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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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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 3:14~22)

     
계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으로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주전 253년에 안디오쿠스(Antiochus) 2세가 도시를 세우고 아내 Raodice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부르기아(Phrygia)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지역(행16:6)의 수도였던 라오디게아는 교통의 요지였고 상업도시로 발달한 곳입니다.    이곳으로부터 6.5KM 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흘러내려오는 온천물을 수로를 통해 받아 사용하였는데 이 온천물이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었고, ‘부르기아 가루’라고 불리는 눈병 치료의 특효 안약 생산지로 유명하여 의료도시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양털과 목화 생산으로 섬유산업이 유명한 곳이었으니 활발한 무역을 통해 도시 전체가 재정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렸습니다.    소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역시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을 때 로마제국이 복구작업에 비용을 후원하겠다고 했지만 이 도시 사람들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재건할 정도로 재정적인 능력과 자부심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진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주님의 책망과 권고와 경고 그리고 약속의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은 어떤 분으로 소개됩니까?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분이십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진실로’ ‘참으로 그러하다’라는 말이니 거짓없이 진실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라 했으니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늘 보좌를 사양하고 세상에 오신 충성스런 아들이요 진리를 증거하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참된 증인이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신 창조의 근원이십니다. 요한은 계시록 1장5절에서,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하며 그리스도를 충성된 증인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1장8절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소개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시작이며 모든 시작의 시작이며 영원한 시작과 영원한 끝을 쥐고 계시는 분이시니 처음과 나중이며 영원전부터 영원토록 계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이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왠지 편치 않아 보이십니다. 이 교회는 사데 교회와 함께 책망만 들은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는 히에라볼리로부터 흘러오는 온천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땅에서 처음 나온 물은 뜨거운 온도였을텐데 6.5KM 노천 수로를 따라 흘러오는 도중에 물이 식어 라오디게아에 도착했을 때는 뜨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 지방이 공급받던 또 하나의 물은 골로새 지방에서 오는 물인데 이 물은 차갑고 신선한 물이었다고 합니다.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수는 치료의 효과가 있어 유익하고 골로새 지방의 차고 신선한 물 역시 사람들에게 유익한 생수가 되지만 라오디게아로 흘러온 미지근한 물은 마시기에 역겨운 물이었으니 주님은 이 지역의 물을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생활과 비유하여 책망하십니다.    

더운 여름날 목이 마를 때 깊은 우물에서 퍼올린 생수나 냉장고에서 막 꺼낸 차가운 물은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줍니다.   하지만 뜨거운 태양 아래 미적지근하게 덥혀진 그릇의 물을 마시면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듭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느낌이 꼭 그 도시의 물처럼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한 어중간한 것이었습니다. 비슷한 예로, 음식을 입에 넣었는데 맛이 밋밋하고 느끼하여 차마 넘길 수 없어 뱉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곤욕스런 때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꼭 그런 맛을 내는 교회입니다.  변질된 음식 같은 사람, 비위를 상하게 만드는 고약한 상태의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냉정한 평가를 내리십니다.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고 싶다 하십니다.   

그들의 말에서 미지근한 태도를 찾아봅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합니다. 활발한 무역으로 물자와 돈이 철철 넘치는 부유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흥청망청 누리고 즐기며 아쉬움과 궁핍을 모르고 삽니다. 도시 전체가 부유할 뿐 아니라 그 지역 교회 역시 재정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교회 재정이 모자라 선한 사업을 못하거나 너무 궁상맞다는 핀잔을 들으면서까지 아끼고 절약하며 빠듯하게 재정운영을 해야할 염려가 없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서 얻은 재물의 이익이라는 것이 과연 정당한 노동의 댓가였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그들의 경제활동과 자부심에 대하여 이처럼 부정적으로 평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소아시아의 다른 도시들과 비슷하게 라오디게아에도 상인들의 길드가 조직되어 있고 우상숭배 문화가 일반적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사업을 하며 부를 축적하려면 상인조합에 가입하고 그 지역 사회가 주관하는 우상숭배 축제에 동참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소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는 돈을 모을 수 없는 환경에서 부를 쌓았던 사람들이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입니다. 일곱 교회들 중에 부유함 때문에 직접적으로 책망을 받은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뿐입니다.    

