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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벧후 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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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벧후 3:1~13)

 
교회력으로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준으로 그 전 40일을 사순절로 보냅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 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사순절 기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는 여름철만 되면 수해가 나서 많은 피해를 입습니다. 수해를 겪게 되면 버리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흙탕물에 더러워진 가구나 옷을 물로 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홍수와 같은 재난이 닥치지 않아야 마땅하지만 그래도 물로 인한 피해를 입으면 다시 씻고 닦아서 쓸만한 것들을 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화재가 나면 불에 탄 것들은 거의 쓸모가 없이 다 버려집니다. 즉 하나도 건질 것이 없기 때문에 어쩌면 수해가 난 것 보다 화재가 난 것이 더 무섭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광석을 제련하는 경우 불을 통해서 불순물을 걸러내고 원하는 광물질을 얻어낼 수가 있습니다. 불을 통과하면 더 깨끗하고 더 좋고 화려한 보석도 구할 수가 있습니다. 물로는 아무리 씻어도 순수한 금이나 광물질을 얻을 수가 없지만 불로 제련하게 되면 아주 순수한 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면에서는 불이 물보다 더 무섭지만 아주 순도높은 금속을 얻기에는 물보다 불이 더 낫습니다. 

오늘 왜 목사님이 갑자기 물과 불에 대해서 설교에서 말씀하시는가 의아해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물과 불은 철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만물이 물로부터 나왔다거나, 불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후서 본문에서도 물과 불에 관한 말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서두에 물과 불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물과 불에 대하여 제가 말한 점들을 미리 생각해 본 다음에 오늘 본문에 접근하면 매우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물로 인한 홍수로 재난을 당하여도 다 잃어버리지는 않고 재활용할 수 있도록 물로 씻어 다시 씁니다. 그러나 불은 거의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물보다 불이 더 정결하고 순도가 높은 물질을 얻어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베드로후서를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 사도께서는 3장 1-2절에 베드로후서를 쓰는 목적을 말씀했습니다. 둘째 편지를 쓰는 목적은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곧 성경말씀을 기억하게 하려고 편지를 썼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성경을 기억할 때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말세에는 기롱하는 자들이 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 예수님의 말씀도, 또한 사도 바울의 말씀도 종말에 대하여 언제인가, 또 어떤 징조가 일어나는가 알기 전에 미혹케 하는 자들을 주의하라는 말과 교회 안에 흉악한 이리가 온다는 것을 먼저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롱하는 자들이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4절에 있습니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들은 성경에 있는 우리 주님의 재림을 부인합니다. 부인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정욕을 좇아 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비방하는 자들, 조롱하는 자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합니다. 혹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무슨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헛소리하는거야? 하늘과 땅이 언제나 그대로인데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는거야? 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종말론자들이 언제 어느 때에 온다고 한참 야단치더니만 그 날짜와 시간이 다 지나가도 아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기에 이제 아주 면역이 되어서 종말 이야기만 나오면 짜증이 나는 분도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 또한 재림을 부인하는 거짓 선생들과 동류가 되는 셈입니다.

그럼 사도 베드로께서는 어떻게 이들의 조롱에 대하여 답변을 하셨습니까? 이들은 전부 주님의 말씀 곧 성경의 약속을 조롱하였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도 약속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반박을 하였습니다. 

우선 5-9절까지는 주의 약속은 더딘 것이 아니다고 하시고, 10-13절에는 주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하며 주의 강림하심과 심판을 말합니다. 

5-7절을 보십시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조롱하는 자들이 뭐라 했습니까?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다고 반박합니다. 사실 언제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이야기하지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주 잊는 것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잊으려고 합니까?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잊으려 합니다.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을 잊으려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잊으려 합니다. 

여러분에게 창세기 전의 교재를 오후성찬교제 때 하면서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구약의 세계는 전부 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것도 가장 먼저 우리가 머리 속에 떠올려야 하는 것은 홍해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물로부터 나온 백성입니다. 또한 모세도 물에서 건진 자입니다. 이처럼 물에서 나온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은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늘은 어떻게 나왔습니까? 창세기 1:6-8절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물 가운데에서 궁창이 있게 되었습니다. 궁창을 중심으로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그냥 하나님의 전능하신 말씀이라 쉽게 들어가지 말고 언약의 말씀이라 보아야 합니다. 

땅은 어떻게 나왔습니까? 창세기 1:9-10절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니 뭍이 드러났습니다. 땅은 이처럼 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따라 물로부터 나왔습니다. 만일 하늘과 땅 안에 있는 것들이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떻게, 무엇으로 심판하시겠습니까? 그 하늘과 땅에 사는 것들이 물로부터 나온 것들 안에 사니까 당연히 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의 때에 홍수로 심판한 것입니다.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죄가 관영했기 때문에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창세기 7:10-12절입니다. “7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히니 노아 600세 되던 해 2월 곧 그 달 17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심판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었는가? ‘아니다!’고 베드로 사도는 반박하십니다. 

