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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롭고 순결하라 (마 10: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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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고 순결하라 (마 10:16~23)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그토록 춥기만 하던 날씨가 많이 포근해졌습니다. 입춘이 지난지도 보름이 넘었으니 봄이 돌아오긴 돌아오려나 봅니다. 일찍이 남궁억 선생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하나님 주신 동산/봄 돌아와 밭갈 때니/사방에 일꾼을 부르네./곧 이 날에 일 가려고/그 누가 대답을 할까./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강산 위해/하나님 명령 받았으니/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농부들은 머지않아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도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새 봄이 오면 삼천리강산에 복음의 씨를 뿌리도록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밭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씨로 비유하여 교훈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씨를 뿌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추수에 비유하시면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다”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다”고 하신 주님께서는 탄식만 하지 않으시고, 열두 제자를 추수 꾼으로 불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며 세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파송 교훈을 주셨는데, 1)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고 2)가면서 전파하라고 하셨으며 3)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고 4)의식주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5)어느 집에 가서든지 평안을 빌라고 하셨고 6)전도자를 환대하는 가정은 평안이 있을 것이라 하셨으며 7)복음을 거부하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도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주신 교훈입니다. 

1.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16절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양 같은 제자들이 이리 같은 악인들이 득실대는 세상에서 자신을 보존하고 세상을 이기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으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뱀은 간교한 사단의 상징 같은 동물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곳에서 뱀은 마귀로 상징이 되어 있습니다만, 구리 뱀은 예수님으로 상징 된 곳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뱀의 지혜를 예로 든 것은, 사단처럼 교활하게 행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뱀은 일반적인 뱀을 가리킵니다. 뱀은 통찰력이나 기민함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뱀의 경계성과 조심성은 속담이 될 정도입니다. 뱀은  언제든지 소리 없이 움직이고 몸을 숨기는 습성이 있는 반면, 적을 만나면 신중한 분별력이 있어 자기가 처한 위험 속에서 능란하고 아주 신속하게 빠져 나가는 기민하고 민첩한 동물로서, 뱀에게는 생명 보존의 지혜가 어느 동물 보다 뛰어 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헨드릭슨은 “나의 이 말이나 이 행동이 결국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 내 장래에, 내 이웃의 장래에, 하나님의 영광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것이 그 문제를 취급하는 최선의 방법인가? 아니면 더 좋은 방법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가장 진지하고 정직한 추구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험악한 세상을 헤치고 살아가려면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철장 권세도 아니고, 왕 같고 제사장 같은 권세도 아닌, 순결을 이리 떼가 득실거리는 세상을 사는 비결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비둘기는 노아 홍수 때 방주에 들어갔던 정결한 새요, 또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새입니다. 그래서 비둘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로 드려진 유일한 새였습니다. 따라서 비둘기는 순결한 성도의 상징입니다. 성령님도 비둘기 형상으로 비유합니다. 또한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지만 순결하다 보니 미련하여 쉽게 속아 넘어가는 동물로도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신 것은, 죄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순전성을 유지할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도 죄와는 추호도 타협하지 않고, 그 거룩하심을 유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와 타협하면 세상의 동류는 될 수 있어도, 복음의 승리자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불의와 죄의 미혹에 빠져 타락한 자들이 많습니다. 순진하기는 하지만 지혜가 부족하면, 어리석음과 무지로 이단사술에 속아 넘어 가기 십상입니다. 또한 지혜롭기는 하지만 순결함을 잃으면 교활하게 됨으로 타락하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꼭 이 지혜와 순결 두 가지 덕을 겸전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17-18절에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많은 박해자들과 직면하게 될 것을 예고해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제자들은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 채찍질 당하기도 하고,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끌려가 재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선교해야 될 대상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본성적으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저마다 개나 돼지나 소나 닭 때문에 속상하고 고통당하는 경우보다는, 사람 때문에 속상하고 고통스럽고 손해 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광야 40년동안 모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리나 전갈이나 뱀 때문에 위기를 겪고 고통을 당했던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때문에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겪은 것은 수를 셀 수 없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의 형이었던 아론과 누이였던 미리암이 그를 비방하고 괴롭혔습니다. 고라와 그의 일당들이 그를 괴롭히고 반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도 때도 없이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모세를 괴롭혔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그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동족이며 선민인 유대인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디모데후서 4:14절 이하를 보면 의도적으로 바울을 괴롭힌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였습니다. 구리 세공업자인 알렉산더는 바울을 대적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장점을 덮어두고 단점을 들추는데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대하여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리시니”라고 했고, “너도 저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바울의 목회 일생동안 크나큰 가시였습니다. 

