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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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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눅 15:1~7)  
 
 
1. 미국에 사는 한 교포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한 병원에서 자궁에 혹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엄마에게 간호받고 싶다고 응석 부려 한국에서 수술을 받았지요. 그러나 건강한 몸으로 미국에 돌아온지 두 달 만에 나는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엄마가 위암 말기 진단을 받으신 것입니다. 
며칠을 울면서 가슴을 태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치료받을 때 엄마는 잠도 깊이 들지 못하고 음식도 제대로 못 드셨습니다. 꿈에 자꾸 돌아가신 분들이 보인다며 헛손질하고 비명까지 질렀는데 나는 그저 나이 들어 기력이 약해지셔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또 내 몸 아픈 것만 생각하고 호박전이 먹고 싶다 했지요. 그러자 엄마는 마루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몇 시간이나 호박전을 부쳐 주셨습니다. 
.................... 중략 .......................
35년간 홀로 장하게 키운 삼 남매 곁에서 엄마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엄마, 바쁘다며 외롭게 해서 미안해요.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딸 얼굴 자주 보여 주지 못해 미안해요. 가장 미안한 건 내 자식 챙기느라 엄마에게 신경 못 쓴 거예요. 엄마,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나도 엄마처럼 따뜻한 엄마가 될게요.”
(좋은 생각, 2010년 3월호, p. 22-23에서 인용)

2. 엄마에게 무관심한 딸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몸 아픈 것만 생각하고 엄마 아픈 것은 생각하지 못한 딸입니다. 자기 자식은 챙길 줄 알면서 자신을 위해 희생한 엄마에게 신경 못 쓴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자기 몸, 자기 자식, 자기 재산, 자기 이익, 오로지 자기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부모가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시는지,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로마서 8:32에서 바울사도는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흘리시고 죽임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를 바라보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비유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3.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잃은 것을 되찾는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길 잃은 양, 잃은 동전, 아버지를 떠난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 이야기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잃은 그것을 안타까워하며 찾으려고 애쓰고 노력하여 드디어 찾았다는 것입니다. 잃은 것을 찾은 기쁨이 너무나 커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오로지 길 잃은 영혼에게 가 있습니다. 

99마리 양을 들판에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하나님 아버지, 
99마리 양이 들판에서 늑대의 밥이 될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와룡산 개구리 소년을 찾아나선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길 잃은 자식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을 다 바쳐서라도, 내 재산을 다 바쳐서라도 찾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다면, 무엇도 아깝지 않고 다 투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위에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는 사람, 길 잃고 방황하는 사람,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 재미에 취하여 살고 있는 사람, 그들읕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살고 있지만, 속으로는 많이 지쳐 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에 지쳐 있습니다. 이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기를 원합니다. 그 한 사람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내가 무슨 희생이라도 하겠다는 마음, 이 마음을 갖는 것이 십자가 사랑을 받은 우리의 신앙 양심입니다. 

4. 잃은 것을 찾기 위한 아버지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머리 속에서 그림을 그려봅시다. 집을 나가 거지가 된 아들이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고 터벅터벅 마을 어귀에 들어섭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후, 매일 문을 열어놓고 아들을 기다립니다. 애타는 마음으로 언제 돌아오려나 가슴을 태우며 마을 입구를 내다보며 기다립니다. 저 멀리 아들의 모습과 비슷한 사람이 걸어옵니다. ‘내 아들이다’ 라는 직감이 들어 신도 신지 않고 정신없이 뛰어나갑니다. 거지 아들, 냄새나는 아들, 그 아들을 부둥켜 안고 엉엉 울며 입을 맞추고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아들아, 잘 왔다. 잘 왔어.”

오늘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찾아오신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반갑게 부둥켜 안고 반갑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잘 왔다. 내 아들아. 잘 왔어, 내 딸아.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많이 힘들지. 이제 괜찮아.”

오늘 성경말씀의 세 가지 잃은 것을 찾은 비유에서 잃은 것을 찾았을 때, 주인이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기쁨을 친구와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양 한 마리를 찾았는데, 한 드라크마를 찾았는데,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하다니, 양 한 마리 값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한 드라크마로서는 잔치를 열 수 없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큰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은 온 우주보다 더 값지고 귀하기 때문입니다. 

5. 누가복음 15장을 깊이 읽어보면 또 다른 주인공을 발견합니다. 맏아들입니다. 
1-3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잃은 것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신 대상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신 것을 비난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매국노 취급하는 세리와 더러운 죄인들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어울리는 것은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고, 그들과 같이 먹고 마셨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하신 말씀이기에 세리와 죄인은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집 나가서 허랑방탕한 둘째 아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들이 돌아오면 잔치를 벌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을 싫어하였습니다. 바로 맏아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의 진정한 의도는 바로 맏아들에게 있습니다.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집안 일을 잘 하는 맏아들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맏아들이 진짜 길 잃은 아들입니다. 맏아들에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맏아들은 동생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동생을 자기 동생으로 생각지도 않습니다. 종이 “당신의 동생” 이라고 했고, 아버지도 “네 동생”(32절)이라고 했지만, 맏아들은 “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this son of yours 라고 번역했습니다. “당신의 이 아들” 이란 말입니다. ‘내 동생’ 이 아닙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30절을 보면, 동생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했다고는 했지만, 그 누구도 그 아들이 창녀들과 함께 놀아났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종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도, 친구도,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도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났는지, 사기를 당했는지, 도박하다가 돈을 다 날렸는지, 강도에게 돈을 빼앗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창녀들과 놀아났다고” 자기 동생을 혹평합니다. 이것은 비난의 수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불신자들을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그들을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에 지쳐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품에 돌아오고 싶어합니다. 그들도 크게 보면,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예비신자입니다. 예비신자는 우리의 동생입니다. 우리가 예비신자를 가슴에 품지 못하면, 우리는 맏아들이 됩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을 버리는 맏아들, 그가 바로 탕자입니다. 

또 다른 맏아들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불효자입니다. 아버지가 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도 맛있게 식사를 못하시는지, 아버지께서 왜 홀로 눈물을 훔치시는지, 아버지께서 왜 밤에도 대문을 잠그지 못하고 열어놓으시는지, 아버지께서 왜 따뜻한 이불을 덮고 주무시면서도 추워하시는지, 맏아들은 아버지의 고통, 아버지의 아픔, 아버지의 눈물에 무관심했습니다. 아니, 외면하며 살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맏아들은 동생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온 가족이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였지만, 그는 아버지의 기쁨을 짓밟아버렸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꺾어버렸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아버지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아버지의 슬픔이 무엇 때문인지 전혀 관심이 없이 자기에게 돌아올 몫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맏아들이 아닌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방황하는 사람에게 무관심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자신의 일에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복음성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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