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침노(侵擄)하는 자의 천국 (마 11:2~19)

  • 잡초 잡초
  • 1037
  • 0

첨부 1


침노(侵擄)하는 자의 천국 (마 11:2~19) 
 

1. 성경이 폭력을 조장하는가?

지금 우리는 暴力이 亂舞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난 2008년 12월 11일, 학교로 등교 중이던 여덟 살짜리 김나영(가명) 양이 당시 56세이던 범인 조두순에게 화장실로 납치되어 强姦 傷害를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월 24일, 부산에서 중학교 입학을 앞둔 이유리 양이 자기 집에서 김길태에 의해 납치되어 성폭행당한 후 살해된 사건으로 인해 전 국민이 분노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아동들의 성폭력 피해가 하루에 세 명꼴로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성폭력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나라의 지도자들인 국회의원들의 국회 내 폭력은 어떻습니까? 몸싸움은 기본이고 전기톱과 커다란 해머로 의사당의 집기를 부수는 모습! 이런 국회의원들의 폭력에 대해 어느 분이 재미있는 유머를 만들었습니다. “국회 폭력이 기분 좋은 이유 10 가지!” 그 가운데서 두 가지 만 소개하면, ➊ 국회가 아주 뛰어난 戰鬪力을 가진 戰鬪 組織이라는 사실이 국민을 기분 좋게 만듭니다. 그래서 유사시 국회의원만으로 편성된 부대를 전투에 투입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의원들의 전투력은 뛰어납니다. ➋ 국회의원이 이렇게 용감하고 저돌적이며 폭력적이라면, 혈기 넘치는 남한 젊은이의 폭력성은 충분히 짐작이 되는 바, 북한은 그것이 무서워서 전쟁을 도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고 했습니다. 

이런 폭력의 문제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죠? 나라 밖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은 아직도 ‘우사마 빈 라덴’과 그의 테러 조직 ‘알카에다’와의 길고 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미군 혹 연합군 측과 알카에다 측의 전투 장면은 TV를 통해서 그대로 전 세계인들에게 중계되는데요. 이렇게 暴力과 殺傷이 안방에 그대로 전해지면서 평범한 사람들까지 폭력을 즐기게 되고, 나아가 점점 폭력에 중독되어 간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누군가 이 개인적이고 사회적이며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폭력에 대해 “그래선 안 된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 역할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예, 바로 우리 기독교회이고, 그리고 그 근거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非暴力과 平和를 선언해야 할 성경이 도리어 폭력을 인정할 뿐 아니라 조장하는 듯 한 발언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2. 세례 요한의 질문, 예수님의 답

