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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12) : 가나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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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12) : 가나  (요 2:1~11)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그가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기적을 믿고 기적을 인정하는 종교입니다. 어느 신학교 교수님이 기적을 인정할 수 없다는 신학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네는 만일 자네 부인이 말 못하는 언어 장애인인데 어느 날 갑자기 말을 하게 되었다면 그것을 기적이라고 인정 하겠는가?” 

그러자 이 학생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교수님, 저는 반대로 정말 말 많은 제 아내가 어느 날 말을 못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기적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기적하면 죽을병이 치유되었다든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등의 상황만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기적은 아주 일상적 상황의 필요에 의해서도 일어 날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결혼 잔치라는 일상적 상황에서 일어난 기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잔치의 상황속으로 들어가 보기 위해 우리는 오늘 이스라엘 땅 갈릴리 가나로 출발해 보겠습니다. 나사렛에서 갈릴리 바다 방향 북동쪽으로 약 6.4km 지점에 위치한 현재의 케파르 카나(Kefar Kana)가 아마도 이 기적의 현장이었을 것입니다. 여기 이 마을에서도 적지 않은 고고학적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유대교 회당 그리고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시대의 교회 유적들이 발굴되었습니다. 교회 전승에 따라 이곳에서는 1551년에는 그리스 정교회(1886년 재건축)가 1881년에는 프란시스칸 교회가 나란히 가나 혼인 잔치 기념교회를 세웠고 지하에 내려가 보면 예수님 시대에 사용한 포도주 만드는 돌 항아리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기적이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이었다고 증언합니다. 1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나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첫 표적이란 말은 둘째 셋째 표적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습니까? 사실상 요한복음서에는 모두 7가지 예수님의 기적이 기록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7번의 기적만 행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대표적인 기적들을 통해 그가 누구이신가를 계시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 중에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도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가 할일은 무엇일까요?

1. 주 예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 대부분은 일생의 한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인격적으로 구주와 주님으로 우리 마음에 초청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생에 한번만 하면 되는 그런 영적인 결단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구원을 확신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무시하고 날마다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일상에 간섭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분의 임재를 상실한 채로 무력한 삶을 여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날마다의 삶의 현장에 늘 내 인생의 주인되신 그분을 초청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주님 오늘 우리 집 자녀들에게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그 일을 잘 지도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한다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아침에 직장에 출근하면서 <주님, 제가 지금 회사로 갑니다. 주님 함께 동행해 주시고 제가 오늘 고객을 만나 회사의 프로젝트를 설명해야 하는데 주님이 제 곁에 계셔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결혼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황당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천만 다행한 일은 거기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분이 거기에 오실 수 있었을까요? 초청에 의해서 였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어떻게 예수님이 그 잔치에 청함을 받으셨을까요? 

성경 학자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 잔치집이 인척관계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잔치 집 주인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명하는 일이 가능할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더 가능한 추측은 예수님의 제자 나다나엘이 아마 마을 사람들의 초청을 전달함으로 가셨을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 말미에 나다나엘(혹은 바돌로매-돌로매의 아들이란 뜻, 12제자 명단을 보면 바돌로매가 언급되면 나다나엘은 부재하고 나다나엘이 언급되면 바돌로매는 부재함)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상황이 기록되는데 요21:2에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로 기록됩니다.(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 기념교회 건너편에는 바돌로매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음) 작은 마을 가나에서 청년 나다나엘이 메시아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예수의 제자가 된 소식은 마을의 최대 뉴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을에 결혼 잔치가 열리는 것을 계기로 나다나엘에게 그의 스승을 모셔오도록 부탁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여하간 예수님이 거기에 계셨다는 것-그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요 기적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엄청난 문제에 직면해 계십니까? 문제의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의 해결자를 초청하시는 일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실 수 있는 분-그분이 함께 한다면 그가 해결하지 못할 상황이 있겠습니까? 주 예수를 당신의 일상의 마당에 초청하십시오. 그것이 기적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2. 주 예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그날 갈릴리 가나에서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일, 인간이 못하는 일을 행하시는 그분을 보면서 그가 인간 이상의 존재, 그가 하나님이시고 구주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기적의 결론이 아니었습니까? 

11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나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그러나 이 기적을 행하시기 전까지 아직 이 잔치 석상에 그의 신성을 믿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이셨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천사의 계시로 그가 잉태하고 출산할 그분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눅1:32그가 큰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 질 것이요) 그래서 마리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이 잔치의 문제를 갖고 예수님에게 나아와 아뢰인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가 아닙니까? 

