해하는 게 좋겠습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이 복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위해 겪는 시련은 오히려 그의 참됨을 입증하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누군들 시련을 좋아하겠습니까? 하지만 시련이 없다면 정신이 클 수 없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현인인 맹자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이 장차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길 때는 그전에 심지를 굳게 하기 위해 마음을 괴롭히고 그 근육과 뼈를 지치게 만들고 굶주림과 궁핍함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런 시련을 거칠 때 심지가 굳어지고, 분발하게 되고, 자기 속에 있는 능력을 한껏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잘못을 저지른 후에야 고칠 수 있고, 마음이 힘들어 이리저리 생각을 궁글린 후에야 일을 이룬다는 것입니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人恒過然後 能改 困於心 衡於慮而後 作). 

•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

그러나 야고보는 13절에서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말라”면서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시험하지도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이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조금 당혹스럽습니다. 12절에서는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이 복이 있다더니, 14절에서는 시험이 욕심에 이끌린 결과라고 말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14절이 말하는 ‘시험’ 곧 ‘페이라스모스’를 ‘유혹’이라는 뜻으로 새기고 읽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뜻이 잘 통했습니다. 이 대목을 유진 피터슨 목사의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악에 빠질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거든 ‘하나님이 나를 넘어뜨리려 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 영향 받는 분도 아니시며, 누군가의 앞길에 악을 들이미는 분도 아니십니다. 유혹을 받아 악에 굴복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탓해서는 안 됩니다. 탓하려면, 자꾸 곁눈질하고 유혹에 이끌리는 우리 자신의 타오르는 욕심을 탓할 것밖에 없습니다.”(13-14)

야고보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다가 시련을 겪는 이들에게는 잘 견뎌내라고 격려하지만, 자기 욕심에 이끌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그러고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들은 아주 엄중한 어조로 꾸짖고 있습니다. 유혹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욕망과 욕심은 다릅니다. ‘욕망欲望’은 부족함을 느껴 이를 채우려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욕망은 그래서 생을 역동적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욕심慾心’은 자기만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또 분수에 지나치게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다 ‘지나침’에 대한 욕구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아주 인상적인 경구로 욕심의 말로를 드러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15)

지난 11일 한국 사회에 ‘무소유’라는 화두를 던졌던 법정 스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어느 해 지인으로부터 귀한 난초 두 뿌리를 선물로 받아 정성스레 길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난초 때문에 일희일비하고 노심초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자, 그는 선뜻 그것을 친구에게 줘 버렸습니다. 후련했습니다. 그래서 집착에서 놓여난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듯 홀가분한 해방감. 유정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이니까.”

난초를 버리자 오히려 더 큰 자유가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법정 스님이 숨을 거둔 곳은 길상사인데, 그곳도 크게 버림으로 얻은 곳이었습니다. 성북동에 있는 유명한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김영한 할머니는 불교에 문외한이었습니다. 그는 1996년 1000억대에 이르는 땅 7000평을 기부하려고 다양한 종교인들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법정 스님이었습니다. 제안을 받은 스님은 “나는 생각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나 알아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김영한 할머니는 여기에 감명 받아 그 땅 전체를 법정 스님께 기부했다고 합니다. 과도한 욕심은 물불을 가리지 않기에 죄로 이어지고, 죄는 우리를 꽁꽁 얽어매 영혼의 죽음을 초래합니다. 

• 속지 말라

문제는 그런 줄 알면서도 그 욕심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의지와 결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욕심은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욕심의 박차 아래서 내 불행의 짐을 끌고 가는 데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 짐을 끌고 가면 갈수록 그것은 무거워지는 것뿐이었습니다.”(<<고백록, 제6권 6장)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헛된 욕심에 속아 종살이 하는 삶을 안타까이 여기면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결정적인 사실을 일러줍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17a)

