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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하는 집으로 (막 1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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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집으로 (막 11:15~19) 


모든 것에 때가 있고 또한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면서 시도 때도 모르는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한 겨울에 개나리가 피는 것은 이젠 일도 아닙니다. 한 여름에나 먹을 수 있었던 여름 과일조차도 이젠 한 겨울에도 먹을 수 있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이젠 임산부들이 무엇이 먹고 싶다고 하면 돈이 없다면 모를까 구하지 못할 것이 없을 정도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비단 우리나라에서 나는 과일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지도 않는 그런 과일까지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싱가폴을 갔을 때 참으로 신기한 과일을 보았습니다. 껍질은 상당히 두껍습니다. 

그런데 껍질을 둘로 쪼개고 그 속을 꺼내보면 아주 얇은 막으로 쌓여있는데 그렇게 말랑말랑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참으로 달콤한 것이 맛이 기가 막힙니다. 하지만 외국 사람들은 쉽게 이것을 입에 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냄새가 너무 지독하기 때문입니다. 두리안이라고 불리는 이 과일은 과일 중의 황제라고도 할 만큼 맛은 기가 막히지만 마치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와 있는 듯이 느껴질 정도로 냄새가 지독합니다. 색깔까지도 누런 것이 똑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한 입 베어 물어보면 어쩜 맛이 그렇게 좋은지. 그런데 그 과일을 이제는 국내서도 주문해서 먹을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냄새만 가지고 판단했다가는 그 맛난 것을 먹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이제는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자동차 국가 중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자동차는 참으로 편리한 이동수단입니다. 예전에는 오토바이를 즐겨 타던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자동차를 탈 형편이 되지를 못해서 그랬기도 했지만 어쨌든 일찍이 운전면허를 획득한 덕택으로 오토바이를 쉽게 배워서 타고 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오토바이를 탄다고 하지만 막상 오토바이에 올라타면 그 달리는 기분이 참으로 좋습니다. 물론 지금의 폭주족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달리는 기분 하나는 자동차 저리가라입니다. 

근데 문제는 이 오토바이라고 하는 것이 사고가 났다 하면 아주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오토바이를 가리켜 과부틀이라고까지 했겠습니까? 그건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주간 두 분 여집사님들께서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들이받혀서 병원에 입원하고 계십니다만 세계적으로도 교통 사고율과 사망률이 제일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잘못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그 본연의 목적에 맞도록 잘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론 달려 보고픈 유혹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달려보면 참으로 스트레스가 다 없어지는 듯한 기분도 듭니다. 그래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도 무한질주가 가능한 그런 도로가 좀 생겼으면 좋겠어요. 달리고 싶은 사람 그 도로에서 마음껏 달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 대신 사고 났다 하면 그 책임은 스스로 지기로 하고요. 마치 비보호 좌회전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호기심에 한 두 번은 달릴지 몰라도 과연 그렇게 죽기 살기로 달릴 사람 결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중세의 성인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참회록”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포도원 가까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 밤, 우리 꼬마 악당들은 배를 훔치러 나갔다. 금단의 열매의 쾌락을 충분히 즐길 만큼 우리는 실컷 먹었다. 
그런 다음 우리의 입을 위해서가 아니라 돼지들에게 던져주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배를 따 담았다. 사실 맛 좋은 배였지만 불쌍한 내 영혼이 탐낸 것은 배가 아니었다. 

