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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본받은 사도, 사도를 본받는 성도 (빌 3:17 ~ 빌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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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본받은 사도, 사도를 본받는 성도 (빌 3:17 ~ 빌 4:1)

   
오늘은 “예수님을 본받은 사도, 사도를 본받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주변에는 항상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곁에는 좋은 성품과 인격으로, 지혜와 지식으로, 믿음과 사랑으로 인생을 가르쳐주었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격려해준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한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려면 그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던지, 격려하고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에는 ‘멘토’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성공적인 인생을 살도록 바르게 세워주고,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인생을 잘 살아가도록 격려하며, 좋은 의견을 던져주는 사람을 멘토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좋은 조언자, 상담자, 후원자를 멘토(mentor)라고 하고, 멘토의 활동을 멘토링(mentoring)이라고 합니다.  

‘멘토’라는 말의 기원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이타이카 왕국의 왕 오디세우스가 토로이 전쟁을 떠나면서 자신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가르치고 돌보아달라고  한 친구에게 맡겼는데, 그 친구의 이름이 바로 멘토였습니다.  멘토는 친구인 왕이 전쟁에 나가면서 왕자 텔레마코스를 잘 길러달라고 부탁 받았는데, 왕자의 선생님으로 대로는 친구처럼, 상담자로, 때로는 아들처럼 생각하고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왕이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왕자는 아주훌륭한 왕으로 손색이 없게 되었습니다.  왕이 자기나라에 돌아오는데, 오면서 보니 백성들이 아주 풍요롭게 잘 살고 자기가 통치할 때보다 좋은 나라가 되었는데, 백성들의 말을 들어보니 새로운 젊은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나라를 잘 이끌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왕의 친구인 멘토라는 사람이 왕자의 아버지처럼, 선생으로, 상담자로, 격려자로 조언자가 되어주어 훌륭한 왕으로 키워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멘토’라는 이름은 현대인들에게도 새롭게 부각되어서 “신앙과 인격으로, 믿음과 사랑으로, 지혜와 지식으로 한 사람을 이끌어주는 조언자, 도움을 주는 자, 영향을 미치는 자”라는 말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인생을 함께 의논하고 신앙과 인격과 성품을 위하여 상담할 수 있는 멘토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힘들게 살고 실패를 거듭해도 누구하나 찾아가 의논할 사람이 없고, 자신의 모든 문제를 자기 혼자 풀어나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힘에 부쳐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게 되고, 결국 실패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고 보람을 찾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원하면 좋은 선생님을 모시고, 좋은 멘토를 모시고, 때로는 신앙과 인격에 있어 본받을만한 좋은 모델이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역할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세계 많은 위인들도 본받고 싶은 한 사람을 정해놓고 그를 닮으려고 노력한 결과 그도 훌륭한 사람, 고귀한 인격의 사람, 많은 업적을 남기는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유명한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하버드대학을 나와 뉴욕주 상원이 되고, 윌슨행정부의 해군 차관보를 지내고, 민주당 부통령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39살 때에 어린이들이 주로 걸리기에 소아마비라고 부르는 병에 걸려 대통령이 되는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는 소아마비에 걸려 무려 7년간 치료에 전념해야 했습니다.  루스벨트가 정계에 복귀하기 전 재활치료를 받고 있을 때에 그는 헬렌켈러를 역할 모델로 삼고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헬렌켈러는 시각장애자로 전혀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청각장애자로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언어장애자로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인생의 가장 비참한 삼중고를 격고 있었지만, 그는 박사학위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간 여성이었습니다. 루스벨트가 생각합니다.  ‘나는 양다리가 마비된 것뿐이니 헬렌켈러의 정신만 가지면 장애를 극복하고 일어날 수 있다’고 위대한 목표를 세웠습니다.  헬렌켈러가 해냈다고 하면 나도 한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여러분, 강영우박사를 잘 아실 것입니다. 맹아학교를 나와 연세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하고,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석사,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부시 행정부에서 차관급으로 임명을 받았는데, 상원의 인준을 받아 장애인위원회의 위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중학생 때에 시력을 잃었는데, 그를 치료해주던 국립의료원의 구본술 박사가 들려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영우군의 시력을 회복될 수 없지만, 일본의 ‘이와하시 다께오’ 박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와하시 다께오는 와세다 대학 재학시절에 실명하였지만, 훗날 영국에 유학하여 에딘버러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일본으로 귀국하여 대학교수가 되었고, 일본의 맹인 복지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어린 강영우군은 이와하시 다께오선생을 역할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나도 커서 대학을 가고 해외 유학도 떠나고 훌륭한 선생으로 살아서 맹인복지를 위하여 헌신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는 그를 치료해주던 구본술박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저도 대학에 진학하고 유학을 가고, 한국의 이와하시 다께오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르고  보니 이제는 자신도 다른 사람의 역할모델이 되고 귀감이 되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내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진리입니다.’라고 하지만, 나를 본받으라고 할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래라, 저래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나를 본받으라고 할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을 근거로 하여 구원받았는데, 성경에서만 나를 본받으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어떤 책에도 나를 본받으라는 말이 없지만, 오로지 성경에만 “나를 본받으라”는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빌3:17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고전11:1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고전4:16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여러 번 당신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행26:29에서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 그리고 많은 고급 관리들 앞에서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를 본 받으라’고 한다면 인생을 잘 사시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주님을 본받는 사람으로 살아간 것처럼 그의 생애, 그의 인생, 그의 가치관, 그의 처세, 그의 목표, 그의 살아가는 태도를 다 본받아야겠습니다.  

