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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 (마 10: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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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 (마 10:34~39)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파송 교훈을 주셨는데, 1)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고 2)가면서 전파하라고 하셨으며 3)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고 4)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으며 5)어느 집에 가서든지 평안을 빌라고 하셨고 6)복음 전도자들을 환대하는 가정은 평안이 있을 것이라 하셨으며 7)끝까지 복음을 거부하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고 8)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으며 

9)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셨고 10)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때에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11)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받을 것이라 하셨고, 12)스승이요 상전과도 같은 주님이 핍박을 당하셨으니 제자들도 박해를 받을 것은 당연하다고 하셨으며,  13)그러나 어떤 박해자들도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고 14)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으며 

15)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들은 2천 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신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제자 파송 교훈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예수님 때문에 세상과 가정에 불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4-36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메시아를 가리켜 ‘평강의 왕’이라고 했고, 또한 그가 화평을 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치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화평 대신에, 불화와 반목을 일으키기 위한 것처럼 오해할 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가정과 온 세상이 화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과 복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불화와 분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불화와 분쟁이 일어난다는 말은, 주님이 분쟁을 일으킨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신앙과 불신앙으로 나누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한 민족과 다른 민족 사이에 불화와 분쟁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지금도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분쟁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한 가족 안에서까지도 불화가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정을 분열시키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인간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일로 원수지간이 되는 것입니다. 국가와 민족 간의 분쟁, 지역과 계층 간의 분쟁, 노사 분규, 여야 정당의 싸움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가족들끼리의 불화는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화만사성’이라고 했는데,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사는 식구들끼리의 불화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는 다른데 있지 않고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정은 가족 구성원을 위하여 서로가 희생하며 위안을 주고 삶의 활력을 얻게 하는 너무나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가 서로 불화하며 원수로 여기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복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일은 항상 일어났습니다. 혹자는 이를 오해하여 기독교는 반인륜적이어서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가정의 불화가 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고자 할 때, 불신 가족들과의 갈등과 분쟁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일시적인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생명의 주 예수님과 영원한 진리인 복음을 버리고 신앙을 포기하거나 양보하면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자신의 영혼도 잃게 되고, 소중한 가족의 영혼도 결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에서도 불신 가족들의 핍박이 얼마나 심했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가정에서 내쫓기도 하고, 족보에서 빼어버리는가 하면, 어떤 불신 남편은 아내의 생손톱을 펜치로 뽑아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서운 핍박을 이겨 낸 성도들은 자신도 살고 불신 가족도 구원할 수 있었지만, 일시적인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신앙을 포기해버린 사람들은, 자신도 죽고 가족도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적인 문제가 아닌 모든 일에는 가족들과의 화평을 힘써 도모해야 하지만, 영생이냐 멸망이냐 하는 문제가 달린 신앙 문제만큼은 절대로 포기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부모나 자녀를 더 사랑한 자는 주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합당하지 아니하고’란 말씀의 원래의 의미는 ‘그는 나에게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이 37절과 38절에서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어 매우 강조하고 있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합당하지 아니하다고 하신 사람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자신의 가족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들은 예수님께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4:26절에서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사랑의 최우선 순위에 두지 않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요 17: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관계도 예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선택하여야 할 일이 예수님이냐 부모님이냐 할 때에, 부모의 뜻이 아무리 간절해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결단을 하여야만 합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선택하여야 할 일이 자녀냐 그리스도냐 할 때에, 자녀의 소원이 아무리 간곡해도 그것을 외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보다도 부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죽은 로마의 사형수여! 그대가 내 품에서 심장을 도려내듯 외동딸을 빼앗아 가는구나! 그대는 죽은 사람인가? 산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생명의 약탈자여! 사랑의 약탈자여!” 이 말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너무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무리 붙잡아도 기어이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떠나는 외동딸을 보내는 프랑스의 한 노시인의 절규입니다. 저는 새벽 기도할 때마다 “주님,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제게도 아내에게도 없게 해주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부모님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합니까? 여러분은 자녀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합니까?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인이, 다섯 살과 세 살 된 아들을 키우기 위해 철길 가에 있는 신발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기 때문에, 안고 업고 출근하여 공장 안의 조그만 방에서 놀게 하고 부인은 일을 했습니다. 따뜻한 어느 봄날, 방안이 답답하다고 두 아이들이 엄마 몰래 철길로 나갔습니다. 철길에서 조약돌 치기도 하고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하면서 놀고 있을 때 기차가 달려들었습니다. 