배라면 집에도 더 좋은 것이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그냥 도둑이 되기 위해 배를 몰래 땄던 것이다. 도둑질을 금지하는 것 때문에 훔치고 싶은 마음이 더 발동했던 것이다.” 
인간의 죄성을 이처럼 정확히 집어낸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선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에게는 죄에서 구해줄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분을 만났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신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성전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곳은 이방인의 뜰입니다. 유대인 남녀와 이방인들까지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장사가 허락된 곳은 아닙니다. 한데 그곳에 매매하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그건 오직 대세장과 결탁이 되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제사장의 허락이 없이 누가 감히 성전까지 들어와서 매매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엄격하게 금지하셨던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방인의 뜰까지는 괜찮다고 하면서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그래도 성전에 예배하러 온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갈 때 누구나 성전세로 보통 1 세겔을 내도록 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제 성전을 수리하는데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성전에 더러운 돈이 들어올 수 없다고 해서 시중에 유통되는 세겔은 안 된다고 하고는 성전 안에서만 사용되는 세겔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전에서 통용되는 세겔로 바꾸어서 드려야 하는데 1세겔이니 당연히 일대일로 바꾸어주면 되는데 거기에 수수료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전에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순례객들이 직접 끌고 온 제물들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고 거부를 하고 반드시 성전에서 팔고 있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사서 그것으로 드려야 한다고 강요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장사꾼의 이익에 대해 일정분의 수수료를 대제사장이 받아서 챙겼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성전에서 제물로 팔고 있는 동물들이 제물로는 도저히 드릴 수 없는 그런 흠 있는 제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를 단호하게 배격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입니까? 강도는 말 그대로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허락도 받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기분은 상관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이건 아주 대놓고 내놓으라고 합니다.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주로 돈을 빼앗습니다. 아니면 귀중품을 노리기도 합니다. 심하면 목숨까지도 빼앗습니다. 말 안 들으면 죽여 버린다고 협박도 합니다. 실제로 총칼을 들이밀기도 합니다. 

문제는 교회 안의 강도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아주 온화합니다. 다 상대방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섬기는 사람만 같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고 돈을 바꾸어주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역시 자기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례객들을 위해서 자기들이 그런 수고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멀리서 제물을 끌고 오다 보면 힘도 들고 상하기도 하고 할 텐데 그러다보면 처음에는 좋은 제물이었는지 몰라도 성전에 올 때쯤이면 그 가치도 떨어져버리는데 차라리 편리하게 돈만 가지고 와서 성전에서 파는 소나 양을 사서 제물로 드리면 편리하기도 하고 불합격될 것도 없으니 이게 다 순례객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합니다.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름대로는 헌신적입니다. 아주 열심도 있습니다. 뛰어난 일꾼입니다. 그런데 아쉽다면 모든 것이 자기 위주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마음 상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래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구 짜증을 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릴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근본적으로 빼앗아가는 것은 바로 기쁨으로 예배드리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또 그걸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 악한 마귀입니다. 그래서 꼭 예배드리러 오다가 문제가 생기고 다툼이 생기고 마음이 상하게 되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일주일 내내 잘 지내다가 하필 꼭 예배 1시간 앞두고 그것도 별 것도 아닌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근본적으로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그게 뭡니까? 강도당한 것입니다. 기쁨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감사를 빼앗겼습니다. 매사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말씀에 은혜 받고 아멘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매사에 문제점만 찾아내려고 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자칫 시비하고 원망하는 것처럼 들려져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화평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평안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모든 일들, 생각이나 말 행동 하나에 이르기까지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불편해진다면 그것이 이미 강도당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엘리야가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따라 기도하였더니 그 땅에 삼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아합왕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수배령을 내립니다. 그래 그릿 시냇가에 숨어 지내면서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시냇물을 마시면서 여섯 달을 지냅니다. 마침내 시냇물이 말라버리자 사르밧 여인에게로 보내 살게 하십니다. 하지만 삼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아합에게로 보내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하게 하고 그래서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을 승리로 장식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저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더니 삼년 반 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그 빗속을 마차보다도 앞서 달릴 정도로 엘리야 선지자가 은혜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게 은혜롭고 능력으로 가득했던 엘리야 선지자가 누군가가 전해주는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라고 하는 이세벨의 말을 듣고는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아니 그 넘치던 은혜가 다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아니 지금까지와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지난 삼년 반 동안 아합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찾았었습니다. 지금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찾는다고 한들 그냥 그 상황이 이어질 뿐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힘이 빠져버립니까? 왜 차라리 하나님 나를 죽여주세요 이젠 고만할랍니다 하는 겁니까? 이세벨이 네 생명을 거두려고 마음먹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을 통해서 당연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없다고 생각을 하니 그만 마음이 상하고 말았습니다. 삼년 반 동안 숨어 지낸 것도 지긋지긋했는데 또다시 도망가서 숨어 지내라고 나 못해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하나님 나 좀 데려가 주세요. 이렇듯 남이 전해주는 이야기로 인해서 내 마음이 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군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한다고 한 얘기지만 듣는 사람이 마음 상할 수도 있는 얘기라면 삼가야 됩니다. 또 말을 듣는 내 태도 내 반응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매사에 선생님처럼 건건이 훈계를 하고 교훈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결국은 그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 할지언정 수고하는 일꾼의 입에 망을 씌우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을 수군거리고 서로 다투는 곳이 아닌 기도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성전이 바로 이와 같이 기도하는 곳이요 전도를 위한 전진기지가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중보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염려하고 판단하고 비판할 시간이 있다면 그럴 시간에 하나님께서 기도하십시오. 

