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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선의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 (마 7: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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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 (마 7:7~11)
 

초대의 기독교 교부 중에 한 분이신 크리스 스톰이라고 하는 분은 기도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기도는 노여워하는 사자에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난세를 정복시켜 고요하게 하고, 전쟁을 종결시키며, 폭풍우를 달래고, 마귀를 내어 쫓으며, 사망의 결박을 풀고, 질병을 완쾌시키고, 협잡꾼을 내쫓고, 도시들을 파멸에서 구출하며, 태양을 멈추게 하고, 천둥의 진행을 막는다.” 얼마나 놀라운 기도의 능력을 선언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것은 특별한 분에게만 그렇게 해당되는 것이지, 그리고 오히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 도리어 주눅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로 기도 자체가 이런 능력을 바라는 것일까? 이것은 저에게도 똑같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보면 때로는 우리 신앙에 삶이 위축이 됩니다. 그리고 기도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엄청난 힘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기도하는 것, 능력을 받는 것,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지향된 것! 그러면서 기도를 점점 더 멀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기도를 멀리하게 되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가장 중요한 특권을 잃어버리게 되고 맙니다. 

스폴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 없는 영혼은 마치 그리스도 없는 영혼과도 같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기도란 결코 의무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는 특권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엄격한 회교국에 가면 기도시간이 되면 사이렌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사이렌이 나면 어디 있든지 자기가 하던 모든 일들을 다 내려놓고 메카를 향해서 절하며 경배해야합니다. 이를 하지 않으면 종교경찰이 붙잡아다가 치리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 자체가 법 위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될 때 기도는 형식이 되고 기도는 무거운 짐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기독교인들조차도 기도를 이와 같이 짐이라고 생각하고 형식 속에 이 기도를 가두어 두는 경향도 있습니다. 기도를 마치 지겨운 노동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기도시간을 때울 수가 있을까?’ 그렇게 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지은 죄가 많기 때문에 기도를 2~3분 가지고는 되지 않고 더 많은 기도를 해야 된다고 한편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10분 기도하면 10분 기도의 복이, 1시간을 기도하면 1시간의 기도의 복이 주어진다고 내게 주어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기도하는 것 자체가 더 많이 하고 더 열심히 하면 그 기도가 공적처럼 쌓아지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적을 보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한다는 사람들조차 있습니다. 마치 노동자가 대가를 바라고 그 노동시간을 늘리듯이 우리의 기도시간을 늘리면 하나님께서 기도의 대가를 우리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런 사고는 금식기도를 하고 있을 때에 더욱 증폭이 됩니다. 

여러분, 금식기도란 귀한 것입니다. 일년에 한번정도 금식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주 귀한 신앙의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기도 할 때, 조심해야할 것은 금식기도 하면서 하나님과 단식투쟁을 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오늘 하루 금식했습니다. 제 고통 아시죠? 하나님, 오늘 2일째입니다. 이런데도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드디어 3일째가 됐습니다. 하나님.’ 그러면서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 자체가 업적이 되고 기도자체가 공로가 되고 기도 자체가 큰 짐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그 이유는 우리의 성품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기도를 오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단지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수가 있는 것이지 우리의 기도에 능력이 많아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란 의무가 아니라 권리입니다. 

기도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모든 사람에게 주는 최대의 선물이 바로 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탄이 제일 좋아합니다. 

사무엘 채드윅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탄은 기도하지 않는 연구, 기도하지 않는 노력, 기도하지 않는 경건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탄은 우리의 수고를 비웃고 우리의 지혜를 조롱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는 두려워 떤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기도는 결코 짐이 아니라,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려야할 특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기도하지 않고 기도를 무거운 짐처럼 생각할까요?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세 가지 단어를 반복하셨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이 세 가지 말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종종 우리에게는 어떤 느낌이 다가오냐면 진정한 기도란 반복 되어야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다. 이 반복되는 우리의 기도 속에 어떤 하나님의 대한 예를 갖고 있느냐면,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는 분이 아니라 멀리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반복해야 하나님이 겨우 우리의 기도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나님은 너무 멀리 있어서 우리가 소리쳐야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듣고 가까이 다가오신다고 생각하면서 반복해하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데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씀해주십니다. 하늘이란 어디입니까? 시공간을 초월하는 우리의 삶의 세계 전체가 하늘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저 구름 위에 창공으로 올라가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 남산 위에 올라가야 하나님과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가정주부가 집에서 살림을 하는 그 자리가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장소입니다. 