이 교회의 책망은 서머나 교회의 칭찬과 정반대입니다.  ‘네 환란과 궁핍을 내가 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 (계2:9)   서머나 교회의 환란과 궁핍은 장사수완이 부족하거나 자본이 부족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거절한 것 때문에 받는 고난이었습니다. 실제로 서머나 교회는 라오디게아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자라고 자랑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물론 신앙적으로 자신만만한 사람들입니다. 궁핍함을 보이지 않을만큼 넉넉한 수입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쉬운 손을 벌리지 않을 정도로 살아갑니다. 성공한 재력가들이 많은 교회와 교인들은 그 물질 풍요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실 그 밑바탕에는 상술이 뛰어난 자신들의 공력을 자랑하는 마음이 감추어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바울이 말한 어느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마음과 지혜가 아니라 자기 만족과 자기 의에 젖은 자부심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물질 축복을 받을만 하니 받았다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보다 나의 믿음이 더 좋다는 비교의식에서 나온 자신감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부요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가련한 인생들의 실상입니다. 만일 그들의 생각과 말이 옳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착각을 냉정하게 지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모델로 제시하시고 ‘너희들도 예수 잘 믿고 충성하면 이 교회처럼 부자가 된다’  하고 칭찬하셔야 옳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착각하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네 곤고한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만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요함이 무엇일까 짐작이 갑니다.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합니다.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계2:9)   이때 주께서 말씀하신 부요함이 어찌 물질의 넉넉함이겠습니까? 멋진 주택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패션 쇼하듯 유행 따라 고급 옷감을 걸치고 살며 한가로이 홀리데이를 가지는 그런 여유와 넉넉함이 아니라 주 안에서 누리는 만족감입니다. 자칭 부자라고 자랑하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요함을 서머나 교회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다는 말은 산 것 같지만 죽은 듯하여 죽지않을 만큼 겨우 숨쉬고 있는 생명이니 이것을 어찌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차갑고 더움은 둘 다 긍정적인 신앙의 양면입니다. 차갑다는 말을 냉냉한 믿음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차가움은 그대로 좋은 상태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정신이 번쩍 들게 시원한 면이 있어야 합니다. 여름 날의 냉수처럼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다. 그런가 하면 얼어죽어가는 믿음에 열기를 전달하는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온천물처럼 뜨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골로새 지방의 생수처럼 차갑고 신선함도 없는 뜨뜻 미지근한 신앙은 주님 보시기에 지극히 염려스럽고 구토가 납니다.    

이렇게 착각하는 교회를 향해 고침받을 수 있는 처방전을 주시는데 첫째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불같은 시험과 시련을 통과한 정금을 사서 영적 부요함을 얻어야 합니다. 찬송가 가사에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 되도다 이 진리 믿는 사람들 참 복을 받겠네’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성령의 불로 우리의 더럽고 냄새나는 죄가 깨끗하게 태워지고 성령의 용광로에 들어가 불순물이 태워지고 죄로부터 분리되어 정금으로 나오는 믿음이 우리를 참으로 부요한 자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부자되는 길이며 주께서 기대하시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흰옷을 사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하십니다.  아무리 값비싼 명품 옷을 입었어도 사람의 근본적인 부끄럼을 가리지 못합니다. 화려한 옷으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사람들은 그 내면의 허전함을 달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디자인하여 만든 무화과 나뭇잎 옷이 그들의 수치를 완벽하게 가리울 수 있었으면 하나님께서 굳이 죄 없는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멋지게 치장하고 패션 쇼를 하며 얼짱, 몸짱 외모와 가진 재력을 과시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예수께서 이땅에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데 교회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니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닐 것이라 했습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 함은 우상숭배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깨끗한 성도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벌거벗은 수치를 보인다’는 말은 우상숭배로 그 몸과 마음이 더럽혀진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를 책망하실 때 하시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겔16:36; 23:29; 사20:4).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처럼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는 자들로 가득하였습니다.그들이 아무리 좋은 옷을 입었어도 가리우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벌거벗은 자로 수치를 드러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사는 자입니까? 주께서 주신 흰옷 입은 사람입니까?  