우리의 장한 의지나 결심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주님의 빛을 받으면 새로운 눈으로 삶을 응시하게 됩니다.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던 도중에 주님의 빛과 만나 철저히 변화되었습니다. 그 빛은 바울의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경계선이었습니다. 그 빛으로 말미암아 그는 박해자에서 박해 받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세상 사람에게 십자가의 길은 어리석음입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는 한 우리는 헛된 유혹의 꾐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빛이 흐릿해지는 순간 우리는 속절없이 유혹에 넘어가고 맙니다.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기적입니다. 봄이 되어 돋아나는 새싹도 기적이고,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들의 지저귐도 기적이고, 찬란한 빛으로 대지를 밝히는 꽃들도 기적입니다. 업적과 성공에 목을 매고 사는 한 우리는 생을 하나님의 선물로 즐길 수 없습니다. 

피겨스케이팅 역사를 새로 쓴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을 끝내고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왜 울었냐는 질문에 김연아는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브라이언 오서 코치가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스케이트를 그렇게 타면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연아의 눈물은 고된 훈련을 위해 흘린 피와 땀 때문이 아니라 스케이트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온 눈물”이라고 말했습니다. 브라이언 오서 코치는 1988년 캘거리 올림픽에서 0.1점 차이로 금메달을 놓친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 패배는 그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고, 그 상처를 극복하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김연아의 코치가 됐을 때 그는 김연아를 행복한 스케이터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5살의 김연아는 주니어 챔피언이었지만 행복한 스케이터는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와 코치로부터 실수한 점프를 계속 반복하도록 강요받는 훈련에 지친 ‘자기 안에 갇힌 내성적 성격의 소녀’였던 것입니다. 그는 연아의 유머와 기질을 끄집어내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몸의 이야기를 듣고 휴식할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도 가르쳤습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 김연아는 비로소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와 동작과 음악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입니다(한겨레신문, 권태선 논설위원의 글 중에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의 밝음과 어둠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은 오서 코치가 김연아를 ‘행복한 스케이터’로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을 때 이미 준비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공과 업적이 아니라, 생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인생의 주인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 누구를 주로 모시고 사나?

세상에는 우리의 섬김을 요구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와 쾌락에 대한 집착이 우리에게서 행복을 앗아가고, 인간성마저 앗아갑니다. 부산에서 벌어진 여중생 납치 살해 사건은 우리 시대가 당도한 어둠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도하는 신문들의 논조를 살피면서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사건의 본질을 파고드는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고, 그 사건을 드라마화해서 보여주는 일에 온통 열을 올렸습니다. 

어느 신문은 심지어 용의자가 소주를 주로 마시지만 가끔은 맥주도 마셨다는 둥, 던힐과 마일드 세븐을 즐겨 피웠다는 둥 신변잡사를 늘어놓았습니다. 사건의 본질이나 비극성, 혹은 그런 범죄를 낳는 사회 구조를 은폐하고 그것을 흥밋거리로 만들어 소비해버리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경박한 호기심이 우리 사회를 더욱 어둡게 만듭니다. 이 사건은 웬 못된 놈과 재수 없는 학생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적 사건입니다.

욕심이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삶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우리 앞에 생명의 길로, 생명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우뚝 서계십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수없이 부르고,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예수님이 앞서 걸으신 그 길은 한사코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순절이 깊어가는 오늘, 복음성가 한 곡이 머리에 맴돕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신앙생활이란 지금까지 우리가 주인으로 삼고 살았던 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을 꼭 붙드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자주 실패합니다. 하지만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 또다시 길을 떠나야 합니다. 주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고” 지금도 우리를 낳고 계십니다. 주님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주님 안에 있다는 말은 이 세상의 논리와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주님이 가리켜 보이신 생을 살아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본과 말이 뒤집힌 세상입니다. 주인과 종이 자리를 바꾼 세상입니다. 이 뒤집힌 세상을 다시 한 번 뒤집으라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보면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남이 누릴 몫까지 독차지하는 삶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좋은 것을 나누며 살 때 우리 삶은 오히려 풍성해집니다. 이것이 충만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꽃들이 수런거리며 피어나는 이 아름다운 때, 우리도 생명의 일렁임을 가슴 깊이 체험하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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