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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리를 불면 춤추는 사람들 (마 1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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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를 불면 춤추는 사람들 (마 11:16~17)


지지난 주 평광교회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후 높은 뜻 교회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내 팔자’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글을 올린 지 9일 만에 3,300명 가까이의 사람들이 글을 읽었고 90명이 댓글을 달만큼 뜨거운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 글을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육십이 되었다. 막상 육십이 되고 보니 칠십이 되고 싶은 마음에 육십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래도 오래 동안 기다렸던 육십이기에 나는 올해 2010년이 좋다. 만으로 따지면 내년이 육십이지만 나는 마음이 급해서 나이를 만으로 세지 못한다.

지나간 육십년 (정직히 말하면 지나간 59년)을 돌아다보니 내 삶이 기적이다. 김남조 선생님의 선물이라는 시에 '내야 흙이온데 밀랍이듯 불 켜시고 한 평생 돌이온걸 옥의 문양 그으시니 난생 처음 이런 조화를 보겠네'라는 구절이 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한 평생 막 돌과 같은 삶이었는데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옥 취급을 받는 조화와 기적을 통감한다. 하나님은 참 위대하시다. 할렐루야.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며 나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 나를 대표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것 저것 생각이 났지만 그 중 하나가 '충동적'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정말 참 충동적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것 중에 하나는 '깨달음'이다. 옛 현인의 글에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이 있는데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내 마음이 그 마음이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나는 무엇을 깨닫는 것이 좋다. 참 좋다. 성경이 좋은 이유는, 하나님이 좋은 이유는 하나님과 성경이 나에게 소중한 많은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나에게 감동을 준다. 큰 감동을 준다. 언젠가는 운전을 하다가 설교를 위하여 뽑아 놓은 성경 말씀이 깨달아졌고, 그 깨달음이 큰 감동을 가져다 주어 갑자기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쏟아졌다.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차 안에서 소리도 질렀다.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어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진정한 후에야 다시 운전을 할 수 있었다.

감동은 언제나 나를 충동한다. 깨달음과 감동은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자꾸 무엇을 하도록 나를 충동질한다. 나는 참 충동에 약하다. 깨달음과 감동이 나를 충동질하면 나는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자꾸 일을 저지른다.

교회를 분립하고 담임목사 자리에서 내려 온 후 내가 제일 크게 집중하고 있는 일은 높은 뜻 교회가 세운 열매나눔재단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나눔재단은 정말 기적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나눔재단에는 풀어야 할 큰 숙제가 있다.

높은 뜻 숭의교회는 재단을 세우면서 처음에 20억원을 헌금했고 5년 동안 매년 10억 원씩을 내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것을 마중물삼아 열심히 펌푸질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교회가 약속한 매년 10억 원의 지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재단의 이사장으로 교회의 지원이 끝나기 전에 최소한 일년에 10억 원 이상의 후원금을 모아야 한다. 만만치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후원자 발굴과 후원금 모금은 참 성공적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높은 뜻 교회의 약속이 끝나기 전까지 목표는 달성될 것 같아 보인다.

그것 하나만 해도 버겁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 부담감 때문에 가위 눌릴 때도 있다. 그런데 나의 충동에 약한 심성은 자꾸 일을 저지른다. 감동이 나를 충동질하면 그냥 지나가지를 못한다.

작년 말 아프리카 케냐를 높은 뜻 하늘 교회 이상윤 목사와 함께 다녀왔다. 아프리카는 너무 멀어서 엄두를 잘 못냈었는데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수련회인데 거기서 설교를 하라는 말에 거절하지 못하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수련회라는 말에 가슴이 아릴 것 같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선교사 부모를 만나 영문도 모른채 낯 선 땅에 끌려가(?) 말도 못할 문화적 충격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선교사들의 자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가야지 뭐.

케냐에 리프트 밸리라고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가 있다. 백년이 넘었단다. 거기에 우리 한국 선교사들의 자녀들이 많이 다니고 있다.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하려면 많은 헌금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동안 헌금은 하지 못하고 혜택만 받아온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곳에서 섬기고 있는 우리 한국 선교사로부터 학교의 시설 보수를 위하여 5만 불 정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듣자마자 약속을 하였다. 충동적으로 약속을 하였다.

귀국하자마자 5만 불을 만들어 보냈다. 5만 불은 지갑에서 꺼내서 쉽게 보낼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 충동은 잠깐인데 부담은 그렇질 않다. 그 묵직함은 언제나 그리고 아직도 편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감사한 건 변비(?)같은 묵직함이 만만친 않지만 그래도 언제나 성공한다는 것이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목표 달성을 위하여 끝이 멀리 보이는 열매나눔재단 후원 중에 모아 보낸 리프트 밸리 선교사 자녀 학교 5만 불 후원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높은 뜻 푸른 교회 문희곤 목사로부터 또 듣지 못할 소리(?)를 들었다. 문 목사가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북한을 위하여 사역을 하고 있는데 그분 들로부터 북한이 지금 식량 문제로 매우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식량 생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문제가 되는데 이번 문제는 북한의 화폐개혁 실패로 물가가 폭등하면서 쌀값이 10배에서 20배 가까이 오르자 그나마 시장에 나오던 쌀마져 나오지 않게 되어 아직은 쌀이 있는데 그것이 유통되지 않아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쌀 몇 백톤만 사주면 그것을 시장에 본래 값에 풀고 싶단다. 그러면 쌀값이 올라갈 때를 위하여 쌀을 풀지 않던 상인들이 쌀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쌀을 풀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게 생각처럼 안 될 수도 있는데 매사에 충동적인 나는 그런 생각을 잘 못한다. 거기에 필요한 돈이 약 3억 원 정도 된단다.