1) 세례 요한의 질문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지 약 1년 반이 지났을 때, 소위 ‘제2차 갈릴리 사역’을 하고 계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사해 바다 동편에 있는 토굴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요. 그 이유는 요한이 동생의 아내를 부인으로 맞은 헤롯의 不貞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었습니다(눅3:19). 그렇게 감옥에 갇힌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 사실, 이것은 의외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大衆에게 소개함으로서 예수님의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하게 만든 장본인이 요한이고, 또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자신으로서는 신들매 풀어드리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는 크고 위대하신 분’,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강물에서 나오실 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을 그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그리고 1년 반의 시간이 흘렀고, 예수님은 자신이 소개한 그 이상으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끌면서 사역을 잘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예수님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제자들을 대신 보내어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요한은 왜 이런 질문을 한 것일까요? 우선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사역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모습을 듣고 보면서 ‘과연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제대로 하고 계신 것인지’, 즉 ‘메시야로서의 사역이 성공적인지, 지지부진 한지, 아니면 실패한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픈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왜요? 자기가 생각해 오던 메시아의 모습과 예수님이 하시는 모습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메시아는 ‘구원주’이면서도, 무서운 ‘심판주’이실 것이다!” 이것은 부분적이긴 하지만,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이 “메시야는 성령과 불로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했을 때, 그 말은 ‘성령 세례’보다는 ‘심판’의 뜻이 더 강했습니다. 또 메시아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3:16~17)”는 말씀이나,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지 않느냐?” 등의 말씀들은 다 심판과 관련된 말씀이었지요. 그런데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식은 자신이 그렇게 기대하고 또 선포했던 그런 ‘심판주’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위선적인 유대주의자들과 유대 땅을 짓밟고 있는 로마, 그리고 로마의 꼭두각시가 되어 이스라엘을 유린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의로운 자신을 감옥에 넣은 이방인인 헤롯에 대해서 심판하시기는커녕 비판조차도 않으셨습니다. “아니 메시야께서 그럴 수 있는가?” “내가 생각한 메시야의 모습과 너무 차이가 나지 않는가?”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의구심이 일어나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의 대답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해 구약성경을 인용하셔서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4,5).”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직접적으로 대답을 하시는 대신 성경을 인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요한이 원한 답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경만이 메시아와 그의 사역에 대한 정확한 답을 줄 수 있었기에, 그렇게 성경으로 답하신 것입니다. “요한아, 내가 가는 길이 네가 보기엔 틀렸을지 몰라도 이 길이 성경이 예언한 바로 그 길이란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6). 즉, 누구든지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삼으면 예수님에 대해서 뿐 아니라,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실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예수님을 믿는 그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답을 하신 예수님은 계속해서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아주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삶을 살면서 최소한의 양식과 옷을 취했으며,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입으로서 뿐 아니라 삶으로서 보여준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선구자였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9~15). 바로 이런 면에서 ‘세례 요한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선지자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람, 그리고 여자가 낳은 자중에 그보다 더 큰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래놓고서는 11절 하반 절에서 그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즉, 요한이 아무리 위대해도 그는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결국 그는 구약적 질서에 속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구속, 부활, 성령의 강림 등으로 시작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지 못한다는 면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못한 자, 가장 작은 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은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세례 요한도 누리지 못할 천국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천국은 어떤 사람들의 천국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즉시 답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 침노하는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도대체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그리고 침노하는 자가 천국을 빼앗는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일까요? 

1) 천국이 침노를 당하고 있다! 

➀ 12절을 해석하는 열쇠는 “침노”라는 말입니다. “침노”는 성경 원어로 “비아조”인데,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단 두 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과 누가복음 16장 16절이죠. 누가복음 16장 16절은 이렇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즉 “비아조”는 오늘 본문에서는 “침노”로, 누가복음에서는 “침입하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을 <공동번역>과 <킹제임스 영어 성경>은 “폭행”, “Violence(폭력)”으로 번역했는데요. 

그 이유는 “침노”라는 말의 원래 의미가 “힘이나 폭력을 사용하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으로의 진입은 폭력적인 방편에 의한다’고 본문을 해석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 당시에 폭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열성당원(Zealot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천국이 인간의 폭력으로 이 땅에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학자들은 오늘 본문을 ‘천국은 열렬한 노력으로 취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역시 이러한 뜻으로 누가복음 16장 16절의 “침입하느니라”를 ‘그리로 들어가는 것’, 즉 ‘진입(advancing)’으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이 단어가 사용된 다른 헬라 문헌에서도 ‘원기왕성하다’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과 누가복음의 “비아조”는 ‘폭력’이 아니라, ‘적극성’, 또는 ‘열의’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타당한 것은 예수님께서 폭력적인 방법으로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의 “침노”는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열심”이라는 뜻입니다. 

