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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 (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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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 (고후 5:17)
 

신약성경은 구원 받은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의 차이는 실로 하늘과 땅 사이와 같습니다. 전자는 영생이나 후자는 영벌입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사례를 창세기 7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적에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은 목숨을 보전했지만,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과 동물들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방주 안은 생명을, 방주 밖은 사망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성경적으로 올바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

한 그루의 포도나무는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를 지탱하는 부분은 뿌리와 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지와 잎사귀도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먼저 뿌리와 줄기가 있고나서 가지와 잎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지가 있어서 잎이 나는 것이고, 뿌리와 줄기가 있어서 가지들이 나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무의 가지들을 다 쳐버릴지라도 나무가 죽지 않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새로운 가지들이 나옵니다. 가지들이 살아서 잎과 열매를 맺으려면 포도나무의 뿌리가 빨아들인 수액을 줄기를 통해서 공급받아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 그 가지는 포도나무 안에 있는 가지입니다. 

농부는 늦가을부터 3월 중순 경까지 포도나무의 가지치기를 합니다. 가지치기를 잘 해 주어야 포도나무가 잘 자라고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이 때 농부는 잘려나간 가지들을 농장 한 구석에 쌓아두었다가 마르면 불사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서 진액을 공급받고 열매를 맺는 가지들은 포도나무 안에 있는 가지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가지들은 포도나무의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에, 성도들을 가지들에 비유하셨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예수님의 생명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로서 예수님의 생명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아는 방법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만약에 진심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구세주로 믿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성도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 이르기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물세례를 받을 때 담임 목사와 성도들 앞에서 세례 문답을 합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심과 우리의 유일하신 구세주 되심을 믿습니까?” 그러면 “예!” 라고 답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로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과 그의 진노를 면치 못할 자였으나 이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믿습니까?” 이 질문에도 물론 “예!”라고 답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혹 보면, 마음으로 믿으면 됐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 믿는다고 시인할 것이 무엇이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주님에게서 믿는 자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 9:26)고 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장차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모르노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멸망당할 우리를 대속하시려고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시인하지 못한다면, 어찌 주를 믿는 성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 이르기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 가운데 ‘반사적 광영’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산다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다. 이 반사적 광영이 없다면 사는 기쁨은 절반이나 감소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반사적 광영이란, 예를 들면 이와 같습니다. 이번 벤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트 500m 경주에서 우리나라의 모태범 선수와 이상화 선수가 다 우승을 했습니다. 이 때 두 선수 덕분에 캐나다 교민들은 한국인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승한 선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그 사실을 드러내려 할 것입니다. 피천득 선생은 이런 식으로 얻는 영광을 반사적 광영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올림픽에서 우승한 선수와 친분이 있는 것도 영광스러운 일이라면, 하나님의 독생자시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사실은 얼마나 더 큰 영광이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7)…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사회에서 알아주는 명문 집안 출신에다 당시 최고의 율법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 자타가 인정하는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뵌 후로 그의 가치기준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자, 그 때까지 그가 귀히 여기고 자랑하고 의지하던 가문과 학식과 율법적인 의로움과 세상 권력 따위가 배설물과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이 약 오십 번이나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단지 예수 믿는다는 것을 넘어서서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이 방주와 운명을 같이 하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영원히 주님과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6절에 이르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우리를 가리켜 “옛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믿었을 때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말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을 때 주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골로새서 3장에 이르기를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옛 사람이 그대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믿기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되었습니다. 킹제임스 버전에 보면,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구절을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all things are become new)고 번역했습니다. 

새 마음을 갖게 되어 생각이 새롭게 되고, 말이 새롭게 되고, 행실이 새롭게 됩니다. 이전에 좋아하던 것들이 이제는 하찮게 보입니다.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즐겁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보람되고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에 이르기를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님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당하지 않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언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될지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행위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의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두 사람은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서 수치를 가렸습니다. 

그러나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는 금방 말라 바스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셨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는 인간적인 의로움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말해 주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더러 죄인이라고 하느냐?”고 항변합니다. 그것은 마치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로써 수치를 가리려는 것과 같습니다. 

가죽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터럭만치도 없으신 완전히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 보면 이를 일컬어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은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룟 유다와 같이 생명의 주님을 거부하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하인들 앞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주님의 용서와 용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부인한 것이지 가룟 유다처럼 본심으로 부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요한일서 1장 9절에 이르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신 대로, 성도들에게는 죄 사함의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 받았으므로 본질상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매일의 삶속에서 짓는 죄들을 회개함으로 정결한 상태를 지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나자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처럼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불화하게 만듭니다. 육신의 부모님과 불화해도 마음이 편치 않은데,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가 되었으니 어찌 평강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빛이신 하나님을 떠나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자들의 실상을 이같이 진술합니다.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여기, 열거한 악덕들은 생소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어서 언제라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매일 뉴스 시간에 전하는 내용들을 보면 선하고 아름다운 뉴스는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어렵고 그 대신 살인, 방화, 강간, 폭행, 사기와 같은 악하고 추한 뉴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르기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1)고 했습니다. 악인들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먹고 마시고 욕심을 채우면서 살지라도, 그들의 심령 속에는 평강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감사할 줄을 모르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매일 같이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 화목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을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신 결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성도들은 심령에 평강이 임하기 때문에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에 보니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한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보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차고 넘치니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넷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영생이란, 단지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죽지 않고 영원히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생이라 하지 않고 영벌이라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우리의 영혼만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부활의 몸을 가지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고 하셨습니다. 

현대는 의술과 공중 보건이 발달해서 사람들의 수명이 몰라보게 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백세까지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들은 120세까지도 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백세 난 이들을 보면 하나같이 너무 늙고 쇠약해 져서 아름다움이나 건강미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오래 살기를 소원하는 것은 영원한 삶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땅에서 백세까지 사는 것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것을 바라보면서 영원한 상급을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갑니다.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은 포도나무에 붙어서 진액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무에 붙어 있긴 한데 겨우내 얼어 죽은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 죽은 가지는 형식적인 기독교인을 가리킵니다. 교회생활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소일삼아 나옵니다. 또는 무슨 종교든 갖는 것이 마음에 안정도 되고 도덕적인 생활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해서 성경도 많이 알고 교회의 제반 일도 잘 압니다. 직분도 받아서 봉사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볼 때에는 똑같은 성도처럼 보이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선한 열매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인지, 아닌지를 분간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는지 여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구리와 꽹과리와 같이 소란스럽게 만들 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이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교회 안에서 덕을 깨뜨리고 말썽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모든 일에 대하여,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습니다. 온유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투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우리가 무슨 수로 이같이 행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가능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을 본받고 닮아가기 때문에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성도님들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해 드린 내용을 마음에 새겨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명백하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우리의 신분을 알고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의 삶속에서 누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님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넘치도록 부음 바 되어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다운 은혜롭고 능력있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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