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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을 통하여 (출 35:20~27, 36:3~7) - 성전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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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할 줄 아는 사람을 통하여 (출 35:20~27, 36:3~7)


I. 성전건축의 당위성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 가운데 마지막 때가 되면 기쁜 일이 있어도 춤출 줄 모르고 슬픈 일이 있어도 울 줄 모르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동할 줄 모르는 세대,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의 비극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재물을 얻은 록펠러라는 재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많은 복을 주셨는데 어떻게 갚을까? 고민하는 가운데 많은 선한 일들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 중에 뉴욕 중심지에 Reverside Church 건축을 계획합니다. 요즘 강남 어느 교회를 너무 크게 너무 고급스럽게 짓는 것 아니냐? 하듯 당시에도 비판여론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수 십년이 지난 요즘 봐도 아름답고 화려한 예배당입니다. 뉴욕의 명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이는 건물이 진정한 교회가 아닌데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큰 예배당을 지어야 하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록펠러는 대답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입은 옷이 비록 아버지 몸은 아니지만 나의 귀한 아버지의 몸을 담는 옷을 잘 지어 드리고 싶은 것이 내 마음입니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 왕이 있다면 다윗 왕 일 것입니다. 웅장한 성전을 지어서 봉헌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전쟁을 많이 치러 손에 피를 너무 많이 묻혔다는 것입니다. 아들 솔로몬을 통해 짓도록 말씀하십니다. 이때 다윗은 모든 건축 비용을 친히 준비해 두어서 아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 마음을 너무 귀하게 여겨주시고 강복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8-11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함께 하겠다. 
네가 사는 날 동안에 모든 대적을 내가 친히 물리쳐 주겠다. 
이 땅에서 네 이름을 존귀히 여겨 주겠다. 
네 자손을 통하여 견고한 왕권, 나아가 메시야를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옛날엔 예배당을 지나치게 성소화 해서 신학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요즘은 예배당 건축의 복을 너무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 당시 건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경제 사정도 어려운데 왜 성전을 지어야 하느냐는 여론들이었습니다. 

이때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1장 6절-9절 가운데 백성들의 악한 마음을 주님이 나무라십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을 것이다. 먹어도 살로 가지 않을 것이다. 재물을 모아도 구멍 뚫린 자루에 쌓는 겪이 될 것이다. 너희들이 아무리 모으고 모아도 내가 불어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하나님의 전을 가볍게 여겼기에 내가 너희를 가볍게 여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말씀을 하십니다. 

II. 성소 발견사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온 우주에 계십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특별한 장소를 선택하시고 그곳에서 인간을 만나주시고, 친히 말씀하시고, 교제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온 우주에 계십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 임재하셔서 거기서 아담과 하와를 만나십니다. 에덴동산은 최초의 성소라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에 어떤 벌을 받게 됩니까? 이곳 ‘성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여행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만나는 장소로 성막을 지정하셨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짐이 얼마나 짐스러운지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막을 조각조각 분리해서 꼭 모시고 다니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이 머물 땐 성막을 먼저 다시 조립합니다. 바로 이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만나시고, 성막 안에 친히 임재하시고, 친히 그곳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가 세워지고 왕국이 세워지자 솔로몬은 성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거기서 제사를 지내고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백성들은 이 성소를 통하여 교제하셨습니다. 

성소가 갖는 몇 가지 동일한 용도가 있었습니다. 

① 죄인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곳이 성소였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이 땅을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는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② 성소는 하나님께서 죄인과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면 사람은 죽지요. 그러나 이곳 성소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과 함께 하십니다. 이곳에서 죄인을 만나주셨고 죄인을 받아 주십니다. 

③ 하나님이 죄인에게 말씀하시는 곳이 성소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성소에서 말을 하면 그것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면 그것이 설교가 되고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께서 인간의 제물을 받으시고 용서하시는 곳이 성소였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데 예물이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처럼 큰 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과 예물이 거절되면 곧 저주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예물을 거절하셨습니다. 예물이 거절당할 때에 가인과 자손들이 거절당했습니다. 아벨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될 때에 아벨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성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구약에서의 건물이 중심인 성소가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완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옛 어른들은 이곳을 예배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들이 어릴적 자라던 교회당에 가면 ○○○예배당, 우리 한소망교회 입구에는 한소망예배당 그렇게 써 놓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보다 옛 어른들이 교회론이 더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이곳은 성전이 아닙니다. 건물은 교회가 아닙니다. 예배당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입당할 예배당을 비전채플이라고 부르기로 약속했지 않습니까? 채플이란 말이 예배당이란 뜻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예배당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약성경은 혁명적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너희 몸 안에 성령이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솔로몬 성전도 추해서 계실 수 없었던 하나님께서 신약성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통하여 내 안에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모든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곳은 그곳이 어디든 교회요, 성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완성되는 마지막 성소가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요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득한 곳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충만한 곳입니다. 이 땅의 성소가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를 기다리게 될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했습니다. 내 몸이 무너지면, 즉 내가 죽으면 천국 성소가 나를 영접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예배 드리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삶이 천국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성소는 천국 성소의 작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대구에 가면 대봉교회라 하는 우리교단의 교회가 있습니다. 박희종이라는 제 친구 목사님이 목회하는 곳이고 박맹술 목사님 - 총회장을 지내신 어르신이 목회하던 곳입니다. 박맹술 목사님이 목회 말년에 천국을 보고 오셨어요. 목회를 하면서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충성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며 목사님이 ‘저사람은 복받지’ 그런 사람의 집과 ‘저렇게 살아서는 안될텐데’ 하며 늘 마음에 여기는 사람의 집들이 분명하게 다르더랍니다. 그러한 가운데 천국을 경험하면서 ‘내 집은 어딜까?’ 하고 천사의 안내를 따라갔더니 이과수폭포같은 큰 폭포 곁에 교인들의 집이 보이면서 그 주변에 개딱지 같은 집이 하나 있더랍니다. 그 집이 다름아닌 자신의 집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진정 드린 것이 너무 모자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박목사님은 천국의 경험을 하고 돌아온 후에 자신이 받았던 모든 퇴직금까지 하나님 앞에 다 드리며 빈손으로 툴툴 털고 하나님 앞에 가셨습니다. 

