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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을 여호와께로 (삼상 7: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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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호와께로 (삼상 7:1~17) 
 
 
본문은 사무엘이 자기 시대에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보여줍니다.
4-6장에서 언약궤 사건이 발생하는 동안 사무엘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왜곡된 신앙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서 이십 년을 머무는 동안도 잠잠했습니다(1-2a). 그 동안 사무엘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이스라엘 전역에 두루 전파하며 선지자 무리들을 양성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참조. 3:19-21; 10:5; 19:20). 말씀이 희귀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면서 백성들 사이에 회개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2b)하게 되었지요. ‘사모’에 해당하는 원어는 탄식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때가 무르익자 사무엘이 공개적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출 19:6)으로 삼으시려는 목적을 두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신 까닭은 단지 그 백성이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인들의 압제를 당하는 노예 상태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출애굽 시키셔서 자유로운 땅으로 옮기신 것이지요. 하지만 사사 시대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서 계속 벗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사무엘의 사명은 하나님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하도록 돕는 일과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위치로 다시 회복시키는 일이었지요.

이 사명을 위한 사무엘의 첫 번째 공개적인 메시지는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입니다(3). 사무엘이 볼 때, 탄식하는 것과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탄식만 하고 있으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도 아니었지요. 아직도 이스라엘은 은혜 받을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탄식하면서도 그 마음으로는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향하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회복을 위해 사무엘은 분명한 회개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첫째로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했지요. ‘마음’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 850회 정도 언급되는데 인간 내부의 총체이며 모든 영적 기능의 원천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들로부터 받기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회개란 그 마음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심”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지요. 비록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하고 있을지라도 그 마음 한 부분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음란하게 섬기던 옛 생활의 즐거움을 포기치 않고 있다면, 온 마음이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몸은 예배하고 있으나 마음은 콩밭에 있다면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못한 셈이지요. 온 마음이 송두리째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로 “그(분)만 섬겨라”고 했지요.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이 타락했다고 말할 때는 언제나 가나안 종교와 혼합되는 현상이 핵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 번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을 때도 그들은 결코 여호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섬기면서 다른 이방 종교의 요소를 섞어서 섬겼을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이방종교의 현상을 섞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란 그러한 혼합종교적인 현상으로부터 순수해져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지요. 양다리 걸친 상태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는 약속을 덧붙이지요.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애굽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셨던 것처럼,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회복되면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왜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서 탁월하게 드러나지 못했을까요? 왜 이민족의 압제를 당하며 탄식 속에서 세월을 보내야만 했을까요? 사무엘은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b)고 말씀하셨습니다. 신구약 성경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존재의 독특한 특성임을 알려줍니다. 먼저 코드를 연결해야만 작동되는 가전제품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제대로 되어 있어야만 각자에게 있는 은사대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게 되었습니다(4).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모이게 했고, 이스라엘은 함께 모여 금식하며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5-6).

‘회개’ 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자랑이 되고 공로가 될 수는 없겠지요. 회개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자동적으로 몰고 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회개 없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시 34:18). 대충 회개하고 알찬 은혜를 기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건성으로 회개하면서 찐한 은혜를, 가볍게 회개하고 두둑한 은혜를 받으려 합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도 건성으로 ‘미안해 미안해’하는 것과 진심을 다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요. 하나님께 대한 회개도 진지해야하고 전심이어야 합니다.

회개 중에 갑자기 위기가 닥쳤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여서 반란을 도모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진압하러 올라왔습니다(7). 백성들은 두려워하면서 사무엘에게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8)라고 합니다. 언약궤로 구원하게 하자던 4장과 비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실 분은 여호와이심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온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분만을 의지하는 모습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으로부터 회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자 “여호와께서 응답”하셨습니다(9). 기도 자체가 기계적으로 신적 도움을 불러오지는 않습니다. 기도한 것이 쌓여서 그 공로로 응답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받을 수 없는 기도가 있습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했지요(잠 28:9).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미신처럼 믿고 있는 동안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환날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는 약속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야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하셨고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하도록 하셨습니다(10). 4장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 앞에서 패하였던 상황이 여기서 역전됩니다.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블레셋 손에서 구원하시리라는 사무엘의 말이 여기서 성취되지요. 사무엘은 돌을 취하여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고 그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도움의 돌)이라 했습니다(12). ‘여기까지’는 지리적으로는 에벤에셀까지가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대단히 독특한 방식으로 도우시기까지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주시기까지 도우셨지요(롬 8:32).

사무엘은 기념석을 세움으로서 하나님께서 도우신 사실을 이스라엘이 기억하도록 도왔습니다. 철학자 헤겔(George W. F. Hegel, 1770-1831)은 역사의 유일한 교훈은 국민이나 정부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이라 했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현재와 미래는 관심이 많은 과거에 대해서는 비교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의 현장인 역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건을 기억도록 돕습니다. 기억은 감사하게 합니다. 감사는 신실한 신앙을 유지하도록 돕지요. 과거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들을 기억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아주셨고, 가나안의 가장 강한 족속인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게 하셨습니다(13-14). 그리고 15-17절은 사무엘이 이런 은혜 속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음을 말합니다. 사무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강대국에 맞서려면 경제가 튼튼하고 군사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입니다. 다윗 시대에 이르면 그런 원칙이 적용되지요. 하지만 사무엘 시대에는 신앙이 올바르면 그것이 가장 강력한 국방력이 되는 대단히 특별한 원칙이 적용되었습니다. 사실 다윗도 일반적인 원칙과 더불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보편적인 원칙을 만드신 후에 원칙대로 돌아가도록 두시고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곧 이신론(理神論)에서 말하는 신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눈동자처럼 지키시며 머리털까지 헤아리는 분이라 가르칩니다(신 32:10; 눅 12:7).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보편적인 섭리 위에 특별한 섭리로 역사하십니다. 성도가 합리적으로 살아야 하지만 합리적인 생각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까닭은 신앙에는 초합리적인 측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는 초합리적인 약속을 누릴 수 있습니다(마 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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