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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성품이 축복이다! (롬 1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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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성품이 축복이다! (롬 12:9~21)


먼저 이 시간에 동영상 하나를 보고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방금 본 동영상은 아주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되게 하는 것은 그가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우리의 성패를 판가름합니다.  결코 피부색이나 체구의 크고 작음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위대한 꿈을 가지고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만이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성품이 변화될 수 있으며, 또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닮아갑니다.  끝없이 닮아갑니다.  처음에는 부모를 닮다가 형제를 닮아갑니다.  그러다가 커서 학교를 가면 어느 선생님을 닮게 됩니다.  직장에 나와서는 직장의 상사를 닮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면서 나를 닮으라고 한다던가 나를 본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부모가 자식을 키우면서 "너, 나를 닮아라."  솔직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아들이나 딸에게 "얘들아, 너희들은 나를 본 받아라."  그렇게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나를 닮아라, 나를 본 받아라"라고 말을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모든 인생에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만이 모든 사람 앞에 희망과 용기와 사랑의 공급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분만이 모든 사람이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구원의 길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과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관계가 범죄함으로 단절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하면서 단절되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던 사람과의 관계가 당신이 준 그 여자로 바뀌면서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벌거벗고서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던 자신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서 자신과의 관계도 단절되었습니다.  이 땅에 땀을 흘려야만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됨으로서 자연과의 관계도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추방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의 단절을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제일 슬프고 아프고 힘든 경험이 무엇이겠습니까?  함께 살던 사랑하는 가족과의 단절일 것입니다.  한 사람을 세상에서 먼저 보낸다거나 한 가족을 이루고 아름답게 살던 사람들이 원치 않는 어떤 어려움으로 깨진 가족이 되어서 분열하여 뿔뿔이 흩어진다고 하는 것은 몹시 힘든 일입니다.

현대인을 고발하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인간 속에서의 관계의 단절이 얼마나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인가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습니다.  탕자 가정의 모든 비극은 분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도 모든 가정, 모든 생명의 아픔과 힘듦은 분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철없는 탕자에게 중요한 것도 아버지와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탕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재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극의 시작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관계가 없어도 단절되어도 좋으니 돈을 붙들겠다고 하는 나약한 정신들이 늘 고통을 줍니다.  관계를 우습게 아는 아들의 어리석음, 분열과 분리의 대가를 전혀 모르는 아들, 아버지보다는 재산이 좋습니다.  집보다는 재산이 좋습니다.  가족보다는 분열이 좋습니다.  분열의 아픔을 모르는 현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고발의 음성은 계속됩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든든한 관계, 확실한 관계, 하나님과의 자신 있는 관계가 회복되면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다른 모든 문제들은 그렇게 문제될 것이 아닌 줄로 압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정말로 부럽습니다.  모든 것이 잘 안 풀리는 데도 항상 밝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엉망이 된 분위기 속에 있으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오히려 남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그런 희망의 공급선을 가지고 있는 사람, 오랫동안 지켜보아도 만날 때마다 그 성품이 아주 어린아이처럼 깨끗하게 변하면서 남다른 짙은 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을 보면 목회자인 저도 정말 부럽습니다.  나도 저런 성품을 닮아 보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생명 속에는 어느 누구도 모르는 자기 속에 잠재되어 있는 신령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 어느 날 예배를 드리다가, 찬양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다가 갑자기 그 숨겨진 신령한 잠재의 능력만 폭발되면 이제껏 내가 나를 평가하던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훨씬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분에게 "당신은 정말로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축복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 주어진 생명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참되게 살아가는 겁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우르러 볼 수 있고 닮고 싶은 그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신령한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너희 속에 신령한 것이 있으면 세상을 넉넉히 이긴다고 했습니다.  삶의 모든 곳에서 신령한 것을 보고자 하는 욕구로 차게 될 때에 분명히 그 생명 속에는 신비한 일들도 뒤따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절대로 가지고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샤머니즘이라든가 세상의 푸닥거리를 미워해야 합니까?  푸닥거리는 푸닥거리를 함으로 내 문제를 다 가져간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마저도 우리 인간 속에 있는 모든 문제를 절대로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신령한 힘을 공급합니다.  신령한 자원을 공급합니다.  그런 내 속에 신령한 힘만 회복되면, 신령한 능력만 회복되면 어떤 문제도 넉넉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회복되면 사망이나 생명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에 정복되는 사건, 하나님의 신령한 힘에 생포되는 사건,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딸이라.  너는 내 아들이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지명되는 이 사건만 내 속에 나타나면 이 땅의 문제들은 사실 별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염려할 대상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 내 주변에서 내 앞에서 내 옆에서 일어나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음에 평화를 찾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세상을 자신의 사고의 틀에 맞추어 조종하려고 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문화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나 어떤 일이 생겼을 때에 자신의 익숙함을 따라서 가장 손쉬운 방법인 자기의 틀 속에 자기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줄로 압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익숙함의 피해자들입니다.  이것만이 문제의 해결이라고 고집하는 착각, 그것이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바뀌어지지도 않을뿐더러 이런 식으로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을 주기만을 바라는 그런 마음의 틀을 고집하고 있는 한 내적 욕구의 충족감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제일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평화를 소유하는 일입니다.  왜 돈을 벌려고 아둥바둥 거립니까?  왜 권력을 붙들려고 그렇게 야단들입니까?  왜 자식에게 공부를 시킵니까?  왜 더 좋은 집을 삽니까?  왜 이사를 갑니까?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천하보다 귀한 자신을 존경하십시오.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자신에게 체면을 거십시오.  "나는 아직도 괜찮아!  멋있어!  젊었어!  건강해!  나는 좋은 사람이야!"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자기 자신을 구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또 다른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존경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도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십시오.  나를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대하십시오.  그러면 절대로 인간관계가 실패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논쟁으로 위대한 우정을 상실할 때면 속상합니다.  수십년 동안 쌓아왔던 우정을 사소한 논쟁 때문에 하루아침에, 한 순간에 다 파괴시켜버립니다.  속상합니다.

