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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을 담아 드립시다 (대상 2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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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담아 드립시다 (대상 29:1~19) 

   
현대교회에서 ‘헌금’은 조심스러운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건축헌금’은 더욱 민감한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선 교회에서 헌금에 대해 왜곡되게 가르치기 쉽고, 또한 헌금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 헌금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조건인 것처럼 잘못 가르쳐집니다. 그리고 교회건축헌금 작정을 앞두고 부흥회를 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이 때 부흥사는 헌금 작정 실적이 좋은 목사들이 앞 다투어 초청됩니다.

다음으로 교인들은 지나치게 헌금에 대해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건축헌금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신도시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의 푸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여 교회건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 새가족이 오지 않더랍니다. 그리고 건축헌금을 작정하려고 하자 30% 정도의 교인이 교회를 떠나더랍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몸 저 누운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교회도 헌금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입니다. 특히 건축헌금 이야기를 해야 할 상황입니다. 이제 성전재건축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참여하여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건축헌금에 관해 말씀드리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헌금 목표를 정해 놓고 강요하는 일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헌금을 더 많이 내도록 분위기를 연출할 생각도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 하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충실하게 안내만 할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교우들에 대한 신뢰를 더욱 굳건하게 지켜갈 생각입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건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이를 위해 본격적으로 기도하는 데도 새가족이 늘면 늘었지 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건축헌금 작정을 선포한 뒤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성도들이 참여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성전건축을 위해 준비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건축을 위해 헌금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대상 29:1-5를 보면 다윗이 성전건축을 준비할 때 그가 가졌던 기본인 생각을 보여줍니다. 

첫째, 성건건축 준비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바 되었으나 아직 어리고 미숙하며 이 공사는 크도다 이 성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성전을 짓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전을 재건축함에 있어서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전재건축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성전건축 준비는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성전건축을 준비할 때 성전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전재건축에 참여할 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곳에 세우신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성전건축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하는지라” 저들이 성전건축을 위한 여러 가지 재물을 드렸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전건축을 위해 헌금하게 될 때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건축헌금을 작정할 때 이것은 곧 하나님과의 약속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0절 이하에서는 성전건축 준비를 마치고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드린 기도입니다. 이 기도 안에서 다윗 왕과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 성전건축을 위해 헌금할 때 마음을 담아서 드렸다는 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앞에 건축헌금을 작정하고자 합니다. 건축헌금 작정은 먼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먼저 작정을 하고 후에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먼저 드리고 그리고 형편에 따라 물질을 차후에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저들이 성전건축헌금을 하며 어떤 마음을 담아드렸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건축헌금을 작정하려 할 때 하나님께 담아 드려야 할 마음입니다.

즐거운 마음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성전건축헌금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건축헌금 작정을 하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음이 바로 즐거운 마음입니다.

막 14:3 이하를 보면 향유 옥합을 깬 여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갑작스런 돌발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과 일행이 식사 중이셨습니다. 갑자기 한 여인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 값비싼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식사 중인 사람들이 한 눈에 이 여인이 깨뜨린 향유 옥합의 가치를 알아차렸습니다. 무려 삼백 데나리온 이상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까 일 년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가치의 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부어버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크게 낭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식탁에 둘러선 사람들이 크게 화를 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왜 이 옥합을 깨뜨렸을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감도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렇게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 12:3에는 이 여인이 마리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었지만 다시 살려주신 나사로의 누이입니다. 부모 없이 오라비 의지해서 살고 있었는데 오라비가 죽었습니다. 절망 중에 울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그런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을까요? 이제 이 예수님께 무엇을 드린들 아깝겠습니까? 마리아는 향유 옥합을 깨뜨리기 전에 이미 그의 마음의 옥합이 깨뜨려져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리기 전에 우리의 마음의 옥합이 깨뜨려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래야 즐거운 마음으로 건축헌금을 작정할 수 있습니다.

미국 오클라호마 시에 있는 한 교회 예배 시간에 색다른 장면이 나타난답니다. 헌금 시간이 되면 성도들이 먼저 크게 박수를 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즐거운 마음으로 헌금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먼저 박수를 치며 즐거운 마음을 표한다는 것입니다. 

