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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너를 잊을 수가 없다 (눅 15:1~10,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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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잊을 수가 없다 (눅 15:1~10, 22~24)

    
설교내용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죄인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이해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잘난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천대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비난 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들을 이해해주시는 예수님이 좋습니다. 예수님이 좋으니 그의 말씀이 좋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좋아서 모여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주변에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은 의인이요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좋아서 모여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떤 놈이 와서 까부나 보자하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주위를 맴도는 자입니다. 주님의 품안으로 뛰어들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으나, 주님의 말씀에서 아무런 위로와 소망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고 시험 거리가 되었습니다. 

다같이 말씀을 들었는데 죄인들과 세리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안식과 평안을 얻었고, 바리새인들은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가까이 하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비난 했습니다. 그들을 남을 정죄하기에 바빴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전에 나온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마음이 지배를 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까? 은혜를 받아야 겠다. 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오늘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이 자리가 축복의자리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없으면 시험에 듭니다. 설교가 시험이 되고 사람이 시험이 되고 일들이 시험이 됩니다. 시험이 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세가지이야기를 하십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다르지만 가지고 있는 의미는 똑같습니다. 그 의미를 제가 생각해 보니 나는 너를 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반복은 강조를 나타냅니다. 세 번이란 최상급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너를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절대로 포기 할 수 없다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넘어진 사람을 포기 합니다. 실패한 사람을 포기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포기 합니다. 병든 사람을 포기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는 너를 포기할 수 없어.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어 하시는 것입니다. 

사 49:15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온대지가 생기가 돕니다. 약속의 동산으로 가는 길에도 봄기운이 물씬 돕니다. 때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세상 모든 자녀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여전히 봄을 주시는구나. 여러분 예배 후에 우암산을 올라가시든지 약속의 동산을 가시든지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연을 통하여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 사랑의 메시지를 들고 새 힘을 얻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을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를 잃었습니다. 양떼를 몰고 이 골짝 저 골짝 다닐 때는 몰랐을 것입니다. 저녁에 그 수를 세어 보고서야 알았을 것입니다. 한 마리가 없습니다. 어데서 잃어 버렸는지를 모릅니다. 목자는 단단히 준비하고 양을 찾아 나섭니다. 지나온 자리를 다 살피며 캄캄한 어둠의 길을 뒤집니다. 얼마를 어떻게 헤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길이 결코 쉽지를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드디어 양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목자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립니다.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가시에 찔리고 양을 찾았습니다. 

목자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 떠난 목자의 눈에는 양의 잘못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의 생명을 살렸다는 기쁨뿐입니다. 무리를 떠나 간 행동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이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양이냐 나쁜 양이냐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는 양의 생명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양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허물이 없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덮었습니다. 나는 너를 잊을 수가 없다. 그것뿐입니다. 그는 너무너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부르고 이웃을 초청해서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어버린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등불을 켰습니다. 온 집을 다 쓸며 찾았습니다. 집안의 물건을 이리저리 옮기기를 수없이 하며 찾았습니다. 방구석 구석을 다 뒤졌습니다. 옷마다 주머니를 다 뒤지고 털어보기도 했습니다. 책상 및 가구 및 침대 및 까지 다 쓸고 찾았습니다. 찾은 데를 또 찾고 찾은 데를 또 찾았습니다. 없습니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열 드라크마라는 것은 결혼의 상징물입니다. 유대인들이 약혼을 하면 드라크마 열 개를 줍니다. 그것을 줄에 끼워서 목에 걸면 결혼한 여자요 남자에게 인정받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나가 없습니다. 수치스런 일입니다.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답답합니다. 다시 뒤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뭔가 뚝 떨어지면서 구릅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입니다. 찾았습니다. 이제는 부끄러울 일이 없어 졌습니다. 찾은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여인은 드라크마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벗과 이웃을 불러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가 아버지에게 내 분깃을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두말 하지 않고 각 각 살림을 나누어 줍니다. 둘째는 며칠이 안 되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낭비했습니다. 업친데 겹친다고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돼지 치는 집에 들어가 돼지와 먹이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돼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때사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다 죽게 되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하나둘 아닙니다. 진작에 돌아 왔더라면 하는 사람이 하나둘 아닙니다. 어쨌든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축복입니다. 탕자는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면서도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착각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돌아가기는 하지만 아들로 다시 회복되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아버지를 포기하였음으로, 그 상처로 인하여 아버지도 자기를 이미 포기 했을 것이라는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그는 품꾼이 된 것이 아니라 다시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한번도 자식을 포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포기하지 못하시고 끝까지 기다리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일관된 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구약 사사기에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제나 편안할 때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범죄하곤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블레셋이나 미디안과 같은 주변 족속을 들어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그와 같은 나라의 침략을 받아 고통을 받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때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드온이나 삼손과 같은 사사를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저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나 저들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을 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시 저들을 채찍질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하면 하나님은 또 사사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저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몇 년이 지나면 또 잊고, 고통당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부르짖고, 사사를 세워 구원하시는 역사가 사사기 내내 반복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형제의 죄를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겠다하셨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사사기의 역사를 통하여 정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절대로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거기계십니다. 