내가 어쩌다가 그렇게 했을까?  별일도 아닌데 온유함도 겸손함도 겸허함도 다 잊어버리고 자기 고집만 부리다가 초라해진 이 현실 앞에 집에 돌아와서 마음의 평화를 잊어버리고 속상해 합니다.  그때 내가 왜 그 말을 했던가?  그때 내가 왜 그렇게 날카로운 반응 밖에 할 줄을 몰랐던가?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외침을 스스로 외치게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괴로움에서 구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것은 다 문화적인 시각의 장애물입니다.  우리 모두는 문화적인 시각의 장애물에 걸려서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눈에 드러나는 외적인 안녕과 물질적 번영이 내적 충족감의 근원이라고 믿고 있는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그런 진리의 몸부림을 치십시오.  이 땅에는 아직 내가 알지 못하고 살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더 크고 아름다운 세계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남을 조종하고 이용하는 데는 익숙해져 있는 데 내 심보를 조종하고 내 마음을 조종하고 내 내적 충족감을 조종하는 데에 있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왜입니까?  우리의 문화가, 우리의 학교교육이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아서입니다.  이런 것에서부터 우리는 깨우쳐야 합니다.  깨닫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오면, 그래서 찬양을 하고 말씀을 듣다가 하나님의 영의 깨우침이 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되면 제일 먼저 오는 것은 바로 깨우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캄캄한 곳에서는 옷을 제대로 고를 수가 없습니다.  장롱에 아무리 좋은 옷이 있다고 해도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캄캄한 밤에는 옷을 고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영혼이 캄캄하면 내 속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고를 수가 없습니다.  내 영혼이 어두우면 질서도 없습니다.  그런데 칠흙 같이 캄캄한 방에 불을 켜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캄캄한 방안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아무리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자신이 밝아지고 있는 시각의 변화만 나타나면 모든 변화는 즉시 발생합니다.  어두울 때 보는 것과 밝을 때 보는 것이 다릅니다.  내 영혼이 어두울 때에 세상을 보는 것과 내 영혼이 밝을 때에 세상을 보는 것은 대단히 다릅니다.  이미 길은 열린 겁니다.  문제는 없습니다.  늘 자신의 제한된 시각으로 그렇게 밖에 볼 줄 모르는 그 문제를 보는 내 방식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내 심보가 문제일 뿐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깨우침이 옵니다.  현실을 절망과 두려움으로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이 깨우침입니다.  깨우침은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은 육체적인 짐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짐입니다.  영혼의 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정신적인 눌림과 묶임과 얽매임으로부터 자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에 대한 속상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이것이 깨우침입니다.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고 하는 그런 주장하는 자세로 자기의 자유를 얽매어 버리고 자기의 당위성만을 주장하던 거기로부터 자유하십시오.  근심과 편견, 전이해와 선입관에서 떠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에 대해 회복하십시오.  이것이 깨우침입니다.

