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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라! (왕상 18: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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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라! (왕상 18:30~40) 
 

1. 자신을 진단하라!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즉 성도는 자신의 믿음과 삶을 스스로 診斷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시간 여러분들도 자신을 한 번 診斷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건강합니까? 여러분의 예배, 여러분의 기도생활, 여러분의 찬송생활, 여러분의 전도생활, 여러분이 다른 성도들과 나누는 거룩한 교제 등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십니까? 스스로 만족할 만 하십니까? 여러분들의 自家診斷을 돕기 위하여 ‘기도생활’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기도하지 않으면, 두란노>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고 잠잤던 베드로의 경우를 통해 그 단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 베드로가 자다가 눈을 번쩍 떠보니, 주위에 칼과 몽치를 든 사람들과 횃불을 든 사람들이 둘러서 있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키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 이때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칼을 뽑아서 순식간에 앞에 있는 사람의 귀를 쳤습니다(마26:51).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충동적인 행동을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적이며, 본능적인 행동을 합니다. 언어생활도 충동적입니다.” 이런 경우만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치명적인 병이 대개 그렇듯이, 처음에는 自覺症勢가 없지만 나중에는 아주 치명적인 삶의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첫째, 삶이 무계획해 집니다. 마치 설계도 없이 건축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믿음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셋째, 은혜가 없어집니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얻고 누리는 것들이 더러 있으나,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로 받을 수 없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김동호 목사).” 

만약 지금 여러분의 말과 행동이 충동적이고, 삶이 엉망으로 뒤틀려 있는 것 같고, 믿음이 식은 것 같고, 주님의 은혜가 사라진 것 같다면, 여러분의 신앙과 삶 전체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이스라엘 백성 역시 신앙과 삶, 그리고 국가 전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2. 무너진 祭壇, 여호와의 役事 不在

1) 엘리야 시대

엘리야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제 7대 왕인 아합 왕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아합 왕은 무난한 인격과 함께 재치가 넘치는 사람으로서 왕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났었다고 역사가들은 전합니다. 그러나 그는 北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가장 욕을 많이 얻어먹는 왕인데, 그 이유는 그가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진노 속으로 몰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 북쪽의 강대국이었던 페니키아와 시돈과 국교를 맺고,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왕후로 맞았습니다. 그것은 政治外交的인 목적이었지요. 그러나 시돈 왕 ‘엣바알’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엣바알’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제사장을 겸한 왕으로서, 그가 자신의 딸 이세벨을 아합에게 시집보낸 것은 이세벨을 통하여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보급시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여러분 혹시 “39년 안에 프랑스는 ‘이슬람 공화국’이 될 것이다. 네덜란드는 15년 안에 무슬림이 인구의 반을 차지할 것이다. 독일은 2050년 ‘무슬림 국가’가 될 것이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 말은 최근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서 조회 수가 1000만 건을 넘어서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동영상 <무슬림의 인구 통계(Muslim Demographics)>의 내용입니다. 

기존 유럽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과는 달리, 유럽에 들어간 이슬람 사람들이 그 네다섯 배로 出産함으로서 “이슬람은 유럽에서 칼, 총, 폭탄, 테러 없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슬람권은 현재 정책적으로 이 일을 진행하면서 物心兩面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왜 이 말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아합은 政治外交的인 목적으로 시돈 공주 이세벨과 결혼했지만, 시돈은 ‘바알-아세라 敎’ 보급을 위하여 이세벨을 이스라엘로 시집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세벨은 시집올 때, 바알 신상과 아세라 목상을 가지고 왔고, 남편 아합으로 하여금 그 우상을 섬기도록 했으며, 후에는 신하와 온 국민들에게까지 우상숭배를 강요했습니다(왕상 16:31~33).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바알-아세라 교 세상이 되었고, 온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김으로서 크게 犯罪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북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고, 그 결과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지 않는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엘리야가 선지자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죄인 줄 모르고, 하나님의 징벌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이 징벌임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 주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2) 祭壇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役事도 사라지고 …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너무나 유명한, 엘리야가 바알-아세라 숭배자 850 명과 ‘世紀의 宗敎 對決’을 펼친 이야기입니다. 이 대결은 엘리야의 제안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자신의 말이 아니면 ‘이스라엘 땅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리라’고 예언한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追殺 命令이 떨어져 도망자가 되었던 엘리야가 공개적으로 우상 숭배자들에게 대결을 신청한 것이죠. 대결의 내용은 ‘모월 모일에 갈멜 산에 제단을 차려놓고 그 제단 위 祭物에 불을 내리는 신이 참 신이라는 것을 立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공개적인 신앙대결 제안, 즉 ‘참 신 가리기’ 제안에 우상 숭배자들은 참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제안을 거절했다가는 자기 신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가짜라는 것을 보여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결은 엘리야에게도 목숨을 건 대결이었습니다. 지명수배가 된 도망자였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기도 하지만, 자칫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지 않는다면 아합이나 이세벨의 칼보다 백성들에게 먼저 맞아 죽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기의 종교 대결은 성사 되었고, 이 興味津津한 대결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熱狂했습니다. 