III. 성전 건축 기회 - 본문

이스라엘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의 절정은 성막을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성막을 어떻게 짓고 성막에 들어갈 기구는 어떤 것들인지 일일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산 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때 가지고 나온 금덩이를 녹여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거기에 절하고, 방탕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요. 

하나님이 고민을 하셨습니다. ‘이런 백성을 통해 과연 성전을 짓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버리시기로 작정합니다. 이때 모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들을 용서하지요.  “너희들이 성전을 지어라. 거기서 내가 너희를 용서할 것이고 백성들을 만날 것이고 너희들에게 말씀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을 명령하고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갈 성구목록을 일일이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이 기꺼이 순종하는 얘기가 그 방탕했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 하나님이 성막을 짓게 하셨다. 기쁨으로 순종하는 얘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사역, 직분을 빼앗기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직분을 빼앗긴 대표적인 인물은 에서, 사울 왕, 가롯 유다입니다. 모두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상실한 인물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늘의 천사들을 동원해서 하늘의 풍성한 것으로 하나님의 집을 짓지 않고 힘든 삶을 살고 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봉헌하도록 하신 것일까요?

① 성경의 교훈에 의하면 충성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내게 충성할 기회를 주신 것 자체는 내게 복이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나를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초창기 선교할 때 원칙이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하던 네비우스 선교사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한 후 한국선교의 방향을  자치, 자립, 자전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재정적으로 자립시키겠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건축될 때에 건축만큼은 원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 성도, 멤버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여러번 예배당을 준비하기도 하고 대 여섯 일곱 번 째쯤 옮기게 되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한 것이 아니라 모두 우리 교우들의 크고 작은 헌신을 통하여 예배당을 준비하고 건축을 해 왔습니다. 어려운 후배들이 건축에 도움을 요청하면 가능하면 건축만큼은 도움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그 교회 교우들이 받아야 될 복을 우리가 뺏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늘의 영광스런 재물로 건축하지 아니하고 한없이 어려운 우리를 통하여 어려운 감당하길 원하셨을까요? 

② 물질 신학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광야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해 쓰라는 것입니다. 가치 있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 하나님이 주신 재물이라는 것을 고백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금송아지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쾌락을 위하여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의 기분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낭비하며 살아가는 것 옳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③ 성전 건축을 하다 보면 우리 교우들이 갖는 부담감과 목사가 갖는 부담감은 무게감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밤잠을 자지 못할 때가 있고 입술이 바싹 바싹 탈 때가 있습니다. 자고 났더니 뚝딱 비전채플 건축했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늘에서 뚝 성전이 떨어졌다. 땅만 준비해 놓았더니, 교인들이 한 20일 금식기도 했더니 땅에 뚝 떨어졌다. 얼마나 멋있을까? 그러나 헌물을 바치는 백성들의 마음이 성령이 거하는 전이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신비한 종교이지만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성도들의 신비한 헌신으로 예물을 드려 하나님 앞에 세워지길 원하는 것이지 신비주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헌신이 바로 하늘에 쌓는 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 어머님은 서른에 청상(靑孀)이 되셔서 지금까지 저를 키웠는데 제게 명언 같은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제가 대학을 결정할 때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기도하고난 후 신학을 하기로 결단했습니다. 동리사람들은 난리가 나고 학교에서는 거창고등학교 학교회장이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 주면 좋을텐데 신학교에 가겠다는 말에 또 난리가 났습니다. 요즘은 장로회 신학대학이 굉장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줄만 서면 갔습니다. 