결국 깨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사고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하
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고의 틀을 깨면 나는 오늘 훨씬 좋은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나는 오늘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헌신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환경이 나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나를 좌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21세기의 신 경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농경사회가 지나가고 산업사회가 왔을 때에, 다시 지금 산업사회가 지나가고 지식사회, 정보사회가 왔을 때에 신경제의 주체가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때 신경제의 주체는 잘 아는 데로 땅덩어리였습니다.  또 어떤 때는 자본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굴뚝이 큰 공장이었습니다.

그러면 21세기의 신경제의 위대한 자산은 무엇입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인간의 성품이 새로운 자산이 됩니다.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좋은 집을 가진 사람을 보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좋은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보면 참으로 귀하다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존경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 가운데는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은 존경스럽습니다.  좋은 성품의 소유자를 보면 신뢰가 갑니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었으면….  성품은 속임수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까?  우리가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이런 것들이 몇 번 사람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내 밑바닥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기본 성품이 좌우합니다.

인간관계가 제일 중요한 것이 되었다고 했을 때에 21세기의 신경제는 한 개인의 성품이 곧 그 개인의 자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국가가 가지고 있는 그 국민의 성품이 그 국가의 자산가치입니다.  좋은 성품을 가진 국민들이 세계에서 제일 좋은 자산을 갖게 됩니다.  그 국가 지도자의 성품이 그 국가가 가지고 있는 자산가치가 됩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성품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품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그 사람을 둘러싼 상황이 어떻든 그 성품을 따라서 곧고 바른 성품대로 그 일을 처리해 나갑니다.  성품이 곧은 사람은 그 시대를 초월하는 올바른 성품, 바른 삶의 원칙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뚫고 나갑니다.  성품이 되지 않으면 이리저리 다니다가 어느 날 "그때 그렇게 안 살아도 되었는데…"

저는 나이 50줄을 바라보면서 제 나름대로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생을 좀 더 정직하게 살 수 있어야 하는데….  나의 남은 날들을 보다 아름다운 성품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할 터인데….  좋은 성품의 소유자로 사람들에게 설 수 있어야 하는데…."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성공의 기초가 무엇일까요?  사람의 행복의 토대가 무엇일까요?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기본적으로 눈을 떠야 하는 것은 자기 성품에 대한 것입니다.  자신의 좋은 성품을 만드는 일에 일찍 눈을 뜬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인생의 행복한 길에 빨리 들어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스팔트가 없는데 자동차가 달릴 수 있습니까?  레일이 없는데 기차가 달릴 수 있습니까?  좋은 인간의 성품은 아스팔트와 같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삶의 행복과 성공의 근거가 되는 올바른 성품을 내면화하는 작업입니다.

왜 성품이 중요합니까?  성품이 한 개인의 영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성품이 한 개인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뿌리가 됩니다.  우정도 삶의 성실성도 신뢰도 감명도 정직성도 투명성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조화와 화합과 온유와 겸손과 절제와 근면과 참을성과 용기와 충성과 정의와 마음의 평정과 순결, 이런 것들이 다 어디에서 나오느냐?  한 영혼의 성품의 뿌리에서 나옵니다.  성품의 덕목과 자기 가치를 끝없이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실현의 토대가 성품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표현의 토대도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품에서 자기 집의 가치가 나옵니다.

결혼을 해서 아기 둘을 낳은 30대의 젊은 부인이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기로 하고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에 처음 나왔어요.  우리 어머니가 내게 아파트 열쇠를 준다거나 재산의 열쇠를 준다는 것보다도 더 먼저 해야 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나에게 좋은 성품을 만들어주는 성품을 유산으로 주었어야 하는데, 재산 날아가고 아파트 날아가니 나머지 남는 것은 성품밖에 없는데 이 성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울다가 주님 앞에 나온 줄 압니까?"  "성품을 어떻게 만들까?"하는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성품이 인생 길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성품 개발을 왜 남에게 맡깁니까?  내 남편보고 만들어라, 내 자식보고 만들어라.  나는 본래 그런 성품의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 사람을 만나서 살면서 이렇게 되었다.  이것 웃기는 일 아닙니까?  자신의 성품 개발은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작업입니다.  머리와 가슴속에 또 그 삶의 깊은 곳에 성품이 새로운 시대의 자산이라는 패러다임을 구축하십시오.  성품이 자산이 된다는 말입니다.  성품이 내 가치가 된다는 말입니다.  성품이 내 보화라는 말입니다.

