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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범사에 유익한 경건 (딤전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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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유익한 경건 (딤전 4:6~8)


(딤전4:6-8)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1.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04km 서북쪽에 위치한 해안 도시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로마 주둔군대의 한 장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하여 온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유대 회당에 나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가난한 유대인들을 많이 구제하며,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들을 멸시하던 유대인들도 인정하고 칭찬할 만큼 많은 유대인들을 구제하고 개인 기도실을 마련하여 시간을 정해놓고 항상 기도하던, 그야말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오후 3시쯤 되어 기도하는 중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고넬료야!’ 하고 부르자 그는 천사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예, 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기도와 구제하는 일을 다 알고 기억하시느니라.’ 이는 고넬료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그의 기도와 구제 행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 이방인이지만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말씀이었습니다.(행10:1-4) 

고넬료와 같이 경건하여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경건”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 세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해주는 범사에 유익한 신앙생활입니다.’ 


2. “경건”이란 무엇보다 먼저, 진실함을 뜻합니다. 거짓과 가식(假飾)이나 외식(外飾)이 없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1:26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이고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경건은 사실인즉 경건이 아니라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눅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의 결론으로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못하고 그가 멸시하는 세리의 기도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하여” 라는 말에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교만을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서서 기도했다.”는 사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영혼의 기도가 아니라 세끼 밥을 먹듯이 습관에 매인 형식적 기도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리와 “따로”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은 ‘세리’와는 달리 스스로 경건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외식적인 행위입니다. 또한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다며 자랑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신에게는 불의가 전혀 없으며 오직 깨끗함, 경건 그 자체임을 자랑했습니다. 더욱이 금식하는 자신의 경건생활과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까지도 자랑했습니다. 

이처럼 바리새인은 십일조를 철저히 지킨 것을 내세우며 하나님께 보답을 요구하는 듯한 자세를 드러내므로 십일조가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요 자기는 청지기에 불과함을 고백하는 행위임(마 25:14-30)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를 드러냈습니다. 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자신이 죄인 중의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가슴을 치며’ 즉, 마음을 치는 깊은 참회와 애통함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기도로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동시에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간구했습니다. 경건은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진실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경건의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경건한 사람인 것입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경건을 외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경건에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영광을 들어내고 자신의 명예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건은 자기가 자신의 경건을 나팔 부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얻는 칭찬에 목적을 두며 자기만족에 목적을 두는 경건이기 때문에 외식된 경건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자기 상을 이미 다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은 ‘금생과 내생에 축복의 약속’이 없습니다. 가식과 외식에 빠진 바리새인의 경건은 ‘헛 경건’입니다. 가식과 외식으로 가득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께서 ‘화’가 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23:25-28)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옛날에 경건한 사람들은 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길을 걸어 다니다가 나무에 이마를 부딪혀 피를 흘리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마에 피가 흐르는 사람을 보면 경건한 사람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말을 듣고 싶어하던 바리새인들이 아예 집에서 나올 때부터 자신의 이마를 벽에 찧어 피를 흘리며 나왔다고 합니다. 그들의 경건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약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경건한 생활을 위해 ‘금식’을 행하지만 그러한 금식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냐며 참된 경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슥7: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동안 해마다 5월과 7월에 금식을 해 왔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의 모습은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금식 자체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을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경건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엄숙하고 절제된 예배를 70년 동안 드렸다 해도, 또 금식과 금욕으로 절제된 생활을 70년 동안 했다 할지라도, 또 평생 교회밖에 모르는 생활을 해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이 그 안에 없다면 다 무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경건의 뜻을 스가랴 8:16-17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슥8:16-17)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진실이 곧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진실을 말하며, 너희 가정과 직장에서 진실하고 거짓을 행치 말 것이며,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하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될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비방하거나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미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은 무엇입니까? 

경건은 위로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아래로 사람들 앞에 진실함입니다. 진실이 사라졌습니다. 온갖 거짓이 난무합니다. 비방과 욕설과 시기와 질투가 사회 곳곳에 만연한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혀를 재갈먹여’ 언어생활에 진실해야 참된 경건을 이루게 됩니다. 

야고보서 1:26에서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혀에 재갈을 먹여야 합니다. 진실한 경건 생활은 입의 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말로 자신의 의를 선전하고 자기 선행을 나팔 불면 이런 경건은 혀에서 나오는 경건이지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신앙에서 나오는 경건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에 진실이 있습니다. 그 혀에 재갈을 먹인다는 말은 쉬 분내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약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혀에 재갈을 먹인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하므로 실수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약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전 10:14)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신후사를 알게 할 자가 누구이냐 
경건은 자기를 스스로 자랑하므로 그 자랑이 헛된 대로 돌아가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가정에서 진실해야 경건한 가정이 됩니다. 스가랴를 소개할 때,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로 말합니다.(슥1:1) 이 세 사람의 이름의 뜻은 ‘주께서 기억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며’, ‘적절한 시기에’ 등인데, 이를 다시 정리하면, ‘주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기억하사 적절한 시기에 축복하실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항상 진실한 생활로 참된 경건한 자손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억하사 적절한 시기에 축복하시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경건, 즉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한 형제가 된 교회의 고아나 과부, 즉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보지 못한 척 외면하는 사람은 경건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 말씀, 신명기 15:5-7을 보겠습니다. 