하지만 기도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그냥 스쳐지나가듯 들려진 한 마디에 마음이 상하고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상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기도해야 합니다. 안 좋은 모습이 보이거든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안 좋은 이야기가 들려지거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또 기도하면 됩니다. 마음이 상하도록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기회로 삼으면 됩니다. 그냥 사소한 말을 주고받다가 마음 상하곤 했다면 마음이 상하는 그 순간 먼저 기도하십시오. 

누가 나를 비판한다고 해서 마주 비판하려고 하지 말고 오래 참으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면 비판들을 만한 일도 더 은혜로운 일로 비판받을만한 태도도 칭찬받을만한 모습으로 바뀌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더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매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동일하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매 우리가 형통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합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하여금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도의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깨어 기도하기가 전여 쉽지가 않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주님 말씀하시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주님 말씀처럼 육신이 약해서 입니까? 아니에요. 육신이 약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약한 것입니다. 내 스스로 내 생각의 노예가 되고 만 것입니다. 나는 이래서 힘들다 몸이 피곤하다 쉬어야 된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힘이 되시고 하나님이 능력이 되시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면 이야기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나는 약하고 피곤하고 힘들고 아프고 내가 감당하기에는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까? 그게 기도하지 못하도록 하는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더 기도하는 것입니다. 뒤로 미루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목숨 걸고 기도하리라 다짐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주의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져 주면서 일어나 먹으라고 합니다. 보았더니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이 놓여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천사가 다시 와서 또 다시 어루만져 줍니다. 일어나 먹고 힘을 내라고 합니다. 

그래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은혜의 떡을 이미 주셨습니다. 먹으면 힘을 얻습니다. 건강하게 됩니다. 뭐 때문에 후유증이 있다고요? 하나님 그 후유증은 개나 소나 다 가져가라고 하세요 하나님이 아미 나를 다 만져주셨는데 후유증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깨끗합니다. 건강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나를 만져주세요. 하나님이 나를 어루만져 주시니 고맙습니다. 주의 천사를 보내주셔서 마사지 해주셔서 오늘도 상쾌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상쾌해집니다. 처음에는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게만 느껴지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짓말처럼 사라집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나는 이미 다 나았다. 나는 상쾌해졌다. 이 일이 참으로 재미있다. 힘이 넘친다. 주님이 나의 능력이시다. 그래서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와야 합니다. 결코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사흘 일주일 한 달만 계속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고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기회를 기도하고 예배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기회를 삼아나가시길 축원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그런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게 될까봐서? 하지만 나를 낮추면 더 높아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한번 밀리면 끝이라는 생각 그게 어리석은 것이요 악한 마귀의 전략입니다. 그래서 죽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남의 옷가지를 훔치면 우리는 그를 도둑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발가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줄 수 있음에도 마다하는 사람도 똑같이 불러야 옳지 않겠습니까?

‘찬장에 들어 있는 밥은 배고픈 사람의 몫입니다.’
‘입지 않고 옷장 안에 걸어 놓은 외투는 외투가 필요한 사람의 것입니다.’
‘신장에서 곰팡이 슬고 있는 신발은 신발이 없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리고 욕심으로 쌓아 놓은 돈은 가난한 사람의 것입니다.’
세상은 홀로 살 수 없습니다. 사람처럼 연약한 존재는 없습니다. 짐승들은 길어야 1년 안에 독립하고, 스스로 삶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철저히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하고, 이웃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철저히 함께 가야 합니다. 사람은 홀로 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따라서 우리들은 주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연약한 사람을 향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혼자 5000명의 양식을 먹을 때, 지금도 굶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직 많은 사람이 허기진 배를 움키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공은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부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강철왕 케네디는 “다른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부유할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성공은 모든 사람이 함께 부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많은 것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이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먼저 기도의 승리자들 되시기를 바라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다 되시면 우리의 신세는 하루아침에 바뀌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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