사도바울이 먼저 우리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었기에 자신 있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써 사도바울을 본받을 수만 있다면 인생 성공은 물론이고, 하나님 앞에서도 잘했다고 칭찬받을 수 있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흉내 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처음부터 무엇을 잘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잘하는 사람을 따라하고, 흉내 내는 것으로 그를 닮아가고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다.  모창을 잘 하는 사람이 자기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일생 따라 부르기만 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독창적인 경지에 이르러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중학교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에 펜맨십(penmanship)이라는 공책이 있었습니다.  노트에 영어 알파벳을 써놓았는데, 점선으로 희미하게 써 있었습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그 점선을 따라서 그 위에 그려가면서 알파벳을 익혔고,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본이 되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대한 인격과 성품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영원한 선생님이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고 하셨습니다.  

본이라는 말은 ‘휘포데이그마’라고 하여 본보기, 모형, 표본, 견본, 모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인격, 성품, 그의 사역은 만세의 모든 인류에게 본보기가 되고, 견본과 같으며, 우리가 영원히 닮아가야 하는 표본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예전에 어머니들이 옷을 만들어 입을 때에는 자기 몸 치수에 맞게 본을 뜨고, 그것을 옷감 위에 올려놓고 천을 재단하여 옷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먼저 옷의 모양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본을 뜹니다.  그 본을 가지고 옷감 위에 올려놓고 재단하여 옷을 만들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디모데와 에바브로 디도를 추천하면서 그들도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사도바울의 교만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이단 사설이 성행하였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유혹도 강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중심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좋은 신앙, 위대한 삶은 쉽게 본받지 못하고 나쁜 일들, 나쁜 사상을 쉽게 본받게 마련입니다. 

구약에도 보면 이방인을 본받고, 우상 숭배하는 여로보암을 본받아 나쁜 길로 들어가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집을 본받아 가증한 우상숭배를 끌어들이고, 하나님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아합왕을 따르고, 본받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악한 일에는 쉽게 배우고, 따르게 되지만, 위대한 일, 좋은 본보기는 쉽게 다르고 본받을 수 없습니다.  힘쓰고 애쓰고 노력해야만 그를 본받아 따를 수 있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바울도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했습니다.  ‘눈여겨보라’는 말씀은 자세히 살려보라는 말이요, 주시하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본받고 닮아가기 위하여 눈여겨 살펴보고 주시하고 관찰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롬13:11을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나의 남은 날을 계수해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시90:12에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남은 날이 얼마 없습니다.  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3장에 보면 현대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는데, 그들은 부자라고 자부심이 대단하였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계3:17-18을 보면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요한계시록3:17-18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그 교인들은 곤고하였습니다.  가련하였습니다. 가난하였습니다.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진정 부요하게 되려면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영안을 열어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고, 내가 과연 본받아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되고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깊이 알고 결단해야겠습니다. 