누군가가 애들이 없다는 소리에 엄마가 뛰어나가 보니 철길에서 놀고 있고 있었습니다. 쏜살같이 달려가 두 아들을 철길 밖으로 던져 낸 순간, 기차가 뛰어들어서 엄마를 치고 지나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두 형제는 고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어른이 된 후 어머니의 무덤에 조그마한 묘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이 새겨 놓았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일당 몇 만원을 받으며 일했던 그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굶고 아이들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었던 그것이 아닙니다. 그 기찻길에서 놀고 있던 두 아이의 생명을 건져내고 자신의 생명을 버렸던 그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정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 작사자 하버갈은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 주느냐”라고 노래했습니다. 왜 우리가 부모보다 자녀보다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몸버려 피 흘려 나를 구원해 주셨고, 지금도 나를 끔찍이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는 자도 주님께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38절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처형할 장소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메고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일은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생이나 수치나 박해를 끝까지 참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토마스 세퍼드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예수만이 십자가를 져야 하고/모든 세상 사람들은 거저 가야 하는가?/그렇지 않다./모든 사람을 위한 십자가는 있다./나를 위한 십자가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의 무거운 짐을 다 지셨기 때문에, 내가 져야할 십자가의 짐이 없다, 우리는 이를 믿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자기 십자가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잘못 생각하기를 고난당하는 모든 것을 십자가인줄로 압니다. 그러나 고난이 모두 십자가는 아닙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자기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십자가일 수 없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물질적인 고통이나, 병들어 고생을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순종하지 않는 자기의 자식이 십자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십자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갑니다.♪라는 찬송은, 영국의 헨리 프란시스 라이트(Henry Francis Lyte) 목사가 지은 찬송가입니다. 라이트 목사님은 일찍이 부모님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며, 폐병과 천식으로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그의 목회지인 바닷가의 억센 어부들을 상대로 전도 사업을 하다가 임종 시에 ‘평화와 기쁨’ 이란 말을 하고 죽었습니다. 라이트 목사님은 가난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어도 고백하기를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 복을 받겠네. 주도 곤욕 당했으니 나도 곤욕 당하리. 내가 핍박당할 때 주의 품에 안기고 세상고초 당할수록 많은 위로 받겠네. 주가 주신 기쁨 외에 기뻐할 것 무어냐. 주가 나를 사랑하니 기뻐할 것뿐일세.♪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부러운 신앙입니다. 본받아야 할 신앙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교회를 수십 년씩 다녔어도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서, 세상 사람들의 핍박이 두려워서, 수십 년씩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하면서도 주일성수 하나 제대로 못하고, 자식 결혼식도 주일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것처럼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 밖에 부인을 안했지만, 오늘의 우리들은 얼마나 많이 예수를 부인하고, 저버리고, 배반하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 때문에 애매히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면서 주님 때문에 공연히 시비에 휘말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 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직장에서 까다로운 주인이나 상사를 만나서 괴로움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까다로운 주인이라 하여도 양심에 꺼리는 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직장상사가 세금을 포탈할 목적으로 이중장부를 만들도록 요구할 때,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도저히 따를 수 없어 불이익을 당하고 직장에서 쫓겨난다고 하면 이것을 십자가로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이러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급이 큼이라.” 

4.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이라고 하셨습니다. 

39절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막 8:35에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안에 담긴 최대의 역설적인 진리의 말씀입니다. 죽음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 이처럼 역설적인 사실도 없습니다. 인간의 목숨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목숨을 귀하게 여기고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도리어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고,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으면 산다’는 것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닐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의 근원이시요 또한 그를 믿는 자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있음을 알기에 주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써 생명을 얻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잃어버리게 될지라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보다 더 역설적인 진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 치하에서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며, 7년간의 옥고를 겪다가 1944년 4월 21일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였습니다. 한때 일본 경찰이 그를 회유하려 가출옥시킨 때, 그는 자기가 시무하던 산정현 교회에서 최후의 유언과 같은 이러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님, 80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의 병든 아내를 주님께 부탁하고, 나의 어린 자식들과 나의 사랑하는 양떼를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산정현의 이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피 발자취를 따라 가려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을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맙시다. 풀과 같고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결단코 하나님 외에 무릎 꿇고 절할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 보다 차라리 죽어 없어져 주님 향한 정절을 깨끗이 지키려 합니다. 주님 따르는 죽음은 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 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마침내 주기철 목사님은 주님 때문에 순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목숨을 잃은 주기철 목사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제자 파송 교훈을 상고해보았습니다만, 오늘의 말씀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제자도 중에서 가정 따르기 어려운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다 가정의 불화가 있을지라도 포기하지 말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거나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러나 여러분, ‘생즉사 사즉생’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이 진리를 굳게 붙잡았던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고,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처럼 주님의 제자도를 따르며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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