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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행 26: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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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행 26:21~29)


에머슨은 말하기를 "세계 역사상 위대하고 당당한 모든 시기는 어떤 광기 있는 열의의 승리다"라고 했습니다. 열심보다 사람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도구는 없다고 했습니다.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은 베스도 앞에서 자신의 과거의 삶과 개종의 동기와 복음전파의 사명을 웅변적으로 설파했습니다.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는 확실한 바울의 변증적 설교에 당황한 베스도는 바울을 미친 자로 단정하고 바울의 설교를 중단시켰습니다. 
베스도는 유대교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바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합리주의자인 그가 초자연적인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바울을 광인으로 취급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무슨 소리를 듣든지 아랑곳 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부활 증거의 사명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베스도의 영적 무지에 한계를 느낀 바울은 곧이어 유대 왕 아그립바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울은 모든 유대인들이 율법과 선지자를 믿는다면 선지자들이 메시야에 관하여 예언한 것들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동족인 왕에게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정중히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논리 정연한 호소에 아그립바는 몹시 당황하였으니 그는 바울의 변론의 핵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바울의 말을 일소(一笑)에 붙여 버림으로써 진리를 외면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비록 아그립바 왕을 상대로 한 설교였으나 실상은 전(全) 유대인을 향한 고별 설교였습니다. 이방인 베스도는 그를 광인(狂人)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아그립바 왕은 그를 우매자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바울로 하여금 조국을 떠나 로마로 향하게 되는 동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본문에서는 유대인 아그립바를 비롯하여 바울을 심문하던 자들이 바울을 무죄한 자로 인정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바울이 무죄하다는 결론은 이미 글라우디오 루시아 총독(23:26-29)과 베스도 총독도 내린 바 있었습니다(25:25). 그를 송사했던 유대인들도 그들의 고소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을 놓아 주려 하였으나 유대 민중들을 의식했던 까닭에 바울을 석방하지 못하였습니다. 아그립바를 통하여 바울의 무죄를 입증함으로 기독교가 결코 국법에 어긋나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로마 선교의 장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영광스럽게도 미친 광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Ⅰ. 미친 자는 한 가지 일만 생각합니다. 

본문 26장 21-23절에 『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던 보다 궁극적 이유는 그가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의식이 바울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지역과 종족과 신분을 초월해서 전파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구약의 모세와 선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와 일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신이 핍박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 2절에 『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16장 26절에 『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이라고 했습니다. 

1)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비 보통한 상태로 보입니다. 
여기 '미쳤다'는 말은 정신적인 질병의 차원에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역사성, 다른 사상, 다른 가치관, 다른 인생관 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은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라고 했습니다. 
다메섹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은 체험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진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증거에 모든 것이 집중된 상태였습니다. 
미친 사람은 그 미치게 된 원인, 동기, 이유 등의 한 가지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돈벌이에 실패하여 미쳤으면 자나 깨나 돈 타령만 합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생각되고 오직 목표가 돈 뿐입니다.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하는 것에 열중하다 미치거나 이성에 미친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술가들 가운데도 실제적으로 미친 사람들이 많은 것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하다가 병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증거에 사로잡히고 그 부활증거에 죽음을 불사하는 집중을 보이니 세인들이 보기에는 꼭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이렇게 예수에 미쳐 버리니 사도행전 24장 5절에 『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 『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9절에 『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 했습니다. 

Ⅱ. 미친 사람은 수치(부끄러움)를 모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에 『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 『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라고 했습니다. 
미친 사람은 자기의 미친 상태를 모릅니다. 남들이 비웃든지, 조롱하든지 수치를 모르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장 19절에 『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고 했습니다. 
자기의 미친 상태를 알고 부끄러움을 깨닫는 자는 결코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입니다. 예수에게 미친 사람은 신앙생활에서 오는 모든 어려움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의 고난과 핍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오히려 영광으로 여깁니다. 

Ⅲ. 미쳐야 일이 됩(미침)니다. 