고후 9: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두 가지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억지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색하게 작정하는 것입니다. 대신 즐거운 마음으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먼저 마음의 옥합을 깨는 일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옥합이 깨지지 않은 상태에서 향유 옥합을 깨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주 앞에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즐거운 마음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정직한 마음

본문 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다윗이 정직한 마음으로 성전건축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직이란 말은 “메샤르”란 말입니다. 이 말은 ‘곧다’, ‘바르다’라는 말입니다. 다윗이 정직한 마음으로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이 곧고 바르다 것을 말합니다. 결코 삐뚤어지거나 왜곡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건축헌금을 작정할 때 그 마음이 정직해야 합니다.

행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나옵니다. 1-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여기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동기가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땅을 팔아 헌금하여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교회에서 유력한 자리에 오르게 됐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것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헌금하기로 한 것입니다. 

오늘도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체면 때문에 헌금을 작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해서 헌금을 작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식해서 헌금을 작정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과정이 정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소유를 팔아 다 헌금하기로 하고는 아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를 숨겼습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성령은 아셨습니다. 결국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을 속이게 됐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으면 아까운 마음에 바꾸면 안됩니다. 사탄이 자꾸 그 마음을 미혹합니다. 처음 작정키로 해 놓고 아까운 마음에 자꾸 흔들립니다. 그래도 흔들리면 안됩니다.

연극인 윤석화씨의 간증입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33세의 윤석화는 당시 무척이나 가난한 연극배우였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렇게 가난할 때 하나님께서는 십일조 헌금에 대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너무 살기가 힘들어 지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신의 아그네스’로 무대에 오르게 됐고, 처음 개런티다운 돈 120만원을 손에 쥐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십일조 드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집안 은밀한 곳에 돈을 숨겨놓고 공연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누군가가 들어와서 그 돈만 가지고 간 것입니다. 너무 기가 막히고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울며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그 돈 찾아주세요. 그 돈 찾아주시면 십일조 낼게요.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을 십일조 내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찾아주세요.” 

다음날 공연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없어졌던 그 돈이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내가 있었는데 없어졌다고 착각한 것이었나? 정말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가져다주신 것인가” 미스테리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때부터 십일조를 하게 됐고, 그 후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 주신 마음을 정직하게 따라야 합니다. 

정성된 마음

본문 1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 주의 계명과 권면과 율례를 지켜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시고...” 다윗이 앞으로 성전건축을 하게 될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셔서 성전건축의 역사를 잘 이행해 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성된 마음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한마디로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막 12:41 이하를 보면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부자들은 많은 헌금을 했고, 가난한 과부는 겨우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헌금했습니다. 분명히 부자들이 가난한 과부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돈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이 그날 헌금한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바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부자들은 많이 바쳤지만 자기가 가진 소유 중에 작은 일부를 드린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가난한 과부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보실 때 가진 소유와 바친 헌금을 비례로 따져보면 가난한 과부는 100%를 드린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1%, 10%, 20% 정도를 드렸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헌금의 액수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 헌금에 담긴 정성을 보십니다.

오래 전에 전주 기독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 집사님의 소원은 반듯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시골 교회에 헌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교회를 지을 수 있는 형편이 안되었지만 개울의 모래를 퍼서 벽돌을 찍고 교인들도 조금씩 나누어서 초라하지만 교회당이 건축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폭풍이 불어서 짓고 있는 교회당을 쓰러뜨려 버렸습니다.  더 이상 교회를 못 짓게 되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집사님은 아내에게 자신의 눈을 팔아서 교회를 짓겠다고 말하고는 그 길로 전주에 있는 기독병원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병원 의료진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는 눈을 팔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했습니다.

당시 병원 의료진들은 대부분 신앙이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뒤 이 분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병원 직원들이 모금운동을 벌였습니다. 저마다 십시일반으로 헌금에 참여했습니다. 큰 병원이고 직원도 많고 해서 작은 시골교회를 짓기에 충분한 돈이 모금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지으려던 교회당보다 더 크고 멋있는 교회당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성된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건축헌금 작정에 여러분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건축헌금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필 이럴 때 내가 이 교회 이 자리에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담스럽고 고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일생에 다시 없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며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이 거룩한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다시 없는 복일 수 있습니다.

한 주 동안 기도하시며 작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건축헌금은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는 일입니다. 즐거운 마음, 정직한 마음, 그리고 정성된 마음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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