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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13) : 갈릴리바다 (막 6:4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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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13) : 갈릴리바다 (막 6:45~52)


요즈음은 전 세계적으로 유난히 자연 재해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이티 지진에 이어 다시 터진 칠레의 지진으로 성경이 경고한 말세의 재앙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불안함이 온 세상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지진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이 한반도도 지진의 가능성에서 제외된 곳은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밤사이 안녕하십니까? 라는 인사가 실감나는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즈음 안녕하신가요? 오늘 여러분의 인생 항해는 순항입니까? 아니면 풍랑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풍랑으로 내가 타고 가는 인생의 배가 흔들릴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옳겠습니까? 우리는 이 레슨을 위해 이천년 전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경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 풍랑이 당황스러웠던 더 큰 원인은 그들이 주님의 명하심을 좇아 이 바다를 지나다 만난 풍랑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뱃새다로 가게 하시고”(45절) 그러므로 이 풍랑은 예수님의 명을 순종함으로 인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만난 고난이었던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신앙의 길에도 풍랑은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신앙 때문에 오히려 풍랑을 통과하고 계시거든 다시 한번 갈릴리로 가십시다. 

오늘 날의 갈릴리 바다(호수)는 예루살렘에서 70km 북쪽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바다는 이스라엘 온 국토에 물을 공급하는 젖줄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 바다의 근원은 헬몬 산으로 헬몬 산 남쪽 기슭 바니아스에서 발원한 지하수가 남으로 흘러 갈릴리 바다를 이어서 더 남으로 흘러 요단강을 만들고 이 요단강은 다시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바다(호수)는 사해이고 다음이 갈릴리 바다입니다. 이 바다는 예로부터 긴네렛 (긴네롯), 게네사렛, 디베랴 혹은 단순히 바다나 호수로 불리워지기도 했습니다. 이 갈릴리는 평상시 맑고 아름다운 바다이지만 자주 폭풍이 일어 풍랑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바다에 폭풍이 잦은 이유는 갈릴리 바다와 북쪽에 위치한 시리아와 국경을 만드는 골란 고원사이에 1,200km 정도의 급격한 표고차가 있어 북의 헬몬 산에서 부는 차가운 바람이 데워진 갈릴리 바다의 공기와 부딪쳤을 때 갑작스런 바람과 풍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때로는 2m가 넘는 파도를 동반하는 것이어서 갈릴리 어부들이나 이 바다를 건너는 여행객들에게 큰 위협이 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 바다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인생의 바다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풍랑을 묵상하는 영감의 근원이 되어 왔습니다.(렘브란트의 그림) 

*자 그러면 갈릴리 바다, 그 풍랑의 레슨은 무엇입니까? 

1. 주님은 풍랑중의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생각은 “내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혼자다”라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도 꼭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어째서 주님은 이런 시각에 이 바다를 건너게 하시고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풍랑과 더불어 싸우고 있는데 우리를 홀로 두고 계실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보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48절을 보십시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젓는 것을 보시고-” 여기서 보셨다는 말이 그냥 구경하고 계셨다는 말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제자들을 지켜보시며 기도하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자, 당신의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로 보내시고 예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다시 46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거기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들이 풍랑속에 허우적이며 벌리는 사투를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예수님의 제자들인 여러분과 제가 인생의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힘겹게 노를 젓고 있을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홀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보며 기도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바로 우리의 구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성도들은 예수님은 이천년 전 제자들과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었고 시간적으로 같은 때에 있었지만 그것이 이천년 후를 사는 우리에게 지금 여기에서도 가능한 말이냐고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롬8:34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 시니라” 그렇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살아계신 예수님, 그 분은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 우편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간구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인생의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괴롭게 노 저으며 생존의 처절한 싸움을 싸우는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보시고 그분이 기도하신다면 승산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피할 길입니다. 