갈멜산 頂上에서 아합 왕을 비롯한 삼부요인들과 백성들, 그리고 종교 대결의 당사자인 엘리야와 850인의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이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엘리야는 대결의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각각 송아지 한 마리씩을 희생 제물로 준비하자(23 상). 둘째, 제물을 장만하여 제단 위에 올려놓되 불을 붙여서는 안 된다(23 하). 셋째, 제물을 제단에 올려놓은 후 각자의 방식으로 예배하자(24 상).넷째, 그렇게 예배하여 제물에 불을 내려 태우는 신을 참 신으로 인정하자(24 하).” 이러한 대결 원칙에 합의한 양측은 각자의 예배 방식에 따라 대결에 임했습니다. 

➀ 바알-아스다롯 측의 先攻

드디어 ‘갈멜산 결투’가 시작되었고, 先攻은 바알-아세라 측에서 먼저 했습니다. 사실 이 대결은 엘리야로서는 굉장히 불리한 대결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숫자상으로 엘리야가 불리했는데요, ‘850대 1’이라는 것이 가당찮기나 합니까? 거기다가 왕과 신료들과 대부분의 백성들이 다 그들 편이었습니다. 둘째는 제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희생 제물의 선택권을 그들이 먼저 가짐으로서 더 좋은 제물을 고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엘리야가 불리했습니다. 셋째로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은 장소의 우선권을 가졌습니다. 이스르엘 골짜기 남부 평원 위에 우뚝 서 있어 그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었던 갈멜 산에는 오래전부터 바알 신당이 있었기 때문에, 웃기는 얘기입니다만, 장소적으로 엘리야가 불리할 수 있었습니다. 

넷째로,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은 시간의 우선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낮까지(26절)”, “오정(27절)”을 지나,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29절)”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다섯째,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은 대결 방법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졌습니다. 엘리야가 “불로 응답하는 신이 하나님이니라”(24절)라고 했는데요, 이 역시 그들에게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 바알은 ‘번개의 신’으로서 번개와 불을 주관하는 신이었기 때문에, 불로 응답하시는 신이 참 신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바알-아세라 숭배자들은 이렇게 유리한 조건 하에서 먼저 굿판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들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는 응답이 없었습니다. 제물을 올리고 기도를 했는데도 응답이 없자, 그들은 제단 주위를 뛰놀기 시작했습니다(26). 여러분, 여기 이 ‘뛰놀았다’는 말은 아주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 무당들이 껑충껑충 뛰면서 춤추듯이 그렇게 자기 신을 불렀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송한 말입니다만, 이 말은 ‘절뚝거린다’는 뜻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인지 흉내낼 수는 없습니다만, 자기 신이 응답하지 않으니까, 그 신의 視線을 끌기 위해 어떤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해도 그들의 신 바알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오전 내내 이런 짓을 하는 그들을 지켜보던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했습니다(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역사가들은 엘리야가 말 수가 적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또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엘리야가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의 이 미친 짓을 참을 수 없어서 참다못해 몇 마디 했습니다. 첫째로 엘리야는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알이 잠시 밖으로 나들이를 갔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사람처럼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보느라고 應答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비아냥거림이었습니다. 두 가지 일을 못하는 신이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알이 “멀리 여행을 떠났다<표준새번역>”고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즉 바알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다른 곳에 가면 그 장소에는 있을 수 없는 제한되고 불가능이 많은 신이라는 조롱입니다. 세 번째는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였습니다. 자기 백성의 고달픈 현실에 무관심한 게으른 왕처럼 바알도 그렇게 부르짖는 자기 숭배자들에게 무관심한 게으른 신이 아니냐 하는 비꼼의 말이었습니다. 