직장에서 수고하고 땀 흘리는 그 자리가 바로 “주님!” 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내 옆에 오셔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바로 그런 장소이기도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란 멀리 있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 된 우리가 언제, 어느 순간에 어느 곳에서도 할 수 있는 삶의 자리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신 분, 특별한 장소에서만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 하고 부르면 가까이 오시는 그 분이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정작 어느 교회에 가보면 기도를 할 때, 특별히 통성 기도를 할 때. “주여~” 하고 삼창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기도 해보셨습니까? 이 기도가 때로는 마음을 모으기 위해서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여~” 삼창을 해야지 기도가 시작이 되고 “주여~” 삼창을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생각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일수가 있습니다. 마치 반복해 하나님이 듣고 그 하나님에 대한 삼창을 해야 하나님이 겨우 귀를 기울이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공로를 쌓아야하고 수고와 애씀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왜 바울은 세 번 기도했을까요? 바울은 사탄의 가시를 자기에 몸에서 빼어달라고 세 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왜 세 번 기도할까요?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제자들은 옆에 다 비켜놓고 겟세마네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기도합니다. 이런 점에서 반복 자체가 나뿐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를 얼마나 자주 반복합니까? 그러나 반복해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뜻이지, 필요하면 반복해야합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것, 예수님이 기도한 그 세 번에 기도 속에는 이 분들의 절절한 그들의 소원이 들어가져 있습니다. 다만 반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간절한 원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만 내 모든 기도의 소원을 드리겠다고 하는 그 작정이 세 번 반복되는 그 속에 들어가져 있습니다. 반복해야합니다. 그러나 반복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침부터 점심까지 저녁까지, 때로는 하루에서 1달까지 아니 1년 내내 아니 1년, 2년, 3년까지도 반복해야할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 그 자체 때문에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 선지자간에 기도 대결이 있습니다. 이때 “누가 섬기는 신이 진짜 신인가 우리 한번 대결해 보자!” 하고 갈멜산에 같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알의 이름을 외기 시작합니다. 마치 주문처럼 외웠습니다. 그래도 안 들으니까 자기 몸을 학대합니다. “우리를 좀 보세요, 우리가 이렇게 고통스럽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절하게 기도하고 있으니 바알 신이여 보소서!” 그렇게 기도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열왕기상 18장 36절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약속의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내가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 하나님인 것을 믿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오늘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옵소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신 사건이 나타나게 됩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고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보면 바울적인 표현으로 바꿔서 얘기한다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삶 전체를 그 속에 뛰어 들어라! 그것이 너의 삶 내용이 되도록 하여라!” 

