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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대로 살고 싶은 자의 삶 (눅 15:14~2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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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살고 싶은 자의 삶 (눅 15:14~20a)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둘째가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를 멀리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허랑방탕하였습니다.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로 불리는 둘째 아들의 관심은 재산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기에 돌아올 몫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너무 재산에 관심을 갖다보니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자신의 마음대로 살고 싶은 자유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깃을 요구하였고,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아버지의 곁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아버지의 관계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이 그토록 돈을 모으려고 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해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은 아닙니까? 자유에 대한 갈망은 고귀함에도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유흥과 향락, 무절제와 방종을 자유라고 부르며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삶은 하나님 없이 살려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려는 불신앙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자신의 마음대로 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에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려는 사람들에게 평안이 있습니까?

자기의 마음대로 살기 위하여 아버지를 떠난 둘째의 삶은 어떠하였습니까?

I. 절망

14절입니다.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곳으로 간 둘째는 얼마 동안은 마음껏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는 듯합니다. 하지만 허랑방탕한 생활은 이내 끝이 왔습니다. 돈이 다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1973년 여름, 제 고향 제천에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다는 저수지인 의림지 둑이 터졌습니다. 그렇게 많던 물이 일시에 빠져나가면서 저수지 바닥에는 커다란 도랑이 생겼습니다. 쏟아지는 장마 비도, 위쪽에서 흘러내려오는 물도 더 이상 담아 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흉물스러운 바닥을 드러내었습니다.
   
그 모습은 중학생이었던 제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소풍을 열 한번이나 갔던 그 아름다운 의림지가 텅텅 비었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있습니다. 그 후 다시 복원되었지만 그 때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자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구 써대다가는 언젠가는 고갈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입 없이 지출을 하면, 수입보다 지출을 더 많이 하면 거덜 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원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가 재산을 허비한 것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이라는 은사를 허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실상은
   
1. 은사의 고갈입니다.
   
활활 타오르던 불이 자자드는 것은 땔감이 없기기 때문입니다. 계속 열정이 불타오르고 싶지만 지속적으로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으면 식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은사를 불일 듯 하고 싶어도 계속해서 은혜를 공급받지 못하면 식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디모데는 은사가 고갈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빠져나가는 만큼의 능력이 공급되지 못하였습니다. 불이 계속 타오르기 위해서는 장작이 공급되어야 하는 것처럼 사명을 계속 감당하기 위해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공급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다가도 은사가 고갈될 수 있습니다. 처음 예루살렘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열심히 하던 중에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좋은 일을 하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사람들을 뽑아 구제하는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지도자들이 말씀과 기도로 능력을 공급받지 못하면 공동체 전체가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가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좋습니다. 교회의 사회봉사는 좋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일을 하느라고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듣는 것을 게을리 하여 은사가 고갈되면 큰일입니다. 은혜로 시작한 일이 율법이 됩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자기 자랑이 됩니다. 결국 갈등이 생기고 작은 시험거리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너무 열심 부리지 말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 보다 말씀 듣는 것보다 앞서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십시오. 그러나 영적 능력이 고갈되지 않도록 늘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은 어떠합니까?
15절입니다.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재산을 다 허비한 둘째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붙여 산다는 것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같은 민족은 종으로 부리지 않았습니다. 종이 되어도 일정한 시간이 되면 놓아 자유롭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은 정상적인 유대인으로써 상상할 수도 없는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더욱이 돼지를 치게 되었다는 것은 자존심이 무참히 으깨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불결한 짐승입니다(레11:7 신 14:8).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을 뿐더러 돼지를 치는 것조차 꺼려하며 천시하였습니다. 남의 종이 되어 돼지를 치게 되었으니 그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더욱이 그가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16). 그는 모든 사람에게 따돌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돈을 뿌리며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지만 모든 것을 허비하고 나자 혼자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웃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소외된 자(outcast)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실상은
   
2. 정신의 곤궁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점점 더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경제가 여전히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의 파도가 세계 경제를 삼키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부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만 말한다면 이 보다 훨씬 어려운 시절이 있지 않았습니까? 화장실이 방안에 있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온 동네가 함께 공동화장실도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함께 길어다 먹는 공동 우물을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 경제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 때 보다 더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정신적인 곤궁입니다. 마음이 졸아들어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람마다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받고 제 정신이 아닌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도 마음이 황폐하여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박수를 받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인기에 연연하여 사람들이 떠나갈 것을 미리 걱정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사노라면 자존심 상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짓이나 가리지 않고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럴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 자존심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은 어떠합니까?
16절입니다.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있는 것은 허비하고 들어오는 것은 없이, 자존심까지 상한 둘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없어서 굶주려야 했습니다. 쥐엄나무 열매는 구주 콩나무(carob tree)의 열매로 맛은 약간 단데 주로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며, 기근 때에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으로 대용되기도 했습니다. 설움 중에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크다는데 그는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없어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실상은
   
3. 육신의 탈진입니다.
   