사실 성품이란 한 개인을 위대하게 후회 없이 존경받게 만들 수 있도록 숨겨놓은 비밀입니다.  성품이 최고의 밑천이고 최고의 가치입니다.  성품이 좋은 사람에게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 모여듭니다.  그러나 성품이 나쁜 사람에게는 사람이 모여들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모여들어도 그렇고 그런 사람들만 모여듭니다.  우리는 성질이 더럽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렇게 성질이 더러운 사람에게는 존귀한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성품이 그렇고 그런 사람에게는 언제나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래서 성품이 그저 그런 사람들만 모여듭니다.

모든 문제를 보는 방식, 한 인간이 모든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 한 인간이 모든 문제를 조종하는 방식이 어디서 옵니까?  그가 그를 구축한 성품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너희 안에 이 성품을 만들어라.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을 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문자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상적인 것도 아니고 지식적인 것도 아닙니다.  바른 기독교는 인간 해방운동입니다.  이렇게 보면 되는 것인데….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인데….  보는 것만 바뀌면 행동은 쉽게 바뀝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여러분의 지배 가치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쾌락입니까?  친구입니까?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지배가치가 무엇인가 말입니다.  여러분의 귀중한 성품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그 성품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좋은 성품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내 안에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들어 가십시오.

간혹 보면 우리는 이런 속상한 경험도 하게 됩니다.  어떤 친구를 따라 어떤 분위기 때문에 사회적 격식이나 남의 이목이나 그 사람들의 분위기나 비위를 맞추어 주느라고 그만 내가 그토록 공들여 세워놓고 지켜가던 나의 삶의 원칙이나 가치들이 유보되고 무너지고 버려질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떠들어대는 분위기에 내 안에 있는 거룩한 성품이 한없이 무너지는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불평하고 비난하는 그 외침에 나도 휩쓸려서 불평하고 비난하면서 거룩한 믿음의 성품이 무너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속상합니다.  기분 나쁩니다.  후회스럽습니다.  엉망이 된 나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집에 돌아와서 속상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왜 그랬던가?  내가 그것밖에 안 되었던가….

그러나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도 새로운 삶의 질서로 다시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이 생명 속에 다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믿음의 성품의 소유자가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주의 형상이 내 속에 다시 이루어질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에 취했습니다.  거룩한 힘이 살아났습니다.  거룩한 능력이 내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에 취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선에 속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에 전복되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다시 모든 사람을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내가 어떻게 방황했든, 어떻게 무너졌든 내 자신을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내 생명입니다.  내 생명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성령의 권능의 체험을 받아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고난 가운데도 참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의 능력을 믿으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주의 복을 받아서 모든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님을 풍성하게 대접할 수 있는 풍요로운 내 영혼, 풍요로운 내 삶, 평화로운 내 영혼이 되도록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모든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 축복의 전달자가 되십시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공급하는 공급자가 되십시오.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인간의 악함을 능히 이긴다고 하는 증인의 삶을 사십시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일마다 때마다 내 속에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나를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기를 원하는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힘쓰십시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요즘 EQ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EQ라는 말은 IQ(지능지수)에 대조되는 감정지수(Emotional Quotient)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IQ가 높으면 그것으로 좋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 결과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IQ가 그 사람의 성공적인 삶에 미치는 영향은 불과 2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나머지 80%는 감정지수인 EQ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IQ가 높아도 EQ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그로 인하여 인생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EQ가 높다 낮다를 무슨 기준으로 정하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 EQ가 낮은 사람에게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참을성이 없는 성격입니다.  둘째는 흥분을 쉽게 하는 기질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감정의 전달이 잘 되지 않는 점입니다.  자신이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EQ는 상당히 낮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중국의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피아노 연주가 끝난 다음에 조율을 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연주 앞에서 조율을 한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산 다음에 회개하지 말고, 아무렇게나 생활한 다음에 후회하지 말고, 생활하기 전에 삶의 조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피아노 연주를 하기 전에 조율을 하듯이 우리는 생활하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주님의 뜻에 맞는지 조율해서 생활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룩한 성품의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자신을 한 번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좋은 성품의 소유자입니까?
당신은 정말로 멋있는 사람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좋은 성품이 축복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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