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버린 돌이 머릿돌로 (막 12:1~12)

  • 잡초 잡초
  • 270
  • 0

첨부 1


버린 돌이 머릿돌로 (막 12:1~12)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주인과 손님이 뒤바뀌었다는 뜻으로 입장이 서로 뒤바뀌거나 앞뒤의 차례가 뒤바뀐 경우에 쓰이는 말입니다. 물론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입장이 서로 바뀐다면 이건 참으로 곤란합니다. 집을 사글세를 놨다고 할 때 날짜에 맞춰서 사글세를 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그 집을 비워주어야만 합니다. 주인은 당연히 세를 든 사람에게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를 든 사람이 세는 내지도 않으면서 거꾸로 그냥은 못 나간다는 겁니다. 이사 비용을 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고 생떼를 씁니다. 

그럴 때 보면 정말 누가 주인이지 모르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몸에 손이라도 댔다간 이건 뭐 덤텅이를 뒤집어쓰기 꼭 알맞습니다. 재개발이라도 된다 싶으면 세입자들이 더 아우성입니다. 우린 그냥 못 나간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입주권을 주어야 한다고 우겨댑니다. 아주 막무가내입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딱한 사람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리만 골라 다니며 단물만 빨아먹으려고 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포도원을 세로 준 주인입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 땅에다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도 만들도 망대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농부들에게 세를 주었습니다.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과 계약을 했습니다. 주인이 세를 주었다는 말은 농부들이 포도원에서 농사를 지어 수확을 한 다음에 일정 부분을 세로 내기로 계약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약속한 대로 농부들은 세를 내야 합니다. 세를 내지 않는다면 그는 포도원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포도원에 있는 그 모든 것이 다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농사를 짓느라 수고한 공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 세를 받기로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셉이 애굽 백성들에게 곡식 종자를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농사를 지어라. 수확을 하거든 오분의 일은 나라에 세로 바치고 나머지 오분의 사는 종자로도 쓰고 너희 양식으로도 쓰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칠년 가뭄 동안 땅도 다 팔아먹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들의 몸까지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에 있어서 모든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농사지을 땅도 농사지을 종자도 다 나라 것입니다. 자기들의 신분조차 나라의 종입니다. 

그러니 자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종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수고하여도 거둔 것 그 어느 것 하나 자기 것이 없습니다. 다 주인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오분의 일만 나라에 바치고 오분의 사는 너희들이 다음 농사를 위한 종자로 쓰는 것 외에 나머지는 다 자기 양식으로 삼으라고 하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포도원의 농부들의 입장에서도 보면 그 신분이 고용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점은 없습니다. 포도원도 포도원의 포도나무도 심지어는 포도즙을 짤 즙틀까지 모두가 다 포도원 주인의 것입니다. 농부들은 단지 포도원을 가꾸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대신 주인에게는 일정분의 세를 내고 나머지는 농부들이 가지도록 계약을 했습니다. 당연히 추수가 끝난 후 정해진 세를 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농부들은 세를 내기를 거절했습니다. 