➁ 두 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의미를 따져야 하는 것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라는 말씀은 사탄과, 그의 수하들인 악한 영들과, 그들의 사주를 받은 개인과 단체가 주님의 나라를 공격하고 있다는 뜻으로 봅니다. 비록 지금 그 힘과 세력이 조금 남아 있기는 하지만, 사탄은 예수님으로 인해 패배했고, 장차 주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히 패배할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재림까지 사탄은 세상과 사람들을 파멸시킬만한 능력과 세력을 가지고 활동 중이라는 뜻으로, 여전히 주님과 주님의 나라와 그 통치에 대해 시비를 걸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항상, 치밀하게, 아주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문제로, 때로는 신비하고 영적인 문제로, 그리고 강하게 유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천국은 공격을 받고 있고, 천국 백성인 성도 여러분들도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죠.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의 군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속한 천국이 공격을 받고, 천국 군사인 자신 역시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거기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한 나라가 자기를 공격해 온 다른 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배 이상의 전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군사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즉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주님의 나라를 지켜내고, 자신이 이기기 위해서는 사탄과 그의 수하들보다 최소한 세 배는 더 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쟁터에서 전투를 피해 다니는 군인은 가장 먼저 희생당합니다. 한참 전투중인데 전투를 방관하거나, 억지로 끌려 다니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군인이 있다면,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동료군인들까지 희생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할 뿐 아니라, 성도와 다른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사단과 싸워서 승리해야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이런 식으로 오늘 본문을 정리하면 “지금 천국은 침략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비성경적이라든지, 비신학적인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근거가 있고, 타당한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침노”를 폭력으로 보는 것이나, “침노를 당한다”는 말을 ‘공격받고 있다’고 보는 것은 오늘 본문을 정확하게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2) 침노를 당하니 침노하라!

오늘 본문의 “침노”는 “폭력”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열심”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리고 “침노하는 자”는 ‘난폭한 사람’,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라, ‘원기왕성한 사람’,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빼앗느니라”는 ‘잡다, 취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원어에 맞게 번역하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힘을 쓰는 사람들이 차지한다.” 무슨 말입니까? 세례 요한 때까지 천국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유일하게 구원을 받는 選民이었지요. 

그러나 세례 요한 이후,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것이 변했습니다. 천국은 ‘유대인이라는 혈통이나 인간적인 전통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천국을 열렬히 사모하는 자들이 얻는 것’으로요! 아멘이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천국은 지금까지와는 완전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천국은 힘과 정열을 쏟아 진지하고 성실하게 추구하며 노력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구원을 얻는 조건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천국을 지키고, 나아가 확장시키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3) 침노한 사람들

성경에는 이러한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예가 아주 많습니다. 

➀ 그 우선적인 예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입니다(마9, 막5:25~34, 눅8). 혈루증이라는 부정한 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수많은 의원들을 찾아다녔고, 여러 가지 약을 먹었으나 백약이 무효했으며, 그러면서 재산은 재산대로 날리고 몸의 병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점점 더 깊어갔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병, 부정한 여인이라 하여 가정과 친척, 마을이나 예배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병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모인 공공연한 장소에서는 주님께서 나아갈 수 없었기에,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길에서나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자신이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그 뒤에서 살짝 그분의 옷을 만지기로 하고, 무리들을 비집고 예수님께로 접근했으며, 드디어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믿음대로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여인이 옷자락을 살짝 만졌을까요? 아니면 사정없이, 낚아채듯이 잡았을까요? 우리는 '여인이 아무도 몰래 예수님을 스치듯이 살짝 만졌지 않겠냐' 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9장(20~22), 마가복음 5장(25~34), 누가복음 8장(42b~48)에 나오는 “그 겉옷 가를 만지다”와 “옷가에 손을 대다”는 말은 같은 성경 원어인데요. 

그 의미는 ‘잡다(seize)’와 ‘공격하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인은 공격적으로,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옷을 움켜쥐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 여인이 천국을 침노한 사람입니다. 부정한 그녀는 천국의 백성으로서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당시의 이방인들처럼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천국을 빼앗았습니다.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그 수많은 무리를 헤치고 주님께 다가가, 주님의 옷을 낚아채듯이 움켜쥠으로서! 