죄인인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우리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일말의 양심이 있습니다. 그 양심 때문에 나같이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던 놈을 어떻게 하나님이 다시 아들로 받아 주실까 생각하게 합니다. 490번이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과 짝하여 살던 나를 구원해 주실까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우리의 착각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성경에 나타나시는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수도 없이 배반을 당 하시면도, 그 아픔 때문에 생 앓이를 하시면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못하시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고, 돌아 올 때마다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 이야기에서 감동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어깨에 메고 온다. 좋으면 어깨에 메고 옵니다, 사랑하면 어께에 메고 옵니다, 얼마나 기뻤으면, 얼마나 사랑했으면 어깨에 메고 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 오는 것이 너무 좋아서 너무 기쁘셔서 어깨에 태우고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함께 먹고 즐기자 하십니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 하는 말입니다. 행복한 일이 있을 때 하는 말입니다. 하나을 떠난 내가 돌아 온 것이 하나님의 행복입니다. 여러분과 저 하나님이 잊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함께 먹고 즐기자.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이 극대화 한 것입니다. 풍선으로 말하면 더 이상 부풀릴 수 없는 상태까지 간 것입니다. 최고의 사랑입니다. 가득 찬 사랑입니다. 조금도 오염 되지 않은 사랑입니다. 계산이 없는 사랑입니다. 정 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우리가족에게는 그렇게 합니다. 또는 일가친척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이웃에게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성도들끼리도 그런 사랑을 못합니다. 더욱이 내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그렇게 못합니다, 허랑방탕한 사람에게 그렇게 못합니다. 나와 다른 편에 서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못합니다. 세리와 창기를 그렇게 사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열심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도 제사장들도 그 일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런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큰 아들입니다. 그는 자기 동생을 비난 했습니다. 자기 동생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잘 난 인생입니다. 그는 한 번도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큰 아들에게 이는 네 동생이다 하고 가르쳐 줍니다. 가족입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그 말속에 무엇이 담겨 있나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네 동생 사랑해> 그 사랑은 사실 동생이 돌아오기 전부터 있어야 할 사랑입니다. 왜 동생을 찾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돌아온 동생을 환영할 수 없습니까? 왜 감격이 없습니까? 사랑의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
4살쯤 되면, 우리 아버지는 전지전능하다고 믿습니다. 
12살이 되면 우리 아버지는 아는 것이 많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15살쯤 되면 아버지는 구식이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느낍니다. 
21살쯤 되면 아버지는 골동품이야 차라리 없는게 낫다고 말합니다. 
27살쯤 되면 제법 아는 것도 있고 판단이 옳을 때도 있다고 가끔은 느낍니다. 
32살쯤 되면 인생의 문제를 내 아버지와 의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50세가 되면 아버지는 참 훌륭했다고 말합니다. 
60세가 넘어서면 내 아버지는 내 인생의 미래를 모두 알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만 못하다고 느끼게 된답니다. 사랑이 자라면 됩니다.

어떤 여자분이 부부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부가 대화가 너무 부족하다. 남편과 장단점을 다 나누어라." 그분이 집에 와서 남편에게 서로 부족한 점을 다 나눠보자고 했습니다. 남편이 주저하다가 마지못해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금방 아내 입에서 남편의 단점이 쏜살같이 나옵니다. "당신은 먹을 때 호르륵 호르륵 소리를 내고 먹는데 이제 주위 사람도 생각해서 앞으로는 좀 교양 있게 좀 드세요." 그렇게 한방 먹입니다. 그리고 이제 남편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손을 턱에 대고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한참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편의 얼굴을 보는데 남편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옛날 연애하던 시절의 멋있는 남편의 모습이 나옵니다. 한참 있다가 남편이 말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생각나지 않는데..." 

누가 이긴 것입니까? 사실상 남편이 케이오로 이긴 것입니다. 지적하려면 한두 개 있겠어요? 한도 끝도 없습니다. 백화점 가서 바가지 쓴 것, 가스 안 잠그는 것, 집 열쇠 잃어버리는 것, 어디서 자동차 들이받고 온 것, 자동차 안에 열쇠를 놓고 잠근 것 지적할 것이 많지만 말을 안합니다. "별로 생각나지 않는데..." 이런 자세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랑이 넘치는 환경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을 실족시키는 길, 잃게 하는 길, 무너뜨리는 길을 외면하고, 사람을 살리는 길, 찾는 길, 세워 주는 길, 덮어주는 길로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제일 좋은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집에 왔더니 풍성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배고픈 삶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메마릅니다. 그 영혼이 마르고 그 마음이 마르고 그 가정이 마르고 그 삶이 마릅니다. 세상은 재미있는 것 같아도 없습니다. 재물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어도 배고픈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먹게 하셔야 먹지요. 아무것도 없는 사람하고 똑같아요.

어떤 강도가 돈을 훔치려고 어느 외딴 집을 들어갔는데 방안에서 무슨 소리 가 들렸습니다. 안에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화투를 치는데 강도는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것이지요. 소리만 들리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할아버지가 ‘빨리 먹 어’ 그러니까 할머니가 ‘먹을 게 없어’, ‘아, 그렇게도 없어?’ ‘빨리 먹어’, ‘먹을 게 없다니까’, ‘아, 먹어봐’ 그러니 까 ‘똥밖에 없어’, 그럼 똥이라도 먹어. 밖에 있는 강도가 마음이 찡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가난한 집이 어디 있나? 아무리 먹으라고 해도 먹을 게 똥밖에 없다고 하니까 주머니에서 그동안 벌었던 것 다 주고 갔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먹을 게 없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풍성합니다. 세상은 있어도 그렇게 가난하게 삽니다. 쌓아 놓고도 걱정하며 살고, 불안하게 삽니다. 그러나 교인은 없어도 부자같이 삽니다. 나를 잊지 못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잊지 못한단다. 그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찬양을 같이 따라 하시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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