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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자가 살아가는 세상 (창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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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가 살아가는 세상 (창 14:1~12)  
 

어느 날, 옹기장수가 강 언덕에 옹기 지게를 받쳐놓고 한잠 늘어지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회리바람이 불어와 지게가 넘어졌습니다. 가난한 옹기장수의 전 재산이 순식간에 깨어져 버렸습니다.
   
억울한 옹기장수는 그 고을 원님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였다지요. 그러나 딱하기는 원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된 것을 어디 가서 바람을 잡아다가 족칠 수가 있겠습니까?
   
고민하던 원님이 사령들에게 명령을 하였다지요. 강에 가서 뱃사공을 잡아오라고. 추상같은 원님의 명령으로 죄 없는 사공들이 잡혀왔습니다. 원님이 동쪽에서 짐을 실고 오는 사공들에게 묻습니다.
“자네들은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불기를 바라는가?”
“예, 저희들은 동풍이 불기를 바랍니다.”
   
이번에는 서쪽에서 짐을 실고 오는 사공들에게 묻습니다.
“자네들은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불기를 바라는가?”
“예, 저희들은 서풍이 불기를 바랍니다.”
   
원님이 말합니다.
“이 놈들아!  너희들이 한쪽에서는 ‘동풍아 불어라!’ 하고 또 한쪽에서는 ‘서풍아 불어라!’ 하였으니 동풍과 서풍이 마주쳐서 회오리바람이 되어 옹기 짐이 넘어지지 않았느냐! 너희들이 옹기 값을 물어주어라!”
지혜로운 원님의 재판이라는 옛날이야기 입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동풍 불어라, 서풍 불어라 하여 서민들의 옹기 짐이 무너져가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결해 줄 지혜로운 원님이 없는 세상입니다.

오늘, 자신을 경건하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사람들 중에는 ‘신앙이란 구름 위에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예배당에 머물러 있으려고 합니다.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사회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 살아가려고 합니다. 물론 세상에는 산 위의 영광스러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삶의 고통에 짓눌려 탄식만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경건한 생활일까요? 어떤 사람이 예배하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아브람에게서 배워야 할 또 하나는 그의 신앙이 예배하는 자로 제단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땅을 딛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 기근 때문에 애굽에 내려가기도 하였습니다. 애굽에서는 두려워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재산 문제로 조카 롯과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하여 아브람은 더욱 예배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복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그는 그가 속한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예배자 아브람이 살아간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로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I. 세상

1절 말씀입니다.
: 1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우선 주목하려고 하는 말은 ‘당시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의 ‘날’을 가리킵니다. 또 이 말은 누군가 주도적으로 일을 하는 것으로 어떤 시대를 가리킵니다. 즉 아브람이 살고 있던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단지 똑딱거리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활동 무대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살고 있던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나라는 엘람이라는 나라였습니다. 엘람은 오늘날의 이란 고원 남부에 위치했던 나라였는데 그 당시의 최강국이었습니다. 최강국 엘람이 그 주변의 시날, 엘리살, 고임이라는 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으니 가히 당시는 엘람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1. 세상에는 주류가 있습니다.
   
어떤 시대이든지 주도적인 위치에 있는 나라 또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도력을 발휘하여 힘을 모으고 그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아진 힘을 무조건 좋은 것이라거나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힘은 얼마나 세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용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폭력이라면 차라리 모아지지 않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언제나 세상에는 흐르는 강력한 물줄기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크던 작던 바른 물줄기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시대에 영적 흐름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영적 흐름을 주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주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국도 있고 주류에 대항하는 세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 4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엘람에 대항하는 나라와 그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돔 왕 베라, 고모라 왕 비르사, 아드마 왕 시납, 스보임 왕 세메벨, 그리고 소알 왕 벨라였습니다. 이들은 지금의 사해 주변 지역의 왕들입니다. 이들은 십이 년 동안이나 엘람을 섬기다가, 십삼 년째 되는 해에 배반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배반이라는 말은 별로 어감이 좋지 않습니다만 ‘반역하다’ ‘반항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들의 행동을 배반이라고 보아야할지 독립전쟁으로 보아야 할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릅니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반란이고 피지배의 입장에서는 독립전쟁입니다. 분명한 것은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 세상에는 저항이 있습니다.
   
