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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삼상 4: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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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삼상 4:1~6:21) 
 
 
본문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의 빼앗김과 법궤로 인한 재앙과 법궤의 돌아옴을 기록합니다. 법궤 이야기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키는 경외심 없는 자는 누구라도 그분 앞에 설 수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블레셋” 족속(the Philistines)은 함의 손자 가슬루힘의 후손으로 그랄의 아비멜렉이 블레셋 왕이었습니다(창 10:14; 21:32).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무렵에는 가나안 남쪽 지중해 연안에 정착해 있었는데(출 13:17; 23:31), 에게(Aege) 문명의 중심지였던 크레타섬(Crete) 출신이라 갑돌 사람(the Caphtorites) 혹은 그렛 족속(Kerethite people)으로도 불립니다(암 9:7; 겔 25:16; 습 2:5). 주후 135년 이후 로마 식민지 시대에 블레셋의 이름을 따서 유대 지역을 팔레스틴이라 부르게 되었지요. 다섯 도시 국가들의 협의체인 블레셋은 헷 족속(the Hittites)으로부터 철 제련법을 배우고 철제 무기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에게는 큰 위협세력이었습니다.

언제 침략 당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군사력은 미약할지라도 신앙이 분명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필요들을 채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신앙은 미신적으로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천 명 가량”이 죽었을 때, “이스라엘 장로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고 합니다(4:2-3). 언약궤 ‘그것’ 자체가 구원의 효력을 가진 것처럼 생각했지요. 거룩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인격적으로 간구하는 자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장로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언약궤 그것을 마술 상자처럼 믿었습니다. 언약궤가 진에 들어 올 때에 “온 이스라엘”은 땅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환호함으로써 그들도 장로들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5). 한 동안은 사기도 오르고 블레셋 군사들을 “두려워”하게도 만들었지요(7).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패배하여 “삼만”명이 죽었고,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습니다(10-11). 이 소식을 들은 대제사장 엘리도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18).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앙적 타락을 철저하게 심판하신 것이지요. 잘못된 신앙은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물건으로 대치하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종교적 상징물이든 웅장한 건물이든 다양한 프로그램이든 그것 자체가 신적인 은혜를 받게 한다고 생각한다면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신앙이 심각하게 타락했다는 증상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멸하는 행동이지요.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사무엘을 통해 이미 “온 이스라엘에 전파”(4:1)되고 있던 말씀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국은 큰 재앙이었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영광이 … 떠났다”는 의미의 이가봇을 외치며 죽었습니다(21-22).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거룩함이 침해당할 때 당신님의 백성일지라도 반드시 대적하십니다.

블레셋은 빼앗은 언약궤를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당에 두었습니다(5:1-2). 다곤은 왕관을 쓰고 수염이 난 남자 인어형상으로 해양 민족의 특성이 반영된 신상입니다. 우가릿 문헌(Ugaritic Texts)에는 가나안 농경신인 바알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지요. 아마 그들은 언약궤를 다곤에게 바치는 전리품으로 취급했거나, 다곤을 보조하는 신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습니다(3). 다시 일으켜 세워두었는데, 그 다음날은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습니다(4).

“엎드러”졌다는 말은 4장 10절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굴복 당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졌으니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완전한 패배지요. 만일 원하셨다면 언약궤를 빼앗기지 않게 하실 수 있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동시에 블레셋 사람들에게도 그분의 거룩하심을 드러낼 기회를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블레셋은 도무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넘어져도 스스로는 일어날 수 없는, 도리어 사람이 일으켜 세워줘야만 하는 무능한 존재를 계속 신으로 받들었지요. 심지어 끊어진 다곤의 손이 닿은 문지방을 오히려 신성하게 여겨 밟지도 않았습니다. 우상숭배자의 전형적인 어리석음이 드러납니다.

