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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 (출 40:9~13, 요일 2: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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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 (출 40:9~13, 요일 2:27~28)


섭씨 20도 정도의 실온에서 액체 상태이며, 물에 녹지 않는 유성(油性)을 기름이라고 합니다. 기름은 동물, 식물, 광물에서 얻을 수 있으며 물에 섞이지 않는 가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름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우선 식용 기름이 있고, 공업용 기름이 있습니다. 맛을 내는 기름이 있고, 향기를 내는 기름이 있고, 윤활작용을 하는 기름이 있고, 열을 내는 기름이 있습니다. 기름은 인간역사에서 인간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미쳤으며 문화와 삶의 질의 변화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먹는 식용기름만 하더라도 참기름, 들기름, 유채꽃 기름, 포도씨 기름, 해바라기씨 기름 등 다양합니다. 그리고 기름마다 용도가 다르다고 합니다. 콩기름은 볶음요리에 적당합니다. 올리브기름 가운데 엑스트라 버진은 열을 가하지 않는 요리에 적당합니다. 퓨어 올리브기름은 부침이나 볶음에 적당합니다. 포도씨 기름은 튀김이나 구이 등 고온 요리에 적당합니다. 
  
기름마다 맛이 다르고 냄새가 다릅니다. 올리브기름이 좋다고 하지만 비빔밥에 올리브기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는 빵을 먹을 때 올리브기름에 찍어 먹습니다. 빵을 먹을 때 들기름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맛과 기능이 각각인 것이 기름입니다. 
  
탈무드에는 향유나 기름 등은 미덕을 논할 때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좋은 기름은 아래쪽으로 흐르지만 선행으로 얻어진 명성은 위로 올라간다.’ ‘기름은 부자만이 살 수 있으나 선행은 가난한 자도 베풀 수 있다’ 등의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기름은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름이 나쁜 의미는 없습니다. 
  
기름은 고대사회에서는 중요한 약재였습니다. 야고보서 5:14에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합니다. ‘기름을 바르며’라는 말은 영어로 ‘anoint him with oil’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냥 기름을 발라 놓은 것이 아니라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거룩하게 되면 모든 병이 낫게 됩니다. 
  
요한일서 2:20에는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고 합니다. 2:27에는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름 부음은 성령의 임재를 가리킵니다. 성령이 교사이며,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레위기 3:16에는 “모든 기름을 여호와의 것이니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여호와의 기름으로 부음을 받아 거룩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40:9에는 “또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고 합니다. 관유는 성전의 기물을 성별하거나 제사장의 위임식 때에만 사용하는 거룩한 기름입니다. 10절에는 번제단과 모든 기구 발라 거룩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제단이 지극히 거룩하리라”고 하십니다. 성전의 제단이 거룩하게 될 수 있는 조건은 관유 즉 기름을 발라야 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외에 제단이 거룩하게 되는 법이 없습니다. 
  
민수기 7:1에는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성막의 모든 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면 거룩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기름을 바르면 거룩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거룩함이란 특이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것은 특별한 것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기물이지만 하나님께 드린 것은 거룩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물건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모습이지만 다르게 사용되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거룩한 것이며 동시에 속된 것입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성속’(聖俗)의 개념입니다. 원래는 성속의 구분이 없이 중립적인 것을 성과 속으로 만듭니다. ‘묵상주의자들은 간혹 성과 속의 이분법에 빠지는 우를 범한다’고 합니다. 어떤 것을 보면 ‘이것은 성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속된 것이다’라고 합니다. 묵상주의자들은 이렇게 구별한다는 말입니다. 
  
돈을 생각해 보세요. 돈은 거룩하지도 속되지도 않은 중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려지고, 잘 사용하게 되면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고 잘못 사용하면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우리의 몸도 생각해 보세요. 몸은 잘 사용하게 되면 거룩한 산 제물입니다. 그러나 잘못 사용하게 되면 육체의 병기가 됩니다. 음욕의 재물이 됩니다. 성전의 기구들은 원래 거룩한 것은 아니지만 성전에 바치는 순간 거룩한 물건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기름 붓다’ 혹은 ‘세례주다’(Baptism)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어의 ‘거룩하다’는 말은 ‘카데쉬’입니다. 이 말은 ‘잘라서 떼어놓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어원은 ‘베어내다’라는 의미를 가진 고대어에서 왔습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구별되는 것이며, 탁월하고 비범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는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합니다. 왜 쪼개었습니까? 거룩하게 하시려고 쪼개었습니다. 쪼개는 것은 잘라놓아 거룩하게 하는 예식입니다. 
  
창세기 17:11에는 할례의 명령이 나옵니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고 하십니다. 왜 포피를 베어야 합니까? 거룩하게 하시려고 베어내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4장에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아들 게르솜을 데려다가 포피를 베어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26절에는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룩하게 하실 때에 놓아주시고, 거룩하게 되었다고 확인하십니다. 
  
