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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철] 예수님의 침묵을 배우라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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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침묵을 배우라 (요 8:1~11)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8-9)

어떻게 보면 사순절은 절제와 함께 ‘침묵의 절기’이기도합니다.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의 글 가운데 침묵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그 분은 시끄럽고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만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심령의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침묵의 친구이시다. 자연, 곧 나무들과 꽃들과 풀들이 고요함 속에서 어떻게 자라는지를 보라. 해와 달과 별들이 고요 속에서 어떻게 운행하는지 보라..... 우리 영혼을 울리려면 침묵이 필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침묵은 우리를 하나님의 창조에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침묵은 활동보다 훨씬 더 창조적입니다. 침묵 속에서 인간은 향상합니다. 침묵 속에 꿈이 있고 치유와 안정과 숙고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침묵 속에서 용서가 만들어지고 침묵 속에 베풀어야 할 이웃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침묵은 부정적 번민이나 고민이 아닙니다. 때로는 침묵이 우리에게 번민 고민의 아픔을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치유와 희망을 만들어내는 빛이 함께 합니다. 그러기에 침묵 속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키엘케골은 현대인들에게 ‘침묵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있어 침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순절 우리는 침묵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침묵 속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생애가운데 예수님은 침묵과 함께 기도의 시간을 가지셨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 주님은 침묵하시는 특별한 모습들을 보이시기도 했습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특이한 침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밤을 지내신 후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과 합세한 무리들과 함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여인을 치려는 돌들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인을 욕하며 떠들며 소란을 떨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돌로 치라 하시면 사랑을 외치신 분께서 살인을 부추키는 것이 됩니다. 치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이들의 질문에 대하여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새번역 요8:6) 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시고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침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어떤 침묵이었습니까?

󰓍 예수님의 침묵은 소음을 끄는 침묵이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든 세상이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자신들의 삶의 방편으로 삼고 그 것을 무기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방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항상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틀린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까지도 잘못된 자로 몰아가기 위해 시험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꼼짝 할 수 없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함께 행동한 무리들은 구경하다가 쉽게 선동되고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사람들입니다. 선동되어 행동하고는 행동한 뒤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주관이나 자기 원칙이 없습니다. 여인을 향하여 깊은 생각과 판단 없이 선동에 따라 흥분하여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입니다. 
  
여인을 앞에 두고, ‘돌로 칠까요, 말까요?’ 다그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무리들을 향해, 예수님은 고조된 감정과 격양된 분노와 편견과 증오적인 술수와 술책의 소음을 가라앉히도록 몸을 굽혀 땅에 글씨를 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혼란과 소란의 소음, 술수의 썩은 냄새나는 소리들, 이런 소리를 꺼 잠재우는 침묵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이런 소음가운데서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내면에 이런 소음의 소리들을 꺼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침묵이 필요합니다. 
  
침묵과 소음은 팽팽한 대결을 벌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승자는 침묵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소음을 이기는 침묵입니다. 이런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 사순절이 되어야 합니다.
     
󰓎 예수님의 침묵은 질문의 언어입니다.
  
소음이 꺼지자 다그쳐 묻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일어나셔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새번역)

다시 몸을 굽히시고 글씨를 쓰시면서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그들의 양심으로 하여금 질문하게 하셨습니다. 양심의 질문을 듣고 가책을 받은 무리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젊은이들까지 모두 흩어져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질문의 언어입니다. 내면 깊은 곳 양심을 찌르는 질문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침묵해야 바른 질문의 언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언어는 나를 깨뜨리는 언어이고 생각하게하고 깨닫게 하는 언어입니다. 우리를 본질로 돌아가게 하는 언어이며, 치유하기도 하고 때로는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언어입니다.
  
이용도 목사님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만주에서 잡회를 인도할 때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설교를 듣고자 했습니다. 마침내 이용도 목사님이 설교하기 위해 등단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입을 열지 않고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1,2 분이 아니라 한 시간이 넘도록 말 한마디 없었고 대신 목사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설교를 기다리는 회중들 가운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슴을 찢고 울부짖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침묵의 언어입니다. 사람들의 내면을 깨드리는 질문의 언어, 곧 영혼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사순절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 질문하는 침묵의 언어를 가집시다. 이런 침묵이 있기를 바랍니다. 

  󰓏 예수님의 침묵은 새로운 시작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보면 간음이란 돌로 쳐서 죽이라고 까지 할 정도로 엄격하게 금했습니다. 그럼에도 간음했다는 것은 이 여인이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인의 걸어온 삶의 과정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몸을 팔았다는 것은 절망적 환경의 인생을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죽지 못해 살아야 했기에 마지막 가지고 있는 몸마저 팔아야 하는 창녀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자신의 인생의 희망을 모두 다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인은 인생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대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자기의 가치를 잃어버렸고 이웃과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할 뿐이었습니다.
  
무리들이 떠난 후에 예수님은 몸을 일으키셔서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주님, 한사람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이상의 말씀은 새번역) 
  
여인은 새로움 삶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용서받은 인생으로 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인생을 가치 있고 고귀한 것으로 삼고 희망차게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새로운 시작을 만드시는 침묵이었습니다. 사순절 우리는, 우리에게 새롭게 또 다시 시작하게 하는 침묵을 가져야 합니다.

  󰓐 예수님의 침묵은 하나님 뜻 안에 분명하게 있도록 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무엇을 쓰셨는지 그 내용이 궁금하지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분명히 아버지 하나님의 뜻 안에 계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 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뜻 안에 계시면서 기도하고 계시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안에 계시고자 하실 때, 또는 하나님의 뜻 안에 계실 때에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전 심문 받으실 때에, 대제사장이나 빌라도 총독과 헤롯왕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말하였다.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데도,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그러나 예수께서는 잠자코 계셨다.”
(마26:62-63상) 
  
“그 때에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예수께서 한 마디도, 단 한 가지 고발에도 
대답하지 않으시니, 총독은 매우 이상히 여겼다.”(마27:14)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하였고, 또 그는 예수가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 여러 말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눅23:8-9)

예수님은 왜 자신에 대하여 고발자들의 증언은 모두 거짓말이고 억지이며, 그리고 자신은 정말 억울하다고 변증하거나 변론하지 않았습니까? 인류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이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안에 분명하게 계시고자 침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무엇인가를 쓰시면서 하나님의 뜻 안에 계시기를 원했고, 그 뜻 안에 분명하게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새번역)고 말씀 하셨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고 하신 것입니다.
  
침묵은 우리로 하나님의 뜻 안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보고 깨닫는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변화되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분명이 있도록 하는 침묵을 찾으십시오.
  
사순절은 침묵의 절기입니다. 침묵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주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침묵 속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 주님을 만납시다.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하는 사람은 잘 듣지 못합니다. 입을 벌리면 귀가 막힙니다. 입을 막고 귀를 열어 세밀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침묵의 삶을 가꿈으로 조용하게 다가오셔서 은밀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느니라.” (시편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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