40여년을 목회하다가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이 쓰신 글 속에 <조심해야 될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그분이 밝힌 조심해야 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첫째 말이 많은 사람. 둘째, 앞에서 칭찬하고 뒤에서 흉보는 사람. 셋째, 매사를 반대만 하는 부정적인 사람. 넷째, 성직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람. 다섯째, 의도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사람. 여섯째,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일곱째, 성직을 감투로 생각하는 사람. 여덟째 남을 대접하지 않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사람. 아홉째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열째 말로만 큰소리 치고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때문에 성공하고 행복해 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람 때문에 고통당하고 실패하고 손해보고 길이 막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을 사귀고 교제하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같은 신자를 사귀는 일에도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가 좋다고 아무나 사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귀하다고 아무나 만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노처녀가 결혼이 급하다고 아무나 배우자로 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남’은 그 사람의 평생을 결정합니다. 그러기에 선택과 결정은 신중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재치’와 ‘만남’이라는 두 친구가 똑같이 ‘사랑’이라는 처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접근 방법은 달랐습니다. ‘재치’군은 현관에서 소녀의 부모를 만나 열심히 자기를 소개하고 집안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남’군은 뒷문에서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구혼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결혼에 성공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성공비결은 세상 사람들이 사람 만나고 타협하고 로비하고 있을 때, 은밀한 곳에서 먼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천번 만번 만나도 유익될 것이 없는 사람, 예수 믿고 경건생활 하는데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면 그 만남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3.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9-20절에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박해자들이 제자들을 공회에 넘겨주어 옥에 갇히게 하고, 회당에서 채찍질을 당하고 총독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는 일들이 있을 때에라도, 그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면,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후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게 되었을 때, 성령께서는 놀라운 지혜의 말씀을 주셔서 박해자들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위협하면서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역공할 때에, 공회원들은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신자들을 몹시도 박해하던 황제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버리라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로마 황제의 여러 가지 회유책은 실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에 저주와조소를 퍼부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목수가 아니냐? 그 자가 인간을 위해서 어떤 구속의 사역을 할 수 있단 말이냐?” 하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으며 “나사렛 예수 그 자는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단 말이냐?”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이 무명의 그리스도인은 대답하기를 “예 페하, 나사렛 예수는 지금 폐하를 위해서 폐하의 관을 짜고 계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튿날 날이 밝기 전에 그 황제는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6.25 당시 공산당에게 체포되었을 때 공산당원이 “천당 봤나?”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성 목사님은 “천당 본점은 못 봤어도 지점은 봤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공산당원은 “그 지점이 어떻게 생겼소?”라고 물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지점은 내 마음이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공산당원은 “예수쟁이 말 잘한다.”라고 하면서 석방해 주었다고 합니다. ‘예수 천당!’을 외치고 다니던 최봉석 목사님은 어느 날 평양 시내 서문통 거리에서 찬송을 부르며 전도하는데 교통순경이 “왜 밤낮 떠들고 야단이냐?” 하며 전도를 제지하려 했습니다. 

이때 최목사님은 “나만 떠듭니까? 자동차들도 떠들고 있지 않소?”하며 맞장구 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교통순경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동차들은 사람들을 치지 않으려고 경적 소리를 내는 것 아닙니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최 목사님은 “나는 사람들 지옥가지 말라고 경적을 울리는 것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일본 순경도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자들 앞에 끌려갔을 때에, 성령께서는 그들의 입에 대적들이 감히 변박할 수 없는 놀라운 말씀을 친히 주신 사례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할 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뜨거운 구령의 열정만 있다고 하면, 그 때 그 때 성령께서 가장 적합한 말씀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의 지혜나 짧은 지식을 의지하지도 말고, 우리의 경험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성령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4.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21-22절에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핍박과 수모를 끝까지 견디는 성도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인내는 모든 덕의 어머니라고 세상의 현자들도 입을 모아 증거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인내는 신앙 행위의 기반이요, 힘이요 신앙의 열매를 얻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내력이 없는 사람은 끝까지 주님을 섬길 수도 충성할 수도 영생에 참예할 수도 없습니다. 