본문 베드로후서 3:6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와 같은 홍수심판 즉 물의 심판은 창조된 세계를 완전히 못쓰게 버리도록 하였겠는가? 하늘과 땅 안에 죄를 지은 자들은 모두 물로 쓸어버리셨고, 노아의 8가족은 보존하시고, 짐승의 한 쌍씩도 보존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보이신 무지개 언약으로 다시는 물로 심판하시지 않으시며 창조하신 동식물들을 보존하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물로 다시 씻어 처음 창조된 세상을 재활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하게 그대로 있게 하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7절입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언약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 끝은 불사름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을 뵙는 것 가운데 나타나 있었습니다. 번제단에 불을 통과하고 물두멍의 물을 통과해야 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뵈오려면 이처럼 물과 불을 통과하여 정결하게 됨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이렇게 오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시고 계시는가? 8-9절에서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니까 직접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여러분도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때가 없었습니까? 저는 그러한 때가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전역명령을 받고서 제대를 기다리는데 왜 그리 시간이 가지 않는지 정말 하루가 천년 같았습니다. 또 학창시절에 시험을 치는 시간은 왜 그리 빠르게 지나가는지 천년이 하루 같았습니다. 얼마 전의 영화에서는 천년을 넘는 사랑을 말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천년 전과 현재가 함께 하는 그런 포맷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시간의 초월성을 말하는 것 보다는 ‘오래 참으심’을 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이 하루 같이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인내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 이렇게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오래 참으심을 이용하여 범죄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이제 죽기 전에 하나님을 믿으면 되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창조할 때부터 그냥 있다’ 하는 자들은 자기의 정욕대로 행하기 위하여 이렇게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마냥 오랫동안 기다리기만 하시지는 않습니다. 주의 강림하시는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10절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때에 주의 날이 이를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곧 강림하심을 나타내는 성경언어입니다. 시내산에 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도 큰 소리로 임하셨습니다. 그가 임하시면 하늘과 땅 그 가운데 있는 체질을 뜨거운 불로 녹일 것입니다. 마치 하늘과 땅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쓸어버리셨던 것과 같이, 이제 마지막의 정결법은 불로 태우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2-15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사역자가 자기 한 일에 대하여 심판을 받습니다. 마치 불로 제련을 하는 것 같아서 재와 같이 다 타 버리고 남은 것이 없으면 아주 부끄러운 구원을 얻게 될 것이고 공력이 남아 있으면 광석을 제련하여 순수한 금을 얻는 것처럼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마지막 심판을 불로 이야기합니다. 

심판은 두려운 것만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심판을 통해서 의로운 자를 건지시고 악한 자를 형벌하시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새로운 나라와 시대를 여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옛 것을 정리하고 새 것으로 엽니다. 

물로는 온전히 씻을 수가 없습니다. 불로서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불순물이 걸러지고 불태워지고 찌꺼지와 오염된 물질은 다 녹아 없어져야 합니다. 오직 순수한 것만 남아야만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순도가 99.999%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세에 구원을 얻는 성도들도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습니다. 물로 씻김을 받는 것 정도가 아니라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은, 즉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깨끗이 사함을 얻은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들을 물로 심판하는 정결보다 이제 불로 마지막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결과가 이러하다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11-12절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물 세례를 받은 자의 거룩함이나 경건함이 아니라, 성령 세례를 받은 자의 거룩함과 경건함이 있어야 합니다. 짐승으로 제사함으로 영원히 씻지 못하는 구약 백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리신 희생제물로 영원히 깨끗함을 얻은 신약 백성으로 사는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의로움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의로움이 있어야 불타지 않습니다. 율법으로는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복음으로는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됩니다. 

열처녀 비유에서 나타난 것처럼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같이 주님 오시기를 사모하는 자여야 합니다.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여야 합니다. 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은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14절이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이 말씀은 실상 앞에서 베드로 사도께서 이미 말씀했습니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 약속을 주신 목적은 너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 즉 이 말씀은 우리를 주님의 날에 그 앞에 흠과 점이 없게 서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로 주의 날을 기다리는 자들은 모두 쓸모가 없이 다 불태워져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주님의 날에 순도 100%에 가깝게 그 앞에 불을 통해 제련이 되어 남아 있는 자들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감을 얻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열매들을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해야 합니다.’ 이같이 하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실 것입니다. 

12절 하반절과 13절입니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 세상 정욕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것입니다. 노아가 물의 홍수로 말미암아 맞이했던 그 새 세상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그 빛을 잃어버리고 그 권능들이 다 흔들리고 새 창조된 나라가 시작될 것입니다. 온 세상을 불로 정결케 하사 이제 죄와 어둠과 사망이 없는 영원한 의의 나라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은 주 앞에 점과 흠이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는 자들입니다. 진노의 얼굴로 주님을 대하는 날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할 수 없는 큰 분노 가운데 두려워 떠는 날이 아니라 기다리고 기다렸던 주님의 얼굴을 마주보는 영광의 날이요 큰 기쁨의 날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마지막 시대에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그저 예수만 믿으면 천당간다는 잘못된 가르침에 속아서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이, 믿음에 덕을 더하는 증진이나 발전이 없이 예수 공로만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헛된 거짓말에 속아서 사시겠습니까? 신의 성품에 참여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아무리 불로 태워도 더 아름다운 빛을 낼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성도 여러분에 늘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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