18절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세상을 살펴보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바울은 얼마나 뜨거운 마음으로 말씀하는지 그는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외치고 목청을 높여서 잘 믿어보자고 외치고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러운 것으로 알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는 것은 시시하고 부끄럽고 보잘것없다고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여 자기 의를 가지고 구원받겠다는 이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나는 잘 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19절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 배만 부르면 내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 생각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인생을 마치는 날이 옵니다.  

오늘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마치 인생을 경주하듯이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남보다 빨리 성공하고, 남보다 앞지르고, 더 많이 소유하고, 오직 인생을 즐기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달려와야 했는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후회하고 헛되고 헛되다고 탄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스프링 폭스’라는 산양이 있습니다.  이 산양들은 집단에서 이탈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수천마리씩 떼 지어 다닙니다.   이렇게 수많은 양들이 몰려다니다 보니 뒤에 있는 양들을 풀을 뜯어먹을 수 없게 됩니다.  앞에 있는 양들이 다 뜯어 먹거나 발로 밟아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뒤에 있는 양들은 앞으로 나가기 위해 앞에 있는 양들을 밀기 시작합니다. 뒤에 있는 양이 자꾸 미니까 앞에 있는 양의 발걸음이 빨라지게 되고, 나중에는 더 앞으로 가기 위해 뛰기 시작합니다. 앞에 있는 양이 뛰면 뒤에 있는 양들이 집단에서 이탈될 것을 겁내어 앞의 양을 따라 같이 뛰어갑니다. 앞에 있는 양이 뛰니까 뒤에 있는 양도 뛰고, 앞에 있는 양은 뒤에서 미니까 뛰고, 덩달아 뜁니다. 양들은 왜 뛰는지 모릅니다. 어디로 뛰는지 모릅니다. 알고 뛰는 양이 없습니다.  이런 산양의 경주는 그칠 줄 모르고 죽고 살기로 뜁니다.  벼랑을 만났는데, 앞에 있는 양은 뒤에 달려오는 양들에게 밀려서 떨어지고 뒤에 있는 양들은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고 뛰어 가던 속도에 그대로 벼랑으로 떨어져 몰사하게 됩니다. 

이 산양의 모습은 오늘 바쁜 일에 허덕이고 있는 오늘 현대인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왜 달려왔는지, 어디로 달려온 것인지, 이제는 달려가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어 멈출 수가 없습니다.  죽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까지 달려왔습니까?   이 시간 속도를 줄이고 멈추십시오.  그리고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20절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들어가 살아갈 영원한 나라는 하늘나라입니다.  우리 주님이 예비해놓으신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썩어질 것들을 거두는 멸망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요, 그렇게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리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켜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분입니다. 

21절입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장차 우리 주님과 함께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예수님의 모습처럼 찬란한 옷을 입고, 아버지의 앞에 서는 날이 옵니다.  

결론적인 말씀으로 빌4:1의 말씀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4:1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안에 서 있습니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셔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십니다. 

이탈리아의 밀라노 대성당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고딕 성당입니다.  세 개의 출입문이 아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아치 위에 세 개의 비문의 새겨 있습니다. 오른 쪽에는 “모든 즐거움은 순간에 불과하다.” 왼쪽 문의 아치 위에는 “모든 괴로움은 순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중앙의 출입문 아치 위에는 “영원한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라고 새겨 있습니다.  세상의 즐거움도 잠시, 세상의 괴로움도 잠시잠깐이지만, 우리는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합니다.  영원하신 주님만이 나에게 중요합니다.  주님은 나의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사는 이유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닮아가며, 주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겠습니다. 

주님을 본받은 사도, 오늘 그 사도를 본받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주님을 본받고, 주님의  형상을 이루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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