어떤 신학자는 “거룩함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독특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거룩함과 동격으로 비유할 만한 개념이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거룩함이 없습니다. 세상적인 것이 거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구들을 따로 떼어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의 도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도구들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터전의 도구들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동차가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돈이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그릇들이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집도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두가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보세요. 다섯 처녀는 등에 기름을 채우고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고 있었습니다. 다른 다섯 처녀는 등은 있었지만 기름을 채우지 않고 졸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신랑이 왔을 때 기름을 채운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기름을 채우지 못한 처녀들은 기름을 사러간 사이에 신랑이 와서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기름을 부어 채우면 거룩한 등이 됩니다. 신랑을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기름을 채우지 아니하면 거룩함이 없습니다. 기름을 채운 등이 있어야 신랑의 초대를 받고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거룩한 옷을 입고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40:13에는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옷에 기름을 부어 옷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름을 부어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거룩하면 그 사람의 옷도 거룩합니다. 옷이 아무리 깨끗해도 사람이 깨끗하지 못하면 옷이 사람을 깨끗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12절에는 먼저 ‘물로 씻기고’라고 합니다. 육체의 정결을 위할 뿐만 아니라, 육체의 정결을 통한 영적 정결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에베소서 5:26에는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거룩하게 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물로 씻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13절에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고 하십니다. 제사장은 성소의 기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거룩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은 성소에 속한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거룩해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거룩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거룩하게 사는 비결은 세상과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항상 세상의 것들을 베어내어 합니다. 항상 쪼개어 없이해야 합니다.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4-15절에는 “아론의 아들들도 데려다가 그 아버지에게 기름을 부음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라고 합니다. 그 후손들과 아버지와 같이 거룩해야 합니다. 내 부모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내가 거룩해야 합니다. 나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내 자녀가 거룩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과 다윗은 사무엘이 직접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했습니다. 솔로몬은 제사장 사독이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하나님이 세워주신 사람이라는 의미와 그 직책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옛날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에서는 실제 ‘성유식’(聖油式)이 있었습니다.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라고 했는데 여호와의 것이 아닌 기름을 부었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아닌 불이 저주인 것처럼 여호와의 것이 아닌 기름도 오히려 저주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향유는 아주 비싼 기름이었고 여인들이 갖고 싶어 하는 소중한 기름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비싼 기름을 부어 그리스도의 장사를 거룩하게 했습니다. 죽음이나 장사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름을 붓는 것은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룩하게 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기름은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룩하게 만들고, 거룩한 것을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리가 물에 빠지지 않고 물 위에 떠는 이유는 날개 밑에서 기름이 나와 온 몸에 기름기가 있게 하여 물에 부력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실험하는 것을 보니 오리를 샴푸로 몸을 깨끗이 씻어놓으니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습니다. 로리 베스 존스의 ‘청바지를 입은 예수’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오리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누가 오리를 죽였습니까? 수의사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잘 돌보지 않아 죽었습니다. 날개 밑에서 나오는 방수 기름을 온 몸 발라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죽은 것입니다. 자신의 몸에 기름을 바르지 않은 것은 자살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기름을 발라야 세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기름을 부어야 거룩하게 됩니다. 기름부음을 받아야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만났던 스랍은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날개로는 날며,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는 날았습니다. 발을 가리었다는 것은 몸에 가장 더러운 부분을 가리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부분을 가리어야 합니다. 날마다 더러운 곳을 가리세요.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세요. 
  
성 베네딕투스는 영적인 활동과 세속적인 활동 간의 인위적인 담을 허물기 위해 베네딕투스수도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기도는 노동이며, 노동은 기도이다”라고 늘 말했습니다. 우리의 세속적 삶이 영적인 삶이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삶에 기름을 부어야 합니다. 가장 세속적인 것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으십니까? 거룩하게 사십시오. 가정에서 배우자에게 신실하십시오. 직장에서 상사와 동료에게 성실하십시오. 이웃에게 친절하십시오. 사회에서 규범적 삶을 사십시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살면서 삶을 즐기십시오. 말과 행동을 일치되게 하십시오.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거룩하게 되어야 거룩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18:50에는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라고 합니다. 내 기름이 후손에게까지 부어져야 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후손이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시편 105:15에는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고 합니다. 기름부음은 삶의 안전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삶이 안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보호하십니다. 

  
결론 

바닷가 암벽해안에 등대지기가 있었습니다. 이 등대지기는 한 달에 한번 기름을 배달 받아 등대불을 간수합니다. 동네에서 가깝기에 동네 사람들이 놀러오곤 하는 등대였습니다. 한 번은 어떤 여자가 와서 집의 난방 기름이 떨어졌으니 기름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등대지기는 기름을 조금 주었습니다. 한 번은 어느 아버지가 와서 등잔불 기름이 모자라니 기름을 좀 달라고 해서 등대지기는 또 기름을 조금 주었습니다. 등대지기는 잘 아는 동네 사람들이 와서 기름을 달라는 대로 조금씩 주었습니다. 그런데 월말이 되자 기름이 떨어졌고 등대는 불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등대불이 꺼지자 몇 척의 배가 해안에서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상부에서는 등대지기를 이렇게 질책하였습니다. “당신에게 기름이 공급된 것은 한 가지 이유 즉 등대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소”. 
  
시편 89:20에는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거룩한 기름을 부어 그리스도인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것은 세상을 밝히라고, 등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기름은 다른 어떤 것에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밝히는 것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은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외면하고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밝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온 몸에 거룩함이 넘치고, 세상에 물들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며,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삶을 사는 여호와의 기름 부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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