끝으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자신들의 수치를 보게하라’ 충고하십니다. 영안이 가리워 분별력이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 무감각으로 깊은 착각에 빠져있었습니다. 미지근하다는 말과 눈이 가리웠다는 말은 그들의 무감각한 영적 상태에 대한 은유적 표현입니다.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을 합니다만 라오디게아 교회야말로 자신들의 가련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처지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제대로 된 안경이 필요했습니다. 볼 것은 못 보고 헛된 것에 눈이 먼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직격탄입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는 이 말씀은 주님의 유머가 아닐까요?  너희들이 그렇게 돈이 많은가? 그 유명하다는 안약 ‘브루기아 파우더’를 팔아 너희 소득을 올리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약을 눈에 아무리 많이 발라도 영적인 안목은 깜깜하게 가리워 보이지 않는구나. 너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안약을 사서 발라야겠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믿음과 나쁜 믿음의 차이는 육안으로 보이는 생활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영의 눈으로 보이는 삶의 차이입니다. 좀 값싸고 유행에 뒤진 옷이지만 단정하고 몸에 맞으면 되지 않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비싼 옷 입은 사람들을 무조건 책망하시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을 모르는 분은 이 자리에 없을 줄 압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전반적으로 영안이 가리운 그런 분위기였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진  과시욕과 허영심을 기독교인들도 그대로 받아들여 물질적인 화려함을 복의 기준이나 성공의 기준으로 삼으려 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이 실생활에서는 어쩌면 그렇게도 이율배반적인 삶을 사는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떤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는 말일까요?  주님께서 가지신 영광은 좋지만 고난과 궁핍은 거절하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제자 운운한다면 그보다 더 답답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들 가운데 도중에 실패한 가룟 유다를 빼고 나머지 사람들 중에 어느 누가 선생님의 길을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고 안락한 인생을 누리는 것으로 여기고 죽기까지 순종하였습니까?  예수께서 가신 길이 십자가의 험한 길임을 두 눈으로 똑바로 목격한 그들이었는데 왜 한결같이 그 험한 길을 따라갔을까요?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은 이미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도 없습니다. 고난을 통과한 열매이기에 그 가치가 더 귀하고 영광스럽습니다. 이번에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얻은 김연아 선수가 정신적인 표어로 삼은 말이 ‘No pain, no gain’ 이라고 합니다.  이제 겨우 스므살의 어린 사람이 가진 좌우명인데 그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no pain, no gain 이라는 말을 마음에 담고 강한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여 세계 무대에서 뜻을 이루었으니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스러우며 수고를 많이 하였습니다. 운동선수로서 그 숱한 역경과 고된 훈련을 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그런 영광스런 결과를 얻었으니 김연아 선수보다 어리거나 비슷한 나이의 젊은이들에게 좋은 도전이 되고 그보다 더 나이 든 우리 모두에게 역시 좋은 교훈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겠다면 우리도 그런 마음자세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모스 8장11절에,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양식이 없거나 물이 없어 목마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가난함이었습니다. 지금 이 교회가 진정한 부자가 되기 위하여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불같은 연단을 통과한 금과 주께서 주시는 흰옷과 영안을 밝게 할 안약이 필요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워낙 돈이 많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라 주님께서도 거기에 걸맞는 충고를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과 흰옷과 안약을 사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은행이 발행한 금화나 라오디게아 브랜드 명품 옷과 유명한 안약으로는 안되고 오직 주님께로 와야만 구입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를 주면 주님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이 어찌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천만금의 돈이겠습니까? 다만 ‘너희 목마른 자들아 값없이 돈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신 주님께 빈손 들고 나오는 수 밖에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철없고 무지한 사람들에게도 ‘내게로 오라 그리고 나에게서 이것들을 사서 고침을 받으라’ 권고하시는 사랑스런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관한 말씀을 한 번 더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말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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