이런 엘리야의 조롱을 들은 바알 선지자들은 더 간절하게, 절실하게 매달렸습니다. 그들은 “…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했으며(28),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미친 듯이 떠들었습니다(29).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처음부터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가 없었는데(26 상), 마지막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29).” 

자신들에게 유리한 장소에서, 거의 하루라고 하는 많은 시간에, 왕과 신하들을 비롯한 응원단까지 갖춘 그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제 몸에 상처까지 내면서, 미친 듯이 울부짖고 춤을 추어도, 심지어 자신들의 神을 협박하기까지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지요! 우상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사실 우상이라는 것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결국 바알-아세라 숭배자들이 하다하다 안 되서 제풀에 지쳐 쓰러질 즈음에 엘리야가 일어섰습니다.

➁ 엘리야의 攻擊

➊ 가까이 나아오라! 

엘리야는 구경하는 백성들 앞에 서서 먼저 그들에게 외쳤습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라(30).” 여러분, 엘리야가 대결 당사자인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에게 외쳐야 하는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치고 있을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바알-아세라 숭배자들, 그것을 이스라엘로 가지고 들어와 오염시킨 왕후 이세벨,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그렇게 엉망으로 만든 아합 왕이 엘리야가 싸울 대상인 것 같으나, 사실 엘리야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을 향해서 엘리야가 외친 것이죠.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 제사하려는 ‘제단으로 더 가까이로 오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말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상태와 연관된 말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예배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는 뜻이었지요. 그들은 두 종교, 두 신앙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알을 비롯한 세상 신들과 하나님 사이를 오락가락한 이유는 양쪽 다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 싶어서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좋은 것을 얻고, 또 세상 신들로부터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엘리야는 21절에서 외쳤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여기서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한다(21)”는 이 말씀을 <공동번역성경>은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라고 재미있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먼저 “가까이 오라”, 즉 ‘하나님 편으로 오라’고 외친 것입니다.

➋ 제단을 수축하라! 

백성들을 가까이 오게 한 다음, 엘리야는 허물어져있던 여호와의 단을 고쳐 쌓았습니다. 아합 왕이 허물어버린 옛 갈멜산 여호와의 제단이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 앞에서 그 제단을 다시 쌓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의도적인 행동입니다.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이 하루 종일 굿판을 벌이고 있을 때, 처음에는 볼만 하지 하루 종일 구경하는 것도 피곤합니다. 그래서 그 중간 중간에 쉬엄쉬엄 제단을 보수했으면 시간도 벌고 심심함도 달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제대로 갖추어진 제단이 있고 그 제단 위에서 제물을 올려야 응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제단이 허술하고 무너졌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왜 이러한 행동을 하고 있을까요? 

엘리야는 제단을 쌓는 이 일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단’이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입니다. 따라서 제단이 무너졌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멈추었다는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배가 없어진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통치까지 부정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제단을 수축하라”는 말은 번제를 드리기 위해 제단을 고친다는 뜻도 되지만,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예배가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여러분, ‘예배 회복’은 단순히 ‘예배에 참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 회복의 중요성은 갈멜 산 여호와의 제단이 무너짐으로 이스라엘에는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제단이 무너진 이스라엘이 국민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형통하고 부강하게 되었습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까? 일들이 술술 잘 풀렸습니까? 갈멜 산 여호와 제단이 무너진 그때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심판은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기근이 너무나 심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7장에는 요셉 시대 애굽에 7년 동안 기근이 들었을 때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근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애굽 사람들은 처음에는 가진 돈으로 곡식을 샀는데, 그 돈도 금방 바닥이 났습니다(15). 그 다음에는 모든 짐승을 팔아서 양식을 구했습니다(17).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자신들의 토지를 팔아 양식을 구했습니다(18~20).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자신들의 몸까지 내놓고 곡식을 사야 했습니다. 모두 바로의 노예가 된 것이죠. 이것이 기근의 혹독함입니다. 그러니 3년 6개월 동안의 기근은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즉 제단이 무너졌다는 것, 예배와 기도가 멈추었다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을 진단해 보셨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신앙과 삶에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까? 만약 이상이 있고,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개인과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분열과 아픔과 상처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우울과 열등감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은 여러분 개인과 가정에 하나님의 제단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할 일은 무엇입니까?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수축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엘리야처럼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더 심각한 상태로 떨어질 수 있다는 엘리야의 경고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➌ 물을 부어라! 