십 이 년 동안이나 그돌라오멜을 섬겨오던 다섯 왕이 배반하였습니다. 그 배반의 주요 원인은 가나안 땅에 임했던 심한 기근(12:10)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어야 했던 그 기근이 가나안과 그 주변의 살림을 어렵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근에도 불구하고 여느 해와 다름없이 할당된 과중한 조공을 요구하는 엘람의 정책에 반발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정치적 자주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다섯 왕이 들고일어났습니다. 배반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지만 저항할 수는 있습니다.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표식입니다.
불의에는 저항하고 옳은 일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세력과 그것에 저항하는 세력이 적정선에서 타협을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협상이나 타협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8절과 9절 말씀입니다.
 : 8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 9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엘람을 중심으로 하는 북쪽 지역의 네 왕과 그들에게 저항하는 남쪽 지역 다섯 왕이 맞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최초의 전쟁, 4개 나라의 연합군과 5개 나라의 동맹군이 충돌하는 전쟁입니다. 엘람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소돔을 중심으로 한 동맹군이 일류 최초의 세계 대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지역에 전쟁의 소용돌이가 일어났습니다.
   
3. 세상에는 전쟁이 있습니다.
   
오늘에도 소용돌이는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의 세계에서 이념 전쟁이 끝났다고 하지만 아직도 지구의 여러 곳에서 분쟁이 끝이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화를 이야기하지만 지역적인 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연구에 의하면 1480년에서 1965년 사이에 일어난 전쟁은 무려 308차례나 되었습니다. 이 전쟁 가운데 국제전은 152차례, 제국주의적 전쟁은 70차례, 시민전쟁은 86차례였습니다. 전쟁의 규모도 두 약소국 간에 몇 개월간 지속된 전쟁에서부터 30년 전쟁(1618-48), 7년 전쟁(1756-63), 나폴레옹 전쟁, 제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까지 다양하였습니다. 특히 제1, 2차 세계대전은 세계의 모든 강대국과 그 주변의 많은 국가를 끌어들인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사적 충돌이나 경제 다툼만이 전쟁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심각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영적 혼란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바람이 잘 날이 없습니다. 그것도 강풍이 사정없이 불어 많은 사람들을 휩쓸고 있습니다. 파도가 치는 정도가 아니라 파도에 파도가 겹쳐 거대한 물기둥이 되어 사람들을 덮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어떤 분이 ‘힘든 세상’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이른 새벽, 한 젊은이가 전봇대에 구인광고를 붙이며 바쁘게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길을 지나던 한 사내가 진지한 얼굴로 구인광고 앞에 발을 멈췄다.
   
며칠 후, 시청에 임시 고용된 노인들이 물 젖은 솔로 광고지를 벗겨냈다. 그리고 깨끗해진 전봇대를 확인하러 시청직원이 다녀갔다.
   
종이 한 장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종이 한 장에 여러 사람들의 엄숙한 삶이 힘겹게 매달린다. 한 장의 종이가 예사롭지 않은 세상, 지금 우리는 얼마나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종이를 붙이는 사람과 그것을 떼는 사람, 붙인 종이를  바라보는 사람과 종이 떼는 것을 감독하는 사람이 숨바꼭질 하듯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적 충돌이나 또는 심각한 영적 갈등이 우리의 시대에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있고 그 갈등이 심각한 대립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한 모습입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품되 영적 전쟁을 잘 수행하여 하나님께 칭찬을 듣는 천국 백성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시대와 그에 대항하여 일어난 전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0절과 11절 말씀입니다.
:10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싸움은 싱겁게 끝났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승리였습니다. 수비를 하던 가나안 지역의 다섯 왕이 패배하였습니다. 가나안 지역의 왕들은 자신들의 홈그라운드에서 패배하였습니다. 그들의 군인들 가운데서 일부는 수렁에 빠지고, 나머지는 산간지방으로 달아났습니다. 쳐들어온 가나안 북쪽의 네 왕은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재물과 양식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4. 세상에는 성패가 있습니다.
   