본문 26장 24절에 『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라고 했습니다. 
본문 26장 29절에 『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 최고의 권세가들 앞에서 사슬에 매인 몸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진정한 영적 자유를 누릴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슬에 묶인 손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전율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실상 바울은 여기서 무죄가 확증되었습니다. 본문 26장 30-32절에 『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지 못하고 로마의 가이사에게 가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 『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의 결박이 그를 로마로 안전하게 데려다 주게 되는 주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1) 미치지 않고는 세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미치지 않고는 못 사는 시대입니다. 세상은 미쳐야 일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왕 미친 인생일 바에야 예수께 미치고, 선에 미치고, 사랑에 미칩시다. 우리는 어느 하나에라도 미쳐야 될 인생입니다. 

2) 미치지 않고는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3-24절에 『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실상은 미치지 아니했으면서 미친 것처럼 집중을 했으니 그 힘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나님의 종들은 한결같이 미친 자들이었습니다. 
열왕기하 9장 11절에 『 예후가 나와서 그 주의 신복들에게 이르니 한 사람이 묻되 평안이뇨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뇨 대답하되 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 말한 것을 알리라 』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26절에 『 여호와께서 너로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제사장을 삼아 여호와의 집 유사로 세우심은 무릇 미친 자와 자칭 선지자를 착고에 채우며 칼을 메우게 하심이어늘 』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0절에 『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 『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3) 미친 사람은 큰 힘을 냅니다. 
미친 사람들은 한 가지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괴력이 나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이 그리스도에게 미친 자에게만 있습니다. 고난을 이길 힘이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예수께 미쳐야 합니다. 교회에 미쳐야 합니다. 복음에 미쳐야 합니다. 미친 광기는 겁이 없습니다.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어디엔가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교회에 미치지 않았으면 세상에 미쳤습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미치지 않고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들이 쓴 詩나 문장이나 예술 작품을 연구하고 분석하고 감탄합니다. 
과학문명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가 왜 그것들을 감탄합니까? 그 당시에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미쳐있었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시인묵객들은 지필묵(紙筆墨)을 넣고 다니며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주저앉아 시구(詩句)를 보태고 깎기를 며칠간 합니다. 끝내 시상을 가다듬지 못하면 에고 에고 큰 소리로 곡을 하며 산을 넘고, 완성이 되면 그 시 쓴 종이를 환약처럼 돌돌 말아 흐르는 개울물에 던져 버리고 떠납니다. 이를 시환(詩丸)이라 했습니다. 
그 산의 나무로 금(琴)통을 만들고 그 산에서 잡은 산짐승 심줄로 슬(瑟)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산 마루턱에 앉아 탄금(彈琴)을 함으로써 그 산의 소리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허리춤에는 기름종이에 싼 된장을 차고 산길을 다니면서 취나물, 씀바귀, 노각, 오가리, 두릅순 등 맛이 다른 산채를 뜯어 단지밥을 짓고 산채 쌈에 된장을 쌈장해서 먹었습니다. 
당대의 화가 이징(李澄)은 어려서부터 다락에 올라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부친이 노하여 매를 대자 흐르는 눈물을 찍어 새를 그렸다고 합니다. 

김일손은 한유의 문장을 일천 번 읽었습니다. 윤결은 맹자를 일천 번 읽었습니다. 노수신은 논어와 두시를 이천 번 읽었고, 최림은 한시를 오천 번 읽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일에 미쳐서(狂) 미친(及) 자들입니다. 

정조 때 독서광 이덕무는 15년을 관직에 있었는데 정조는 그에게 520여 차례나 하사품을 내렸습니다. 그가 지은 송유민보전(宋遺民補傳)에는 두준지(杜濬之)의 시가 실려 있는데 "차라리 백리걸음 힘들더라도/ 굽은 나무 아래서는 쉴 수가 없고/ 비록 사흘을 굶을 지언정/ 기우숙한 쑥은 먹을 수 없네/ 범은 굶어 죽을 지언정/ 풀을 먹는 법이 없고/ 눈 속에 피는 매화는/ 혹한에도 향기를 빼앗기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26장 25절에 『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한 말을 생각하며 마치겠습니다. 본문 26장 29절에 『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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