아니 세를 안 낸 것뿐 아니라 거꾸로 세를 받으러 온 종들은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냈기로 주인이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참 주인이 너그럽기도 합니다. 다른 종을 또 보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한 술 더 떠서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습니다. 그래 그의 사랑하는 상속자 외아들을 보냈는데 그들은 그 아들마저 죽이고는 그 포도원을 자기들이 차지하려고 했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거기서 더 참을 주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결국 포도원 주인이 와서 농부들을 다 잡아 죽이고 포도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된 사람들이 그럴까요? 결국 세를 내기로 하고 포도원을 가꾸는 농사꾼이 됐다면 당연히 추수한 뒤에 약정된 세를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게 세를 내기만 하면 그 포도원을 계속해서 가꾸면서 거기서 수입을 얻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욕심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그냥 털도 안 뽑고 통째 먹어치우려고 했습니다. 당연히 체하죠. 아니 종들이야 좀 괄시할 수도 있었겠다 싶지만 어떻게 그 상속자 된 외아들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차지할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그렇게 하면 포도원이 자기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거저먹겠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포도원의 모든 것을 맡기고 대신 세만 받겠다고 했는데 그 세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다면 처음부터 세를 내기로 하고 농사짓겠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감당할 만큼 되니 그 세를 내기로 한 것일 텐데 무슨 생각으로 세를 안 내고 이렇게 버티다가 마지막에는 살인까지 하느냔 말입니다. 그나마 주인이 여러 번에 걸쳐서 종들을 보낸 것을 보면 이 주인의 성품이 한 없이 너그러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바로 그 짝이 아닙니까? 결국 심은 그대로 거둔다고 그들 역시 진멸되고 말았고 포도원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물론 그 목숨을 잃었으니 포도원이야 누구 손에 있든 상관이 없겠습니다만 그 쓸데없는 욕심 때문에 그나마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행태가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들에게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포도원의 농부들에게 있어서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인이 그들에게 세를 받기로 하고 맡긴 것들입니다. 요셉 당시 애굽 백성들은 더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기들의 몸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다 바로의 것이었습니다.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은혜일뿐입니다.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주님 자신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어주심으로 값주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주님의 목숨으로 대신한 우리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내 생명이 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내 생명이 주님의 것이라면 내 몸 역시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 몸을 주님이 거하시기에 편하도록 가꿀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내 몸이랍시고 함부로 굴려서는 안 됩니다. 

내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이 나를 보시면서 기뻐하시도록 그렇게 내 몸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대로 건강하게 내 몸을 가꾸어야 하고 보는 사람들이 다 보기에 좋다고 하도록 그렇게 용모도 가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내 몸이 볼품이 없고 약하고 병들었다면 주님 앞에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어떤 경우에라도 무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적당히 휴식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또 체력 유지를 위해서 음식도 잘 섭취해야 합니다. 물론 지나치지 않아야 합니다. 건강을 위하여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다음으로는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위해서 시간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주님 앞에 예배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특히 하루의 첫 열매가 되는 새벽 시간과 한 주간의 십일조라 할 수 있는 주일을 성수하도록 하십시오. 그 시간은 어떤 경우에도 내 마음 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써야 되는 주님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건강을 차압당하게 되고 맙니다. 건강에 노란딱지가 붙게 됩니다. 그래도 그 시간을 주님을 위해서 지키지 못하면 그땐 빨간 딱지입니다. 한번 빨간 딱지가 붙으면 거의 회생불능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럼 물질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질을 풍부하게 주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쓰도록 위해서입니다. 요셉이 백성들에게 오분의 일을 바치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위하여 십분의 일을 드리고 구제하고 나눌 것이 있도록 위해서 또 다른 십일조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너 쓰고 싶은 대로 쓰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그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드리고 이웃을 위해서 구제하며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100배 60배 30배로 갚아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 번도 약속하신 것을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쌓았어도 내가 불어 버렸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보다 귀한 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 마음을 받으시기를 하나님이 더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정말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십시오. 마치 사랑하는 연인들이 어떻게 해서 상대방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십시오. 그래서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거둬들이고 우리를 회복시킬 뿐 아니라 우리가 만국 백성들 가운데서 영광과 찬송을 받도록 만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처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아보리라.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연 하루의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고 계십니까? 주일을 성수하십니까?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기뻐하십니까? 주님 앞에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십니까? 기억하세요. 심지 않고서는 거둘 수가 없습니다. 정말 복 받기를 원하신다면 복 받도록 섬기십시오. 세상에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그럼 새벽을 깨우고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사람은 힘들지 않은가 하면 아닙니다. 그들도 힘이 듭니다. 그런데 그들을 돕는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몸을 어루만져 주셔서 힘든데 가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피곤한 것 같았는데 새 힘이 넘칩니다. 약한 데서 강함을 누리게 하십니다. 불편한 곳에서 감사가 넘치게 하십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하게 하십니다. 무엇을 하든 내 삶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주님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내 삶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 뜻을 따라서 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며 우리가 수고하여 얻은 모든 것을 귀한 상급과 함께 우리들에게 돌려주십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드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소속을 분명히 알도록 하기 위함이요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이 모든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결코 우리를 힘들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우리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도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의 주인이 내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항상 기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한 마리의 참새가 솔개에게 잡혔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참새는 눈물을 흘리며 애걸하였습니다.
“솔개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생각해 보세요. 나같이 작은 것을 먹어 보았자 솔개님의 배가 부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좀 더 큰 것을 잡아서 잡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느긋한 솔개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습니다.