구약 성경 욥기의 욥에게 처음 다가온 고난은 그의 모든 재산을 거두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몸뚱이 하나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고난은 그 몸뚱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종기가 나서 고통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영과 혼과 몸 모두가 건강하여야 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것을 모두 죄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욥처럼 애매하게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도 있습니다. 또한 바울처럼 더 큰 능력을 나타내기 위하여 약하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났기에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피곤하고 지치게 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해결하지 못한 죄로 육체가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을 시달리게 하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바로 믿지 않는 결과일 수 있습니다.
   
쉬십시오. 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억지로 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자유와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여기에서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환’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 그림에서 돌아온 아들의 머리카락은 어떻습니까? 죄수처럼 삭발한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은 머리를 미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삭발한 머리는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그의 신발입니다. 샌들이 벗겨진 그의 왼발은 상처투성이고, 오른발은 망가진 샌들이 겨우 부분적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거친 발바닥은 그의 삶이 얼마나 곤궁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둘째가 겪은 고통스러운 삶은 아무런 소득 없이 단지 허비된 삶이었습니까? 삶에서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신다면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고통을 겪으면서 절망하였지만 그것이 그를 스스로 돌이키게 하였습니다. 스스로 돌이켰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자신에게로 돌아왔다’(come to himself)는 말입니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절망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II. 자각

17절입니다.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둘째는 재산을 허비하고, 정신적으로 절망하고, 육체적으로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어서야 제정신이 들어서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라며 아버지를 생각하였습니다. 고통 속에서 아버지를 생각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인생의 절망을 통하여 아버지의 집이 참 행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통하여
   
1. 비로소 고향을 생각합니다.
   
태어난 고향이 아니라 돌아가야 할 곳, 돌아가야 할 분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하여 진정한 길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철저한 고독을 느끼고 절망하면서 절대자를 찾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져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절망을 통하여 나를 향하여 먼저 손을 내밀고 계신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죄 문제로 수개월 동안 고민을 하거나, 경제적인 파탄이나 육체의 질병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어 보이고 울면서 은혜를 간구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절망이라고 하는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가 없는 고통은 없습니다. 고난을 겪으면서 회복하여야 할 본질을 생각하는 것은 희망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찾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는 절망을 통하여 또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18절입니다.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둘째는 고통 중에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고 말합니다. 비로소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마음대로 탕진하고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하며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아버지께 잘못하였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통하여
   
2. 자신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죄를 짓고 고통을 겪다가 비로소 죄를 깨닫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서도 잘못을 깨닫는다면 좋겠지만 고통을 통하여 철저하게 회개할 수 있다면 그 고통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으면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비난하느라고 고통이 주는 유익을 지나쳐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칠 줄 모르는 세상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모든 고통이 죄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죄의 결과가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죄가 있다면 하나님께 고백하여야 합니다. 단 하나의 죄를 빼고는 하나님께 용서하지 않으시는 죄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죄는 고백하지 않는 죄입니다. 성령님께서 회개하도록 마음에 작용하시는데 회개하지 않는 것은 성령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나는 잘못이 있다면 철저하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철저한 회개를 통하여 다시 불 일 듯이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절망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19절입니다.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둘째는 고통의 절망을 겪으면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겸손한 마음입니까(?) 참으로 겸손한 마음입니까? 돌아온 아들이 종들 사이에 끼어서 품꾼노릇을 한다면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런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이라고 해 보았습니까? 혹시 품꾼으로라도 써 달라고 하면 아버지가 정말 품꾼으로야 쓰겠는가하는 얄팍한 계산은 없었겠지요? 혹시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피난처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한 것은 아닙니까!
   
사람의 깨달음이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3. 고작 품꾼을 기대하였습니다.
   
인생의 깨달음은 절대자를 찾는 계기는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절망을 통하여 절대자를 찾지만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품꾼이나 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회복하는 구원이 아니라 여전히 종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생각하며 영원히 아버지의 노예로 살아가겠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깨달음은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깨달음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근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지옥 갈 것이 두려워서 봉사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착한 일을 한다면 자녀의 마음이 아니라 노예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노예로써의 종교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의무감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만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신앙을 다시 점검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이 절망을 통하여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절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십니다. 상당히 오랫동안 죄 문제로 고민하게도 하십니다. 경제 파탄에 빠뜨려 비참한 상태에 있게도 하십니다. 또 무거운 질병으로 병상에 누워 오직 하나님의 도움 외에는 살 방법이 없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기도 하십니다(호6:1).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다면 내 힘으로는 안 된다고 철저하게 절망하고, 오직 하나님께 메어달려 그 은혜를 구합시다.

여러분의 삶에 고통의 절망이 있다면 그것은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짓입니다. 언제나 은혜의 하나님께로 돌아서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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