마가 요한처럼 처음에는 선교 여행에 동참했지만, 중도에 포기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주님을 배신하게 되고, 데마처럼 핍박이 가해질 때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참고 인내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다가 신앙을 포기한다든지 주님을 떠나버린다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물론 참고 견디는 그 고통은 클 것입니다. 아픔도 크고 외로움도 클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인내가 요청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을 참으셨던 것처럼,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빌 하이벨스의 목사님의 책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에서 포기하는 순간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달리기 선수가 “그만, 이제는 못가. 한 발자국도 더 못가” 하는 것은, 육체적 포기의 순간입니다. 마감 시간에 사장이 들어와 또 업무를 맡깁니다. “됐어. 이젠 더 이상 못 참아. 당장 사표 써서 책상에 던져버릴 거야!” 이것은 직장 포기의 순간입니다. 인격을 지키려 분투노력하는데 세상은 까딱 않고 사람들은 놀려댑니다. “나만 애쓸 까닭이 어디 있어? 남들처럼 일반적인 도덕 수준에 맞추어 살아야지 뭐” 이것은 도덕적인 포기의 순간입니다. 

신앙인도 포기의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옳은 데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알지만, 실패를 겪고 모멸을 받으면 “하나님, 더는 못갑니다. 제 분수에 넘는 것을 요구하시는군요. 마음대로 하세요.” 이것은 영적 포기의 순간입니다. 그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이르는 고통을 겪으시는 과정마다 사단의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포기해, 그만 둬. 이런 고통당할 필요가 없잖아!” 못이 손을 뚫고 지나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순간, “포기하겠다.” 주님의 영혼이 그렇게 말하려 하시지 않았을까요? 주님은 그 순간을 넘기시고 우리의 구원을 가능케 하셨으며, 온 인류에게 새로운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내와 비전은 주님의 위대한 선물입니다. 성도 여러분! 때때로 만나는 어려운 일들 속에서 주님 생각하며 인내와 비전을 품으십시오.>  

어떤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결혼한 지 8년, 남편은 지금 회사가 부도나서 도망중이라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오늘은 법원에서 집달관이 다녀갔다. 아이들은 창피하다고 학교 못 다니겠다며 방안에만 있다. 오늘따라 친정 엄마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무작정 친정으로 갔다. “엄마, 나 너무 힘들어!” 엄마는 갑자기 부엌으로 가서 냄비 세 개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는 첫 번째 냄비에는 당근을 넣고, 두 번째 냄비에는 달걀을 넣고, 세 번째 냄비에는 커피를 넣었다. 그리고는 끓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불을 끄고 엄마가 내게 말했다. “이 세 가지 물건이 다 역경에 처하게 되었단다. 끓는 물이 바로 그 역경이지. 그렇지만 세 물질은 각기 다르게 반응했단다. 

당근은 단단하고 강하고 단호했지. 그런데 끓는 물과 만난 다음에는 부드러워지고 약해졌어. 달걀은 연약했단다. 껍데기는 너무 얇아서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보호하지 못했지. 그렇지만 끓는 물을 견디어내면서 그 안이 단단해졌지. 그런데 커피는 독특했어. 커피는 끓는 물에 들어간 다음에 물을 변화시켜 버린 거야.”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힘드니? 이런 상황에서 너는 당근이니, 달걀이니, 커피니?”> 여러분은 끓는 물과 같은 인생의 역경을 만났을 때, 당근이 되겠습니까? 달걀이 되겠습니까? 커피가 되겠습니까?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제자 파송 교훈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며, 불신자들이나 부정적인 신자와 같은 사람들을 삼가고, 복음을 전파할 때 어떻게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도와주심만을 의지하고, 신앙생활 끝까지 참고 인내하여, 영생 구원을 얻는 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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