“참새, 네 말이 옳다. 그러나 참새야, 너는 어떻게 하겠니? 손에든 떡을 버리고 보이지도 않는 것을 찾아 헤매겠느냔 말이다. 그런 말은 얼간이들이나 곧이듣는 말이지. 나한테는 통하질 않아!”
이 글은 이솝우화 중의 하나인데, 우리는 솔개의 태도에서 배워야 할 엄청난 교훈을 잊으면 안 됩니다. 자기 손에 쥐고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작은 손으로 너무도 큰 것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손에 쥐었던 작은 것마저도 잃어버리는 적이 허다합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이나 할 일은 너무도 보잘 것이 없다고 단정하여 더 좋고 큰일에만 눈을 돌립니다. 그것은 마치 작은 참새라고 해서 놓아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작은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혹자는 기독교를 ‘좁쌀영감 종교’라고 말합니다. 대범하지 못하다는 평가인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것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 웃음거리가 된 적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덩치 큰 사자나 호랑이에게 물려죽은 사람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들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작은 부속을 귀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그 부속들을 결합한 큰 기계를 귀중히 여길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참새의 눈물에 마음이 흔들려서는 모두를 잃은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그 참새의 눈물에 마음이 흔들리는 자가 우리 자신은 아닙니까?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막무가내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시간을 드리면 건강을 보너스로 주십니다. 물질을 드리면 모든 필요한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주십니다. 매사에 순종하면 뚫어진 전대가 아무 것도 없도록 만들어주셔서 항상 평안하고 즐겁고 형통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어리석은 농부의 마음을 버리십시오. 주님의 시간을 주님의 시간으로 인정하십시오. 주님의 물질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십시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모든 시간과 모든 것을 더 복되고 아름답게 빚어 가시는 귀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몇 년 동안이나 자신의 넓은 잔디밭의 풀을 손수 다 깎느라고 힘들었던 한 사람이 어느 날 성능이 좋은 풀 베는 기계를 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기계를 운반해 온 사람은 그에게 기계를 어떻게 조작하는지와 이미 그 기계에 가스와 기름을 채워 놓았음을 일러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기계를 운반해 온 사람이 떠나자마자 곧 자리에서 일어나 기계를 조작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엔진이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점검해 보았으나 기계는 여전히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마침 그때 이웃 사람이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의 일을 이야기해 주자 그 이웃 사람은 기계를 살펴본 후 시동키를 누르자 그 즉시로 부르릉 하고 소리를 내면서 엔진이 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시동 버튼도 누르지 않은 채 기계를 작동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성령님은 그 기계의 시동 버튼과 같습니다. 그 기계는 시동 버튼을 눌러야 작동되듯이 우리 역시 성공적인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권능을 힘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과 육신의 소욕, 그리고 마귀를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 시동키를 누르는 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이야말로 나의 삶이 주인이 내가 아닌 주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건축자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귀한 역사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존귀하게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잘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일에 있어 실패를 합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차기 많다고 해도 면허가 없는 사람에게 차 키를 내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면허란 차를 운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국가가 발행한 자격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새벽 시간을 드리며 주일을 성수하라고 하시며 물질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바치라고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준비해 놓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겨도 좋은지를 테스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더 이상 꾀를 부리는 자가 아닌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아닌 철저히 주님과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힘들고 피곤하고 약하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건강의 복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나 혼자 쓰기에도 부족하다고 하며 주님과 이웃을 위해 드리지 않는다면 그건 세를 내지 않으려고 주인이 보낸 아들마저 죽여 버렸다가 자기 목숨을 잃은 어리석은 농부와도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입니다. 건축자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라 해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머릿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 자신이 그렇게 핍박을 받고 버려졌지만 그분은 생명의 구주로 온 우주 만물의 주관자로 우뚝 서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 또한 머릿돌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이제 나의 모든 시간을 주님의 시간으로 만드시고 나의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머릿돌이 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