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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에 이르는 길 (롬 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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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는 길 (롬 10:8~13)


시작하는 말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을 기억하고 하루 하루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지내는 40일간의 절기를 말합니다. 이 속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먼저 우리가 구원의 확신 속에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본문으로 우리가 구원 얻는 길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면서 나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고자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구원’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이 말의 뜻과 의미를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의미는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다양한 정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구원이란 말이 뜻하는 바가 복잡하고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구원’이란 말은 구원할 救에 도울 援자로 그 의미가‘건져 낸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내고, 죄에 빠져 있는 사람을 건져 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를 갖는 말이 나중에는‘해방시킨다’혹은‘자유케 한다’라는 의미로 발전되었습니다. 또 이것이 기독교에서 사용할 때는 영적인 의미를 가지면서 죄에서 건져 내고 죄에서 해방시킨다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습니다(롬 8:2).

인간은 죄로 인하여 여러 가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고 삽니다. 죄로 인하여 인간은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죽음의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롬 5:12). 그러나 천하 인간들 가운데는 이 죄로 인한 사망에서 건져 낼 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란 이름 그 자체가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 의하면 구원이란 죄와 그로 인한 형벌에서 구해 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정의할 때 몇 가지로 구분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구제 차원입니다. 둘째는 인간성 회복의 차원입니다. 셋째는 창조의 원형으로의 회복입니다.

인간구제의 차원이란 말은 육신적 물질적인 차원의 일차적인 내용이요, 인간성 회복의 차원은 사회성을 회복하고 인격을 회복하는 차원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원형으로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본래의 관계를 회복하는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범죄 이전의 인간, 즉 인간 이하의 모습도 아니고 인간 이상의 모습도 아닌 인간 그 본래 모습의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은 먼저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며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때의 모습은 바로 기쁨이 충만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6장 34절에서 바울의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게 된 간수를 보고 증언했습니다.“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창조의 원형을 회복하게 되면 바로 에덴의 삶이 회복됩니다. 에덴의 삶이 회복된다는 말은 기쁨이 회복된다는 말입니다.‘에덴’이란 말은‘기쁨’이란 뜻을 갖습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기쁨을 상실했지만 죄가 없어지고 인간 본래의 모습을 갖게 되면 가장 먼저 기쁨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의 은혜를 얻어서 이와 같은 창조의 원형으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죽음의 상황이 변하여 생명의 상황이 되고 걱정 근심에서 평안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고통에서 희열로 변화되는 삶이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구원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천국백성의 모습입니다(마 5:3-12).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구원 안 받고는 살 수 없습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구원 안 받고도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이란 것은 잠시잠깐이요, 그 잠깐의 시간도 참으로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비참한 삶이라고 로마서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3:26, 6:23, 9:27). 그런데 우리의 삶이란 것은 이 땅에서의 삶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한 죽음 이후에도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 심판과 비참함 속에 던져 버려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삶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인간이 참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여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반드시 구원의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창조질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을 거절하고 구원의 은혜를 벗어나서 사는 사람은 마지막 심판과 함께 저주와 영원한 죽음의 상황에 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거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몸 말

그렇다면 이제 그렇게 중요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9절). 바울은 구원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4). 이 말에 의하면 구원이란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공부를 많이 해서 세상 지식을 많이 쌓고 도덕적인 삶을 훌륭하게 산다고 구원 얻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를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오직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구원 얻기 위하여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겠습니까?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인간의 행동 여하에 따라 구원 얻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구원 받지 못할 인간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노력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는 것은 참으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엡 2:8).

여기서‘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예수님이 그리스도 됨을 믿는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말은 이제부터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마음에 모셔 들인다는 말입니다(요 1:12).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도록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열고, 내 마음 중심에 모셔 들이는 데는 많은 희생과 버림과 헌신이 요구됩니다. 자기를 고집하고서는 결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들일 수 없습니다. 

