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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지자 사무엘 (삼상 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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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사무엘 (삼상 3:1~21) 
 
 
사무엘상 3장은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을 다시 한 번 확증하면서, 아이 사무엘이 선지자 사무엘로 세워지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자 하는 독특한 목적을 두셨습니다(출 19:6). 이 목적에 따라 율법을 주셨고,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가는 훈련을 반복하셨지요. 왕이 없는 사사 제도는 하나님의 목적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성숙한 사회 형태였습니다. 만일 각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소견을 가졌었더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삿 21:25)행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반을 둔 소견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사 시대의 자율성 속에서 오히려 이스라엘은 심각한 종교적인 부패와 극심한 도덕적 타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태어났던 시대는 이런 사사 시대의 말기였습니다. 회복의 가능성은커녕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4:22)는 탄식을 하게 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지요. 그 사회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사악한 자들이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2:12). 차츰 확인하겠지만 장로들과 백성들은 언약궤 자체에 구원하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저급한 신앙에 빠져 있었고, 호기심으로 여호와의 궤를 열다가 멸망당하는 등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였지요. 성경은 “아이 사무엘”이 등장하던 이 시대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1)고 진단합니다.

“아이”는 유아에서부터 청년까지를 포괄하는 단어지만 일반적으로는 ‘소년’을 뜻합니다.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말은 ‘계시가 더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지는 현상은 부패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사무엘 시대로부터 350년이 지난 아모스 선지자의 시대(주전 750년 경)에도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은 심판의 한 현상이었지요(암 8:11-13).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선지자가 사라진 400년 동안의 신구약 중간기도 이스라엘 역사의 암흑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서도 당신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공급할 한 소년을 조용히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시대에 말씀을 공급해야 할 사람은 엘리 대제사장이었지만, 그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했습니다(2). 죄에 대처하는 엘리의 신앙 감각도 점점 무뎌졌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는 설명은 사무엘이 새로운 말씀 공급자로 떠오르고 있음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듯합니다. 4절에서 마침내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 순간이었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로는 영적 암흑기를 벗어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비록 심각하게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님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나타나심으로 이제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던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말씀을 공급하려 하셨습니다. 성도의 삶에 말씀이 희귀하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달리지 않는 자전거는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는 것처럼, 바른 신앙에서 넘어지게 되지요. 절대적인 표준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더불어 살고 있는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게 됩니다. 죄에 대한 감각도 점점 무뎌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여호와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는 혼합신앙의 상태가 되지요. 말씀이 희귀하고서는 결코 바른 신앙을 보존할 수가 없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세 번이나 엘리의 부름으로 오해했습니다(5-8). 성경은 이를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7)고 설명합니다. ‘알지 못했다’는 말은 지식적으로 몰랐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사무엘 역시 말씀이 희귀한 그 시대의 아들이었던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음성조차 헷갈려하는 사무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부르셨습니다.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 엘리는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8) 사무엘에게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9)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여호와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사무엘과 불량자였던 엘리의 아들들이 동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선택을 받습니다. 왜일까요?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일방적인 은혜이며, 응답하기까지 부르시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가 없었다면 사무엘도 여호와를 모른 채 그 시대의 풍조에 휩쓸려 살았기 쉬웠겠지요.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사무엘은 하나님을 알 수 없었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가장 감사한 일은 하나님을 통해서 무언가 얻거나 성취한 일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인격적으로 만나주신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으셨습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하나님의 뜻 혹은 자신의 사명을 찾을 때, 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하고, 외적으로 자신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사무엘은 말씀이 희귀한 환경에서 부름 받아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할 선지자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부여된 첫 번째 임무는 선지자가 가져야 할 전형적인 자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보내든지 … 가며 … 무엇을 명하든지 … 말”하는 것이지요(렘 1:7). 선지자에게는 이런 은사가 꼭 필요하지요.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고 응답합니다(10).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계시하신 말씀은 얼마 전에 엘리의 집에 심판을 선언했던 이름 모를 선지자의 선언 내용과 같습니다. 심판이 확정되었음을 다시 한 번 전하게 하신 것이지요(11-25). 영적 아버지와 같은 엘리에게 심판을 선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15)했지요. 축복의 말씀과 듣고 싶어 하는 말씀만 전할 수 있다면 신나겠지만, “주의 종”은 심판의 말씀과 듣기 싫어하는 말씀일지라도 전해야만 합니다. 종은 주인의 말씀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취사선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선택되는 것은 큰 복이지만 동시에 이와 갈은 고난도 따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계시의 특징도 잘 나타나납니다. 첫째로 새로운 계시는 이전의 계시된 내용과 상충되지 않는다는 점이고, 둘째로 새로운 계시는 이전의 계시를 확고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계시의 특성 때문에 특별계시에 해당하는 성경 66권 전체가 시종일관 일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담에게 계시하신 ‘여인의 후손’도 처음부터 메시아를 의미했다는 점에서 내용은 동일하고, 그 계시가 ‘아브라함의 씨’ ‘유다의 후손’ ‘다윗의 자손’으로 점점 더 명확해지다가 예수님께 이르러 완성되지요. 또한 하나님의 계시는 개인에게 주어질지라도 하나님 백성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계시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사무엘은 엘리의 조언에 힘입어 계시된 내용을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18a)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자라면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19). 이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삼하 8:6, 14)하셨다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사명이 달랐기 때문에 똑같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지만 나타나는 현상은 달랐습니다. 다윗에게는 승리를 주셨고, 사무엘에게는 말씀의 권세를 주셨지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습니다(20). 아이 사무엘이 드디어 선지자 사무엘이 되었지요.

사무엘은 모세를 연상하게 하는 매우 독특한 지도자입니다. 모세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모두 행했는데, 사무엘 역시 세 가지 역할을 모두 합니다. “모세야 모세야”(출 3:4) 부르신 것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신 것도 같고, 이스라엘 역사에 대단히 큰 영향을 준 지도자였다는 점도 같지요.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는 이스라엘 최북단부터 최남단까지를 뜻합니다. 이는 일부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에서 선지자로 인정받았음을 나타내지요.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21). 여호와께서는 계속 사무엘에게 말씀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선지자 사무엘이 되기까지 하나님의 손길이 끊임없이 작용했습니다. 그의 태어남부터가 여호와께서 권고하신 결과였지요(2:21). 성장과정에서는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으며 자라나게 하셨습니다(2:26). 선지자로서의 첫 임무 수행에서 머뭇거릴 때는 엘리 제사장의 도움을 받게도 하셨지요(17).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기까지 하나님의 도우시고 인도하시며 공급하시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사환으로 지내던 아이를 온 백성 위에 높여주셨지요. 하나님은 높은 자를 낮추기도 하시고, 낮은 자를 높이기도 하십니다. 아이가 가라감에 있어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엘리 제사장은 상당히 후덕한 인물로 보입니다. 사무엘을 대하는 태도에서나 심판의 예언을 듣고도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18b)는 태도를 취한 것에서 그의 경건성을 엿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고를 하셨다는 것은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인데, 그 기회 동안에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간절히 붙잡지 않고 일찍 체념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은 아합과 같은 악인도 진실하게 회개할 때 저의 시대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는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왕상 21:29).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아가는 삶임을 늘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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