(신15:7-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네 주변에 가난한 이웃이 도움을 요청하게 되면, 모든 재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자신은 그 재물에 대한 청지기임을 인정하고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구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채 자신의 재물을 움켜쥐는 완악하고 인색하게 굴지 말고 그들이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베풀어 주라는 것입니다. 

또한 ‘악념’을 품지 말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년’이라는 제도를 두셨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사업에 실패도 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 가난하게 되어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되면 분배받은 땅이나 기타 부동산을 처분하기도 합니다. 더 어렵게 되어 부채 상환이 불가하게 되면 심지어 아내나 자식을 노예로 넘기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벌어진 일들이지만 그러한 경우를 대비해서 ‘희년’ 제도를 두신 것입니다. 모든 부채는 그 부채가 발생한 시점을 기준으로 제 7년째가 되면 이유 조건이나 계약 사항을 불문하고 전액 무상으로 돌려주는 제도입니다. 부채로 인해 넘어간 모든 부동산이나 노예로 팔려간 사람을 일체 원 상태로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채로 인해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희년’, 즉 면제년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 그때까지 참으라면서 도움을 베풀지 아니하는 것이 바로 ‘악념’을 품는 행위로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 앞에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 어떠한 때에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요구에 아낌없이 널리 손을 펴서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 여호와께서 범사에 형통하며 풍성한 기업의 복을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실로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 이 땅 위에는 항상 고통과 가난이 상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점은 예수님께서도 친히 증거하신 사실입니다.

(마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십니다.

(시 9: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때문에 하나님은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는 자를 역시 듣지 아니하시고 외면하십니다. 

(잠 21:13)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잠 28:2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본 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잠 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경건하여 많은 사람을 구제한 고넬료처럼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사람에게 윤택해지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잠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경건한 구제가 되도록 나팔을 불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여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마 6:2-4)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4. 마지막으로, 경건의 표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모세가 레위 지파에 대해 축복을 선언할 때, 신명기 33:8-9에서,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고 했습니다. ‘둠밈’(Thummim)은 ‘온전함’을, 그리고 ‘우림’(Urim)은 ‘빛’을 뜻합니다. 이는 레위 지파의 대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할 때 사용하는 ‘판결의 흉패’입니다. 

역사와 인생을 판결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역사와 인생을 온전하게, 그리고 의로운 빛으로 판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인생은 그 삶의 옳고 그름이 심판받습니다. 인류 역사 역시 하나님 말씀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고 말한 배경에는 그 다음 9절 말씀에 있습니다.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32장 사건을 두고 행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시내산에 올라간 지 40일이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모세를 대신하여 자기 백성들을 이끌어 줄 신(神)으로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셔서 모세를 하산케 하여 그 실상을 보게 됩니다. 모세가 우상숭배하는 가증스런 백성들의 모습에 분노를 참지 못해 십계명 판을 던져버리고 누구든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우상숭배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과 우상숭배에 가담했을지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위해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 때 모세 앞으로 나온 사람들이 바로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허리에 칼을 차고, 진의 이 문에서 저 문을 오가며, 저마다 자기의 친척과 친구와 이웃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여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하나님의 명대로 우상숭배에 가담했던 자들로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칼로 죽였는데 어림잡아 삼천 명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사건을 매듭지으면서 모세가 말합니다. “오늘 너희가 저마다 자기 자녀와 형제자매를 희생시켜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였으니,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이를 두고 또한 “(신33:9)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는 말씀으로 받은 바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따라 자기 부모, 자녀, 형제자매는 물론 이웃 형제들까지 칼로 도륙해버렸는데, 이러한 레위 지파의 행동이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 일로, 그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생명처럼 소중이 여긴 것으로 간주되어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레위 지파를 두고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고 한 것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하나님 말씀을 가장 우선하는 사람, 하나님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는 사람을 ‘경건한 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모두가 원망 불평하며 하나님을 시험할 때, 믿음을 가지고 그에 동조하지 아니한 사람, 자신의 골육지친보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우선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되 금생과 내세에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벧후 2:5-9)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를 영역(英譯, NIV)을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Your Thummim and Urim belong to the man you favored.)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흔적을 마음에 새겨 경건한 생활에 힘쓰는 사순절을 맞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며 호감을 가지고 사랑하시는 경건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어 금생과 내생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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