아무도 내 생활에 간섭할 수 없다고 고집하는 한 결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결코 구원에 이르는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결국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철저하게 나를 포기하고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우리 주님은 나의 과거를 아시고, 나의 현재를 아시고, 나의 미래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런 그분에게 내가 무엇을 숨기고, 내가 무엇을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겸손하게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확실하게 고백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은,‘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10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은 개인적이고 내적인 것일 뿐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공개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합니다. 교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것도 그런 차원입니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다 같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함도 우리의 믿음은 공개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 주고 주님 역시도 우리의 신앙에 대한 확실한 열매를 허락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입으로 우리의 신앙을 시인함으로 우리의 신앙적인 책임을 결단하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적인 책임이란 것은 바로 주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기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결단을 우리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그래서 입으로 시인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영원토록 그를 책임지시고 복을 내려 주십니다. 

마가복음 8장 3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누구든지……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그리고 누가복음 12장 8절과 마태복음 10장 32절에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계시록 3장 5절에는‘누구든지 믿음을 지키고 예수님을 부정하지 않고 시인하여 이기는 자는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나도 그를 안다고 시인하리라’했습니다. 

여기서‘시인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며, 그분에게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공개적인 고백과 복종의 자세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 불신자들에게도 드러내고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며, 나는 그의 소유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란 곧 전적으로 그분을 위한 삶임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고, 세상을 향하여 있어서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시인하지 못함은 우리가 곧 적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임을(요일 4:2)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히고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입으로 시인하는 믿음이 우리를 온전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임을 기억하고,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시인함으로 하나님 자녀로서의 구원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13절).‘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주께 예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창 5:26). 구약 시대에는 예배할 때에 언제나 제단을 쌓고 희생제물을 드리면서 소리 높여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부름은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기도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왕상 18:36). 

엘리야가 바알 숭배자들과의 대결에서 번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것은 곧 불을 내려 달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주를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갖든지 중요한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구원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 이하에 나오는 여리고 성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다가 구원 얻은 것을 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자체가 큰 복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는 옛날에는 제사장 계급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주의 이름을 부르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활짝 열려진 구원의 길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큰 소리로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모두 구원의 복된 삶을 마음껏 누리는 은혜가 있기 축원합니다. (예수님 찬양: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마무리하는 말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래전에 어느 자매가 미국으로 입양되어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라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특히 사춘기에 그가 겪었던 괴로움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자기는 다른 아이들과 피부색이 다르고, 모습도 다릅니다. 부모와도 다릅니다. 그래서 그것이 괴로웠습니다. 양부모와의 갈등도 심해졌습니다. 결국에는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그를 괴롭힌 것은‘나는 누구일까?’‘나를 낳아 준 부모는 누구일까?’‘그들은 왜 나를 버렸을까?’하는 의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언제나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것은 자기를 낳아서 무책임하게 버린 부모에 대한 증오심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국인 신문에 자기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를 찾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낳아 준 그녀를 만났을 때, 그의 마음에 언제나 의문으로 남아 있어서 괴롭게 하였던 문제를 끄집어냈습니다.“왜 나를 버렸습니까?”질문을 받은 그의 생모는 한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나도 가난해서 도저히 먹여 살릴 수가 없어 그냥 두면 죽을 것 같아서 아픔을 삼키고 부잣집 대문 앞에 버렸노라고 답하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고 믿으면서 지금까지 호적에서 빼내지도 않고 있었노라고 호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못내 후회스러워서 매일같이 참회의 기도를 드렸노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흘리는 통한의 눈물을 보면서 이 아이의 마음속에 있던 증오의 마음이 녹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고서 이 아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너무나도 사랑해서 아이를 그냥 죽일 수가 없어서 가슴이 아프지만 부잣집으로 보내야만 했던 어머니의 그 큰 사랑을 어릴 때 일이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원망과 증오와 방황과 고통의 날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지금껏 한시도 변함없이 사랑해 온 그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비로소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죄인 되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리가 아직도 생명을 갖지 못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의 큰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고 방황하며 죄 가운데서 아파 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죄 가운데 있는 자가 아니란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구원의 확신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 얻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복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확신 속에서 평화를 얻고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어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 사랑을 입으로 증거하면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 예수님의 놀라운 소식을 전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구원 받은 자로 확신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구원 받는 자의 모습으로 사순절을 지내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바라보고, 그의 십자가와 고난, 죽으심, 그리고 부활까지를 묵상함으로 놀라운 은혜와 감격 속에 빠져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은혜와 감동이 우리를 어떤 환경 속에서도 기쁘게, 평안하게 소망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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