➁ 두 번째 사람은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마15:21~28). 예수님은 두로 지방에 몰래 들어가셨지만,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은 금방 퍼졌고, 거기에 살던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이 자기 동네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녀는 가나안 사람들과 섞여 살던 헬라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밖, 약속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딸이 귀신에 들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제 딸이 귀신들렸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제 딸아이를 고쳐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신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의 잃은 양 외에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였습니다. ‘나는 네 소원을 들을 생각이 없다, 나는 내 백성으로 인해서도 눈코 뜰새없이 너무 바쁘다.’ 그러나 여인은 고집스러웠습니다. “그러셔도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극적이고 큰 상처가 될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개들한테 던지는 것은 마땅치 않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이방인, 즉 개처럼 부정한 여인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사람도 아닌 개에게 주겠니?’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그러자 이어지는 그녀의 대답은 놀랍도록 겸손하고 현명했습니다. “주여, 그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예, 저는 개입니다. 그렇지만 주님, 개들은 주인이나 그 자녀들이 먹을 음식을 빼앗아 먹으려고 하지 않고, 다만 주인의 자녀들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 음식 잔반을 먹으려 할 뿐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 부스러기, 잔반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자격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부스러기만큼 작은 주님의 능력이나 주님의 은혜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딸은 고쳐질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면서 구했고, 결국 응답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녀의 모습이 천국을 침노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➂ 마지막으로 살펴볼 사람은 바디매오입니다(마20, 막10:46~52). 바디메오는 여리고 지방의 앞 못 보는 시각 장애인으로서 구걸로 연명하는 거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자기 옆을 지나가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지나가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퉁명스레 알려주었습니다. 그 순간, 바디매오의 심장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흥분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였기 때문이죠. 다윗의 자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듣고 믿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자신으로서는 예수님을 찾아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신다는 것, 그것도 자신이 구걸하는 그 길로 지나신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동안 소경 거지로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던가! 춥고 배고픈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을 죄인 취급하던 사람들의 경멸과 거기서 오는 소외감 …’, 지난 세월의 아픔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아주 가까이에서 무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 그는 어디계신지도 모르는 예수님을 향해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사람들의 욕설이 쏟아졌습니다. “조용해라! 시끄럽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병신 꼴값하네!” “이스라엘의 왕께서 입성하시는데 감히 너 같은 것이 방해를 해?” “이 분은 지금 속히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해. 그것이 새로운 역사를 이 땅에 이루시는 길이야.” 이런 무시와 비난의 소리는 이미 수백 번 수천 번 들어온 소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들의 욕설은 바디매오의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번에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질러보지 않은 가장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선생님,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야로 믿고, 무리들의 반대와 저지에도 불구하고 외치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의 눈에 손을 대사 고쳐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여러분, 바로 이런 믿음이 침노하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침노하는 사람이 천국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4. 침노하라, 침노하라, 침노하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장 적극적으로, 가장 열심을 내어서, 힘쓰고 노력하고 땀 흘려 얻어내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사람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 얻으려는 것, 이루려는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성도로서 여러분이 가장 열심히, 그리고 가장 뜨겁게, 그리고 가장 힘을 써서 차지하려고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천국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왜요? 침노하는 자만이 천국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강력한 자만이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그들에게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열심히, 힘을 다 해서 하나님을 붙들었기에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렇게 천국은 절대로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과 열의를 다하여 힘써 만들어 나가는 것임을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 백성으로서 여러분의 마음과 삶의 태도가 “침노하는 자”와 같게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침노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천국에 대하여, 신앙적이고 영적인 일에 대하여, 영적인 싸움에서, 그리고 인생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침노하는 자가 되십시오. 오늘 본문은 침노하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차지하고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와 밤 세워가면서 씨름하여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야 말았던 얍복 강가의 야곱을 보십시오. 

왜 “생떼를 쓴다”는 말이 있지요? “생떼(生-)”는 ‘억지로 쓰는 떼’라는 뜻으로 ‘생억지(生--)’와 같은 말입니다. 주로 어린아이들이 자기들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소위 ‘땡깡’을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어렸을 적에는 그렇게 몸부림치며 노력했었지 않습니까? 그러던 여러분들이 지금은 왜 그렇게 얌전해지셨습니까? 부족함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충분해서 그렇습니까? 만약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있고,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침노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마치 성경이 폭력을 조장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오해일 뿐이죠. 오늘 본문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정말 싸우듯이, 전투하듯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열심을 가진 자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적당히, 미적미적, 주시면 좋고 안 주셔도 그만이고, 차지하면 좋고 못해도 그만인 모습은 여러분의 삶에서 사라지기 바랍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각양 은사와 선물들은, 그리고 여러분이 이 땅에서 얻으려는 것들은 침노해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침노하는 자들에게 먼저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침노하는 열심”으로 남은 때를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