2. 주님은 풍랑중의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우리가 풍랑 속에서 벌리는 사투를 지켜보시고 기도만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때가 찬 시각, 마침내 그는 우리 곁에 우리를 구하러 다가오십니다. 48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밤 사경쯤에 바다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예, 마침내 오셨습니다. 때는 밤 사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밤 사경의 시작은 새벽 3시에 해당됩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6시에서 시작하여 그 이튿날 새벽 6시까지 밤을 4등분합니다. 그래서 저녁 6시에서 9시가 제1경, 밤 9시에서 12시가 제2경, 밤12시에서 새벽 3시가 제3경, 새벽 3시에서 6시까지를 제4경이라고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시각이 아마도 3경이 끝나고 4경이 시작되는 밤의 절정 새벽 3시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밤이 끝나고 새벽이 시작되는 바로 그 결정적인 카이로스(kairos)의 시각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그 때 오셨느냐고 저에게 묻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분의 주권적인 결정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분은 우리의 힘이 다하고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못할 때 그래서 참으로 그분을 의지할 준비가 되어있을 때를 기다리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분은 그분의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가 오늘의 제자들을 버리시겠습니까? 그분의 약속을 다시 상기하십시다. 이천년 전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 가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은 깊은 근심에 잠겼습니다. 이제 누가 우리 곁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누가 우리와 더불어 동행하며, 누가 우리를 인생의 위기들 속에서 구할 것인가가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한13:36) 예수님의 대답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한14:1) 그는 다시 구체적인 약속을 하십니다. 

요한14:16-18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질적으로 동일하시지만 다른 분으로 함께 곁에 계실 분)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으리니”(16절) 17절에서 그분 예수님과 질적으로 동일한 그분의 또 다른 분신 그는 진리의 영 곧 성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우리와 함께 또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다음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승리입니다. 

3. 주님이 풍랑을 그치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51절을 보십시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 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언제 풍랑이 그쳤습니까?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는 순간,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제자들에게 계시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50절에 보면 그는 배에 오르시기 직전 아직도 자신을 몰라보고 유령 보듯 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여기서 ‘내니’라는 말은 희랍어에 "ego eimi"라는 말로 영어의 [I am]에 해당하는 말인데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그의 신성을 나타내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야, 하나님이야>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를 몰라보고 그를 우리의 절망속에 초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오시면 그가 일하시면 이 풍랑이 그칠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광기를 부리던 시절 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대인 외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모든 수인들이 절망속에 삶을 포기하고 있던 때에 그는 혼자 조용히 있을 때면 노래 한곡을 늘 읖조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마아민, Ani ma"amin>이라는 노래였습니다. <아니 마아민> “나는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 노래 가사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나는 믿네/메시아의 오심을 온전히 믿네/그의 오심이 더딜지라도/나는 날마다 그를 기다리네” 그는 이 노래를 부르며 매일 아침 그가 숨겨둔 유리 조각으로 피가 나도록 면도를 하며 새 날을 맞이했습니다. 수용소 간수들이 가스실로 보낼 사람들을 선택할 때마다 그들은 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이 친구를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대개 가스실로 보내지는 우선순위는 이미 삶을 포기해 버린 이들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스실 후보에서 제외될 때마다 그는 이 노래를 나지막하게 부릅니다. <나는 믿네, 아니 마아민!> (히브리어로 노래 듣기) 

Ani ma"amin b"emuna shelema
be"viat hamashiach, 
Vi"af al pi sheyit"mame"ha 
im koi zeh achakeh lo 
bechoi yom sheyavo 
(I belive with perfect faith in the coming of the Messiah 
and even though he may delay, I will await him everyday.) 

전쟁은 끝났고 그는 생존자가 되어 수용소를 나가 스페인에서 병원을 차리고 개업의가 됩니다. 해마다 그는 유월절이 되면 이 노래를 다시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후 그는 이 노래 가사를 조금씩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믿네/메시아의 오심을 온전히 믿네/그의 오심은 확실하지만 사람들이 성급하기만 하다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이 밤 4경을 맞이했다 해도, 우리를 삼키려는 파도가 아무리 높다 해도, 아무리 그 거센 풍랑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해도, 그분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보혜사 성령을 내 인생의 뱃전에 초대하시겠습니까? 그를 내 인생의 배에 함장으로 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 바람은 그칠 것입니다. 풍랑도 잔잔해 질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새로운 목적지로 나아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아니 마아민!>-<나는 믿는다!>고.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고. 나는 내 인생의 깊은 밤이 새벽을 준비하는 밤인 것을 믿는다고. 나는 곧 이 밤이 지나고 희망의 새벽이 밝아 올 것을 믿는다고.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부활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믿는다고. 그리고 우리를 죄와 허물의 과거에서 해방하시고자 죽으신 예수님이 또한 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다시 사신 것을 믿는다고. <아니 마아민!>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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