다음으로 엘리야는 제단 둘레에 도랑을 만들고, 제단 위에 나무를 쌓은 다음, 희생제물인 송아지의 각을 떠서 제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엘리야는 지켜보고 있던 백성들에게 하나의 요구를 했습니다. 물통 네 개를 내놓더니 그 통에 물을 채워 제단에 부으라는 것이었습니다(32,33).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지금 갈멜 산의 대결은 하늘에서 불을 떨어지게 하는 것인데, 물기를 닦아내고 드라이기로 말려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물을 부으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이스라엘에는 지난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모든 물이 다 말라버렸는데 어디에서 물을 구해다가 부으라는 것입니까? 그것도 산꼭대기에서 말이죠.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백성들은 엘리야의 말에 따라 물을 갖다 부었습니다. 그것도 네 개의 통으로 세 번씩, 도합 12통의 물을 부어 제단을 흥건히 적셨습니다(35).

이 물은 도대체 어디에서 난 것일까요? 어떤 학자들은 근처에 우물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고, 어떤 학자들은 멀리 바다까지 내려가서 물을 떠온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이 물을 사람들이 산에 오르면서 마시려고 가지고 온 물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임금인 아합까지도 물을 구하기 위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는 상황, 강이나 우물도 다 말라버린 판국에 산꼭대기에 있는 우물에는 물이 있어 거기서 12통이나 되는 물을 길었다는 것, 아니면 백성들이 바다까지 내려가서 물을 길어 왔다는 것 등, 오늘 우리로서는 그 물을 어디에서 구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2통이나 되는 엄청나게 많은 물을 제단에 부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엘리야가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후, 드디어 엘리야가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36,37).”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 참 신이시고, 자신이 그 하나님의 종인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며,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대로 행하는 분, 듣지 못하고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엘리야의 이 짧고 분명한 기도 끝에 하나님을 불을 내리셔서 제물을 태웠습니다(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그렇게 흥건하던 물이 물기 하나 없이 완전히 바짝 마르도록 강력한 여호와의 불이 임한 것입니다. 

3) 제단을 다시 쌓고 예배를 회복했더니 …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39절,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39).” 이제야 백성들은 깨달았습니다. 미친 듯이 울부짖고, 몸부림치고, 칼로 제 몸을 상하게 해도 응답하지 않는 바알이나 아세라는 그 백성의 간구에 응답하지 않는 신, 죽은 신, 아니 없는 신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그렇게 처절하게 부르짖는 우상숭배자들, 자신들이 그렇게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외면하고 버린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 ‘참 신’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자신들도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3. 기도의 회복, 예배 회복이 우선!

말씀을 맺겠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하용조 목사님의 글을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던 베드로가 얼마나 충동적이며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을 했는지…. 하용조 목사님의 글은 다음과 같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기도는 기적을 준비합니다. 기도는 기적을 잉태합니다. 기도는 기적을 낳습니다. … 기적은 … 기도한 자에게 일어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불이 내려서 제물을 태웠듯이, 기도해야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고, 기도해야 성령의 불이 임하고, 기도해야 하나님을 뜻을 알고 크고 작은 비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 것,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모든 사람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그 능력이 하나님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의 사명입니다. 

엘리야 시대보다 더 많은 신들과 그 숭배자들이 활개 치면서 온 세상과 사람들을 깊고 깊은 어둠으로 몰아가는 바로 이 시대야말로,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 것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는 것이 여러분을 통하여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그 능력이 하나님과 그 영광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눈물 뿌려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놀라운 능력이 여러분을 통하여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엘리야가 제단을 쌓고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렸듯이 
성령의 불이 내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갈멜 산 사건 이후 이스라엘에 단비가 내려 메말랐던 땅을 적셨듯이, 
여러분에게도 은혜의 단비가 내릴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기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에 여러분의 전부를 거시기 바랍니다. 이제 가뭄의 때는 지나갔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장맛비처럼 임하게 될 때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불, 은혜의 단비를 기도와 예배의 회복을 통하여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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