감동은 충동을 낳고, 충동은 행동을 낳는다. 그리고 행동은 부담을 낳는다. 그런데도 결국 또 모른 척 지나가지 못하고 또 일을 저질렀다. 시간이나 많으면 부담이 좀 덜하겠는데 이 일은 늦어도 한 달 안에 해 치워야만(?) 하는 일이다. 빚을 얻어서라도 우선 쌀은 사서 북으로 보내고 또 열심히 앵벌이(?)를 하여 메꾸어 나가야 할까보다.

충동에 못이겨 일을 저지르고 그 일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잠도 깊이 못잘때가 많다. 오늘도 자다 깨니 새벽 세시다. 가끔 이런 나에게 내가 묻는다. '넌 왜 밤낮 그러냐?' 내가 나에게 나도 모르게 대답한다. '그래도 재밌잖아 ?!!!...'

맞다. 그래도 재미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담은 지기 전까지만 무겁고 막상 지면 언제나 감당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신 모양이다. 쉽고 가벼울 뿐만 아니라 재미있다. 재미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기쁨이 있다.

그냥 팔자려니 (기독교 신앙에 팔자는 없지만) 생각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할 까보다.>

‘내 팔자’라는 글을 올리고 난 후 지난 주 높은 뜻 푸른 교회에서 평광교회에서 한 설교를 다시 하였습니다. 물론 원고는 다르지만 내용은 같은 설교였습니다. 본문도 같았고 제목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2)’로 하였습니다.

설교 중에 제 설교를 매주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하여 고정적으로 듣는 사람이 5만 명 정도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해외나 지방을 가면 자기를 제 설교의 매니아라고, 제 팬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설교를 듣고 북한돕기를 위하여 헌금에 참여한 사람의 수가 366명에 불과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매니아와 팬들은 다 어디갔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열 문둥병자를 고쳐 주었을 때 돌아와 감사했던 문둥병 환자는 한 명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좀 섭섭하셨던지 ‘나머지 아홉은 어디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저도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물었습니다. 제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 1%도 안되는 사람만이 설교에 반응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라디오에 나오는 학원 광고 중에 ‘상위 3%’라는 카피를 가지고 광고하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상위 1%가 되기 위하여 그렇게들 욕심을 가지고 노력들을 하는데 믿음에 관하여는, 하나님께 관하여서는 그렇게들 욕심이 없다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설교의 본문은 마태복음 14장 13절에서 21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높은 뜻 푸른 교회 주보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3절에서 21절의 말씀을 적다가 실수를 하여 마태복음 13장 14절에서 21절의 말씀을 인쇄하였습니다. 14장 13절을 생각하면서 13장 14절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실수가 절묘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4절 이하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4-16)

이 말씀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듣고 깨달으면 무엇인가를 고치고 바꾸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담스러워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들은 귀는 들음으로 눈은 봄으로 복이 된다는 것을 저들은 모른다.>

이 말씀이 굉장히 충동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양심을 찔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제가 쓴 글 ‘내 팔자’라는 글에서 쓴 글 <깨달음은 감동을, 감동은 충동을, 충동은 행동을, 행동은 부담을, 부담은 기쁨을....>이 마음에 와 닿았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말씀을 부담스러워 했던 것과 세상 상위 1%는 욕심내면서도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상위 1%는 욕심내지 못했던 것을 뉘우치는 마음으로 부담을 부인하고 은행으로 가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체를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통하여 부신 피리를 소리를 듣고 춤추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피리를 부시면 드디어 춤추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미친 듯이 춤을 추어대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정말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 꼬?’ 그것은 딴 세대와 딴 사람들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평광교회와 평광교회 교인 즉 너희들을 무엇으로 비유할 꼬?’하시는 말씀입니다. ‘매주일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어떤 사람이라고 설명할 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늘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마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사람 같아 보여, 내가 아무리 슬퍼해도 너희들은 가슴도 치지 않는 사람 같아 보여.>

저는 우리 평광교회와 그리고 평광교회 교인 여러분들이 솔직히 조금 답답합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많이 답답합니다. 답답함만 생각하면 내가 구태어 주일날 여기까지 와서 주제넘게 매주일 설교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냥 우리 교회로, 특히 우리 교회 청년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겁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 평광교회와 평광교인들에게도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가능성을 아이티 구제헌금에서 보았습니다. 아이티 구제헌금은 우리 평광교회 교인들이 제일 잘 한 것 같습니다. 비록 목표한 일 억 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여러분들이 하신 7천 여 만 원의 헌금은 잘 하신 것입니다. 아주 잘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공부하는 것이 힘들다고 공부를 부담 없이 하면 낙제생이 됩니다. 일하는 것이 힘들고 부담스럽다고 적당히 하고 게을리 하면 낙오자가 됩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우리들에게 예수 믿는 것이 쉽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좁은 길이라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만 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 은혜 하면서 예수를 너무 쉽게 부담 없이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냥 적당히 교회만 다니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다보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사람이 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예수님이 슬퍼하셔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조금 힘들어도, 부담스러워도 귀를 막지 말고, 눈을 감지 말고, 마음을 닫지 말고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어도 점점 길이 넓어지고, 짐이 가벼워지기 시작할 겁니다. 하나님께서 좁은 길도 능히 갈 수 있는, 십자가도 능히 질 수 있는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피리를 부시면 춤을 추고, 예수님이 마음 아파하시면 함께 가슴을 치며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웃고, 예수님과 함께 울고 살다보면 우리의 삶의 자리가 천국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실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동거하는 곳이 곧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피리를 부시면 춤을 추고, 예수님이 마음 아파하시면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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