제 어머님은 제 손을 꼭 잡고 기도해 주시더니 “지금부터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바친다. 내가 너를 아들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하나님의 종으로 기도하고 섬길 것이다.” 그때부터 이 마음이 변치 않으십니다. 땅을 사고 빚으로 땅을 샀기 때문에 무겁잖아요. 어머니는 원우 가족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아들을 위해서 아파트 한 채 모아놓으셨던 모양입니다. 아파트 등기 문서를 가지고 오셔서 “기도하자.”하신 후 “물질을 가지고 갈 수는 없지만 물질을 천국에 보낼 수는 있는 것이다. 아들이야 하나님이 책임져 주겠지. 아파트야 네가 먼저 천국가 있거라.” 아버지 피 팔아서 장만한 조그마한 아파트를 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서 내어 놓으시는 거예요. 제가 아마 자서전을 쓴다면 명언록에 남기고 싶은 명언들입니다. 

IV. 넉넉히 드렸다. 

백성들이 헌물을 바치는 과정을 기록한 출애굽기 25장과 출애굽기 35장을 비교해 보면 퍽 재미있습니다. 필요한 재료가 두 장에 지루하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성막에 필요한 목록이 세미하게 언급하고 반복되어 있습니다. 25장에서는 하나님의 필요한 목록이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35장에서는 백성들이 그대로 순종해 모두 봉헌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6장에는 백성들이 너무 많이 가져와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가져와라 만류하는 아름다운 광경이 나오고 있습니다. 

물품 목록을 가지고 행정적이고 기획적으로 “유다 지파는 이것을 맡아라. 베냐민 지파는 이것을 맡아라. 에브라임 지파는 이것을 맡아라.” 지파별로 배분하면 깨끗하잖아요. 

성구봉헌목록을 만들어 놓고 배분의 원칙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장로들은 이것을 하시오. 권사들은 이것을 하시오. 개인별로 나눠주면 되거든요. 그리고 집사들은 이것을 하고 청년부에서는 이만큼 하십시오. 주일학교도 요만큼 하십시오. 간단히 하면 됩니다. 한 주일이면 끝나거든요. 배분하면 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봉헌의 대원칙이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배분 된 것은 하나님이 안 받겠다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심령들을 통하여 내 나라를 만든다. 하나님의 역사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들을 통하여 나는 역사를 만들어 간다. 복 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을 나는 이것을 통하여 구별하겠다. 성경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자원하는, 슬기로운, 지혜로운, 감동할 줄 아는... 이런 말이 오늘 35장 36장에 15번 이상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심령들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감동할 줄 아는 심령들 가운데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 감동할 줄 아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동참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감동합니다.” “누가 감동하여 이 일에 헌신하겠느냐?” “제가 감동합니다.” “제가 감동됩니다.” 모든 백성들이 손들고 나왔습니다. 금을 드릴만큼 준비된 사람들은 금을 드렸고, 은을 준비한 사람은 은을 드렸고, 기름을 준비한 사람은 기름을 드렸고, 가죽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가죽을 드렸습니다. 정히 가난한 사람은 염소 털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꼬아 장식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어떤 감동이 있었습니까? 버림받아야 되는데 용서받았다는 감격, 구원받은 감동, 하나님의 집을 짓는 기쁨,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물이 끓어올랐던 것입니다. 봉헌의 대원칙은 이 모든 것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미국 쉐이퍼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가면 헌금 시간에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칩니다. 하나님은 기뻐 드리는 사람, 감동하여 드리는 사람을 받으시기 때문에 헌금 드리는 시간은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수를 친다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이것을 배워 오셔서 한국에 있는 모든 순복음 교회도 헌금 시간에 모든 성도들이 박수를 친다고 합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 생활이 넉넉했겠습니까? 궁핍하고 어려웠을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도 정착 자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 할 때 가지고 나온 모든 물질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성전을 건축할 기회를 주셨다. 성막에 성구를 봉헌할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 사실을 감사했고 기뻐했고 감동했고 자원하여 넉넉하게 봉헌했던 것이지요. 

지난주 성구봉헌 목록표를 나누어 드렸습니다. 성경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목사의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배분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나누어 주고 싶었습니다. 비전채플이 자손 대대에 복이 되길 원했습니다. 

제가 지금 착용한 넥타이는 우리 교우가 선물한 것입니다. 제 마음에 꼭 들어서 자주 맵니다. 이 교우는 이것만 매고 나오면 그날 설교 못해도 은혜 받는다고 합니다.

7년 동안 성전을 건축하고 예배당 건축을 봉헌했는데 들어가서 내가 만들어 놓은 의자 한 칸 없다면 감동 받겠습니까? 

여러분 거기서 작은 물품 하나라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내가 하나님 앞에 우리 어머님 이름으로 봉헌했다. 입구에 서 있는 나무 한그루 우리 아들 이름으로 내가 세웠다. 그러면 비전채플 자꾸 가고 싶은 것입니다. 왜 이것을 우리가 일일이 목록을 작성하여 성경에서 이렇게 봉헌하게 했을까? 모든 백성들이 성전에 갈 때마다 감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예배가 평생 은혜가 되게 하기 위해서 조그만 일들을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린 것입니다. 

기도하시고 비전채플목록을 보시고 감동되시는 곳에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난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아닙니다. 네가 은혜 받아라. 네가 비전채플 주인공이 되어라. 비전채플의 축복이 영광이 부흥이 한소망교회의 부흥이 네 자손만대에 복이 되게 하라.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확신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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