3절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여기 마리아는 기도의 모범으로 등장합니다. 문제를 갖고 예수님에게 나아와 아뢰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문제를 직시했고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와 문제의 해결을 주께 의탁합니다. 4절에서의 예수님의 최초의 반응은 거의 거절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말씀을 거절의 말로 받지 않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5절이 증거하지 않습니까?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마리아는 믿었습니다. 주 예수님이 그녀의 청원을 들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요청이 하나님의 뜻을 명백하게 거스리지 않는 한 믿음으로 아뢰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분이신 것을 믿은 것입니다. 

마가11:24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오늘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혹시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으셨습니까? 포도주는 유대인들에게 인생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살맛 안나고 기쁨이 떨어지는 곤난한 삶의 마당을 직면할수 있습니다. 그때 그런 상황 그런 문제를 갖고 당신은 예수님께 달려오는 분이십니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그냥 주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기쁨이 떨어졌다고, 살맛이 떨어졌다고 말하시면 됩니다. 그 정직한 탄원, 그것아 바로 기적의 시작인 것을 믿으십시오.

3. 주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이 소개하는 기적의 결정적인 열쇠는 순종입니다. 특히 여기 잔치집 하인들의 순종이 돋보입니다. 7절에서 예수께서는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때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도주이지 물이 아니라고 항의할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절에 예수께서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을때 연회장이 요구한 것은 포도주라고 물이 아니라고 말할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누굴 정말 물 먹일 작정이냐고 항의할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순종한 것입니다.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그리고 순종했던 그들은 이 기적의 비밀을 이해하는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9절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연회장은 물로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물떠온 하인들은 알더라>-이 말을 이렇게 바꿀수가 있을 것입니다. <순종한 하인들은 알더라> 누가 그리스도 신앙의 진정한 깊이와 능력을 이해할까요? 말씀에 순종한 성도들이 아니겠습니까?

이 순종의 기적이 가져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돌 항아리 여섯에 넘쳐나는 포도주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의 영광의 나타남을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이 땅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책중에 <네 인생을 주님께 걸어라>는 책을 쓴 저자 최하진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모태 신앙인으로 타성적인 신앙생활을 해오다가 카이스트 시절 어느 날 좀 진지한 믿음의 삶을 추구하고 싶어서 창세기를 읽다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죽었더라”는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말씀이 “데라가 뒈졌더라”는 말씀으로 읽혀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결국 죽음을 피할수 없는 인생의 실존을 고민하면서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과 씨름을 하게 됩니다. 그는 이 말씀을 통해 <네 꿈을 버리고 내 꿈을 가지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교수진을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스탠포드 대학에서 포스트 닥-연구원 과정으로 일단 미국으로 떠나 구체적인 중국행 준비에 들어갑니다. 

1993년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손만 붙들고 기족과 함께 중국으로 떠납니다. 처음 7-8년간 대학생 사역을 하다가 중국 선교와 복음화의 과제를 위해서 4억의 청소년 선교의 꿈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18세 미만 청소년들에게는 선교가 금지되어있기 때문에 그는 중 고등학교 설립의 꿈을 꾸고 구체적인 재정 공급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학교 건축 계획을 믿음으로 정하고 중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표 하나 들고 미국에 와서 학교 땅을 살 6만불의 재정 공급을 기다리기로 했다고 합니다. 

어디서도 이 돈이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날 다니엘이란 1.5세 청년이 전화를 해서 자기가 결혼 준비를 위해 준비한 1만 불이 있는데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라고 해서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가 기도하고 작정한 중국 돌아가기로 한 날 정확하게 나머지 필요까지 6만 불을 채움 받고 학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었고 늘 학교 운영의 짐을 지고 살면서도 미래를 걱정하는 버릇이 없어졌다고 간증합니다. 그는 기도와 순종으로 그의 인생의 항아리가 채움을 받는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나의 기적의 감격입니다. 

이스라엘 류모세 선교사는 <열린다 성경>에서 이 가나 기적의 말씀을 묵상할 때 본문이 <사흘째 되던 날에>로 시작되는 것을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사흘째는 전장에서 이어지는 3일이 아니라, 안식일이 시작된 후의 사흘째 되던 날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월, 화, 수요일 같은 표현 대신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을 첫째 날, 월요일을 둘째 날로, 화요일을 셋째 날로 칭하는데 이것은 창조의 한 주간과 관련된 것으로 사흘 되던 날은 바닷물이 덮혀 있던 지구에 뭍이 드러난 축복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이들을 위해 축복의 날, 축복의 땅, 축복의 향연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면 오늘이 그 축복의 잔치 날이 되도록 준비하시겠습니까?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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