신상 자체는 사람이 만들지만 그 신상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우상숭배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언약궤 자체에 신성이 깃들여 있는 것처럼 생각한 이스라엘도 우상숭배자와 같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본문은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지킬 수 없는 다곤 우상과 사람의 도움이 전혀 없을지라도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신성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어떤 사람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말도 사람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원래 없었던 영광을 추가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의 본래적 영광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곤의 신당으로 옮겨졌을 때는 마치 여호와께서 다곤의 포로가 된 것 같았고, 제물이 된 것 같았습니다. 당신님의 백성들의 믿음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자들에게 수치를 당하신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다곤을 포로와 제물로 삼아 친히 그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우상과는 절대적으로 구별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치 않는 아스돗 사람에게 “여호와의 손”을 엄중히 더하셔서 독종 재앙으로 치셨습니다(6). 6장 4절에서 블레셋 방백들이 속건 제물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취한 것을 보면 이 독종은 쥐에 의해 무섭게 전염되는 재앙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다곤 신상이 넘어지고 부서졌을 때 우연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재앙을 겪으면서 망하게 되고서야 비로소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7)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재앙을 만나 하나님의 손이 치신 것을 인식하게 되면 ‘회개’의 태도를 보입니다. 하지만 아스돗 사람들은 회개의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재앙을 모면할 방법만 찾습니다. 회개 없이 오직 당면한 재앙을 모면하려는 모습도 우상 숭배자들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 하면서도 회개는 뒷전이고 재앙만 모면하려는 자세를 가졌다면 그 신앙은 이교도처럼 변질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 궁리한 후에 블레셋 5대 도시 중의 하나인 “가드”로도 옮겨보고 “에그론”으로도 옮겨봤습니다. 그때마다 여호와의 손은 “심히 큰 환난”을 더하시고,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케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8-12). 인간의 얕은꾀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일곱 달이 지난 후에(6:1), 블레셋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고 했습니다(2). 정치적인 방법으로 되지 않으니까 종교적인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성경은 길흉을 말하는 복술자들이 하나님을 몹시도 진노케 하는 존재임을 가르칩니다(신 18:14).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블레셋은 진노에 진노를 더하지요. 그들이 언약궤를 돌려보려는 목적도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병도 낫고” 병이 떠나지 않는 “연고”도 알기 위함입니다(3). 하나님께서 생명 자체를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아주 멸절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 같이”하다가 망하지 않기 위하여 나름대로 재앙의 양상을 본 딴 속건제를 준비해서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며 새 수레를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암소 둘에 메웠습니다(4-8).

그들은 회개 대신 마지막까지 재앙이 “우연히 만난 것”인지를 확인하려 합니다(9). 젖 먹이를 뒤에 둔 암소가 새끼 생각에 울면서도 돌이키지 않고 목적지로 가는 것은 동물의 본성을 막는 강권적인 힘이 작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요(11-12). 끝까지 우연이기를 바랐을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여호와께서는 당신님께서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오며 모든 것을 확인했던 블레셋 방백들은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습니다(12, 16). 이와 함께 그들의 신 다곤에게로 돌아갔지요. 회개 없이 우연이기를 바라는 우상 숭배자들은 결코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본 벧세메스 사람들은 “기뻐”하며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렸습니다(13-15). 이들만큼은 경외심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상 소의 번제를 드릴 때는 암소가 아니라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리도록 율법이 명하고 있습니다(레 1:3). 그들의 경외심 없음은 율법이 금지하고 있는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행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민 4:20).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의 대상이 아닌 호기심의 대상으로 대했습니다. 상징물이라고 해서 가벼운 구경거리로 취급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말씀을 만홀히 여겨 당신님의 거룩함을 범한 벧세메스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하셨습니다(19).

벧세메스는 아론의 자손들에게 배당된 제사장 성읍(수 21:13-16)이므로 이들은 레위인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삿 17-20장)에 그 시대 레위인들의 부패상이 적나라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한 순간 호기심 때문에 심판 받았다기 보다는 평상시 경외심 없음이 이 순간에 드러난 것이지요.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20)라고 한탄하며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지요(21).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큰 복이지만 경외심이 없으면 누구라도 그분 앞에 설 수 없고 함께 하심이 오히려 재앙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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