남부 가나안 동맹군이 전쟁의 장소로 싯딤 골짜기를 택한 까닭은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아 침입군에게 방해가 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오히려 자신들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야구선수 중에 피트 로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1963년부터 1986년까지 활약하면서 4,256개라는 메이저리그 사상 가장 많은 안타를 쳤습니다.
그런데 화려한 그의 기록은 그가 야구 역사상 다른 어느 선수보다 경기에 많이 출전했고 많이 타석에 섰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려 14,053번이나 타석에 나갔고 그 결과로 4,256개의 안타를 쳤습니다. 이것은 그는 무려 10,000번 가까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더 많은 실패를 통하여 최고의 안타기록을 만들어냈습니다.
   
아무리 최고 타자라도 공을 칠 때 보다는 치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은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성공과 실패가 뒤섞여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 땅에서는 영원한 성공도 없고 영원한 실패도 없습니다. 잠시 성공하였다고 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패배하였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생에도 패자 부활전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결과에도 낙심하지 않는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싸움의 희비가 교차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다시 3절 말씀입니다.
   : 3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이 말씀에서 주의 깊게 보려고 하는 것은 전쟁을 할 그 당시에는 ‘싯딤’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는 염해였다는 것입니다. ‘싯딤 골짜기’라는 말은 ‘아카시아 골짜기’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아카시아 나무가 무성하게 자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염해, 소금바다가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징벌하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패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패배 원인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타락과 패역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패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어그러진 길로 가다가 마침내 유황불로 심판당한 사실(19:1-11,24,25)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5. 세상에는 징계가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는 주류이기 때문에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쟁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에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나라들도 하나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잠시 동안 소돔과 고모라를 징계하는 막대기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엘람 군대에 패한 것보다 하나님의 징계가 훨씬 심각하였습니다. 전쟁에 패하였을 때는 땅은 그냥 거기에 남아있었는데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니 그 땅도 사라지고 소금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하셨습니다. 정말로 두려워하여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고 전쟁이 일어나면 승리자가 있고 패배자가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힘의 크기에 의해서만 역사가 흘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날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맙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지혜입니다.

아브람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엘람 연합군과 소돔 동맹군의 전쟁은 그와 정말로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까?

II. 관련

12절 말씀입니다.
:12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엘람 연합군에 의하여 소돔이 패배하자 그곳에 살고 있던 롯이 사로잡혀 갔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를 그냥 ‘소돔에 살고 있던 롯’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브람의 조카 롯’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소돔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로잡아 갔다고 말하지 않고 그 중에 특별히 한 사람을 가리켜 ‘아브람의 조카 롯’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전쟁에 아브람이 끼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은 세상과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1. 세상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세상에 어떤 바람이 불어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싸움은 충돌하는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충격을 줍니다. 얽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줍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운명 공동체인 집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개인이 속한 집단이 어려움을 당할 때 혼자서만 고고하게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지속된 6.25, 한국전쟁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었습니다. 남북한을 합친 인적 손실은 무려 5백 20만 명 규모로서 당시 남북한 인구 약 3천만명중 1/6정도가 손실된 민족사의 대비극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인명피해 이외에도 국토의 대부분이 황폐해졌고 물질적 피해도 컸으며 그 후유증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 전쟁에 교회는 무사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전쟁 중에 수 많은 예배당이 불탔습니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숨졌습니다. 많은 신앙지도자들이 납북되어 순교하였거나 아직도 생사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교회가 완전히 황폐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 속에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소용돌이를 교인들 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믿음의 사람들도 세상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고전 5:10). 우리는 자신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과 접촉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시기를 세상의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람은 그의 시대, 그의 장소, 그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시대, 우리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그가 속한 세상을 딛고 살아야 합니다. 
   
도도하게 흐르는 세상의 격랑 때문에 때로는 절망도 하지만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b)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움이 있지만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승리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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