마틴 루터는 기도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숨쉬지 않고 사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우리의 호흡이 끝나면 그 순간에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의 모습이 끝나게 되면 영적 생명이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라고 지적을 해줍니다. 여러분, 육체적인 생명이 호흡하는 것이 힘들어지면 육체에 질병이 걸린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이 짐이 되고 기도하는 것이 귀찮아지고 기도하는 것이 이것이 내게 구속이 되면 우리의 영적인 생명에 병이 든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가 짐이 되십니까? 아니면 기도하시는 것이 즐겁습니까? 기도하시는 것이 권리입니까? 아니면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되고 있습니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능력을 오늘 우리의 삶에 현장에 받아드리는 하나님의 복에 통로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까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부모에게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줄 부모가 도대체 있느냐? 부모에게 생선을 달라고 하면 뱀을 줄 부모가 있겠느냐? 세상에 악한 부모라도 자식이 그렇게 요구 할 땐 더 좋은 것으로 주는 것이 세상에 부모들의 심정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구할 때에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게 우리 주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얘기하면 자녀가 돌을 달라고 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떡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뱀을 달라고 하면 오히려 생선을 주시는 그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알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또 이렇게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필요를 잘 아신다고 한다면 뭘 굳이 세세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겠는가? 뭘 그렇게 열심히 나가서 기도하는가? 그냥 하나님이 다 주시는 것 받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어거스틴이 이런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더라도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가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내가 받은 이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깨닫기를 원하신다.”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 자녀들을 키우시지 않습니까? 자녀들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자녀들에게 무엇을 주어여 할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 엄마! 나 이게 필요해.” 그렇게 얘기할 때, 기쁨으로 주는 것이 우리 부모님들 아닙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도 들어보기를 좋아한다. 그쪽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다시 한번 얘기 듣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사랑은 주고자 하는 것도 요청 받기를 원한다. 내가 주고 싶습니다. 다 모든 것을 주고 싶어도 한번쯤 요청 받고 주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면서 그 사랑 때문에 주시는 하나님보다는 그 주는 것 자체에 대해서 너무 많은 관심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금은보화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하나님 자취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의 욕망을 위한 심부름꾼으로만 전략시켜 버리는 경우가 우리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갓난 어린 아이가 집에서 놀다가 값비싼 도자기에 속에 있는 동전 한입을 발견했습니다. 갓난아이는 계속 손을 집어넣어 가지고 동전을 집었습니다. 그냥 들어갈 때는 잘 들어갔는데 동전을 꽉 집으니까 이것을 빼려고 하니까 빼어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앙 울어댔습니다. 엄마가 놀래서 와서 보니까 값비싼 도자기 속에 손이 들어갔는데 도무지 빠지지가 않아요. “얘야! 빼라!” 하고 아무리 빼도 빠지지가 않아요. 여러분, 우리 어머님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할 수 없이 그 값비싼 도자기를 깨버렸습니다. 그래서 보았더니 동전 한입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 값비싼 도자기를 다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동전 한입. 그것이 내게는 가장 큰 것 같아서 그것 하나 꽉 붙잡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값비싼 도자기를 아예 포기해 버리고 그냥 그 동전 한입에 연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연인이 내게 다이아몬드를 가져다주면 먼저 뭘 보시겠습니까? 다이아몬드를 보시겠지요? 그 다음에는 무엇을 보시겠습니까? 이 다이아몬드를 선물해 준 사랑하는 사람을 쳐다봐야 합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만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도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간구를 풍성하게 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저는 새벽마다 우리 성도님들과 시편을 읽어 나가면서 시편 131편에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게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시인이 갖고 있는 평안히 젖 뗀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안긴 것 같은 평안함을 갖고 있다.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잘 이해가 안돼서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나 같으면 ‘젖 먹는 아기가 엄마 품에 있는 것 같이 편안하다.’ 그렇게 썼을 텐데, 시인은 그렇게 쓰지 않고 ‘젖을 뗀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있는 것 같이 평안하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젖 먹는 어린아이는 젖과 엄마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젖을 달라고 하면 엄마가 함께 있어야 하고 엄마가 없으면 젖도 함께 없어집니다. 그런데 젖을 뗀 아이는 뭘까요? 비록 젖이 없어도 엄마만 있으면 젖이 저절로 생기고 그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내가 모든 것을 주겠다. 내가 모든 선물을 내게 주겠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으앙 하고 울어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은 젖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 그것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얻게 되는 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살면서 고통스러웠던 것이 하나있었는데 배고픈 민족을 보면서 오병이어로 그들의 배를 부르게 해주셨을 때, 민중들은 오병이어의 떡만 보고 생선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면서 계속해서 예수님의 향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때 요한복음 6장 26절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는 것은 표적을 본 때문이 아니고 너희가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오병이어로만 만족하느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하여 알지 못하느냐?”고 민중들에게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십니까? 뭘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오병이어 그거 달라고 기도하십니까? 괜찮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기도는 마치 어린아이가 동전 한입 때문에 그 값비싼 도자기를 깨뜨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이 축복을 우리가 다 상실할 수가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신다.” 이것은 누가복음을 보면 11장에는 성령을 주시는 것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성령에는 두 가지 사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확인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또 한 가지가 있는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마지막 최고의 선물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하나님 그 자체이십니다. 이것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짐이 되지 않고 기도가 기쁨이 되고 기도가 감사가 되고 기도가 우리의 믿음의 사람들의 특권이 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수가 있을까요? 존 채프만 이라고 하는 사람이 기도를 잘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도의 유일한 길은 하나가 있는데 그냥 기도하는 것이다.” 여러분, 기도를 크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지 말고 그냥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계신 나의 하나님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나왔나이다.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위대한 기도는 내가 위대하게 된 사람이 기도하는 기도가 아니라 내가 기도드리는 나의 하나님께서 위대하신 분임을 믿고 기도드리는 사람들이 위대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다시금 시작하셔야 합니다. 기도는 짐이 아닙니다. 기도는 의무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려야 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기도가 우리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누려야할 복과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순간순간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 된 기도의 특권을 누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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