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11) : 탑가 (마 14:13~21)

  • 잡초 잡초
  • 569
  • 0

첨부 1


위대한 삶의 순례(11) : 탑가 (마 14:13~21)

 
내일부터 침례교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주최로 <세계 선교대회>가 안성 <사랑의 교회 수양관>에서 사흘간 열립니다. 이 침미준 모임과 선교 대회는 모두 우리 교회의 후원으로 이루어지는 아주 중요한 연례행사이기도 합니다. 일찍 스위스의 유명한 신학자 에밀 브룬너(Emil Brunner)는 “불은 타오름으로 존재하듯 교회는 선교함으로 존재한다”(The church exists by mission, as fire exists by burning)는 말을 했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기능적 액서사리가 아니라, 교회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는 말입니다. 본래 ‘선교’(mission)라는 말은 라틴어 ‘missio’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냄을 받았다’(sent)는 뜻을 갖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성취하고자 하신 모든 일을 의미합니다. 그 일은 첫째로 배고픈 인류에게 빵을 제공하는 일입니다. 곧 이웃 사랑의 사역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과 동일한 기적의 사건을 다룬 요한복음 6장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제공해야 할 정말 더 중요한 빵은 육신을 위한 빵만이 아닌 ‘영적 생명의 빵(떡)’이라고 말합니다. 이 일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복음 전도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는 이웃 사랑 사역과 복음 전도 사역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역의 진원지였던 기적의 현장 갈릴리 탑가(Tabgha)로 함께 출발하겠습니다. 본래 ‘탑가’라는 말은 희랍어 "Heptapegon"(7개의 샘)이란 말을 아랍어로 표기하면서 생긴 명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AD384년 한 순례자(Nun, Egeria)가 5명2어의 현장으로 7개의 샘이 있던 이 곳을 발견하면서 부여된 명칭이라고 합니다. 소위 ‘팔복산’도 이 탑가 지역에 속한 곳이며 가버나움과 팔복산 그리고 5명2어 기념교회가 있는 이 곳은 지형적으로 3각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다 걸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기도 합니다. 

이 곳에서 5세기 비잔틴 시대 교회 터가 발굴되었는데 이 교회 바닥은 전체가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되어있는데 이 모자이크 중에는 5병 2어의 기적을 묘사하는 두 마리 물고기사이에 둥근 모양의 떡들이 그려진 것이 그대로 발굴된 것입니다. 그래서 1936년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모자이크위에 "기념 교회"(Church of the Multiplication of the Loaves and Fishes)를 건축하게 됩니다. 교회 내부 강단 쪽에는 바로 이 5명2어 모자이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유명한 5병2어의 기적이 시사하는 선교의 레슨은 무엇일까요?

1. 선교는 사랑의 동기로 시작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이 출발하는 상황은 빈들에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중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시니라” 이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이야 말로 이 기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영어 성경에서는 "compassion"으로 쓰여 집니다. com은 함께 passion은 pssio에서 나온 말로 고통이란 뜻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아파하는 사랑, 이 사랑이 그들의 병을 치유하게 한 원인이었고 더 나아가 배고픈 그들을 위해 기적을 베푸신 동기였던 것입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선교의 유일한 동기, 유일한 이유는 바로 이웃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기독교 선교 역사를 보면 이 사랑이 다른 것으로 대치될 때 선교는 종종 이웃들을 섬기는 행위가 아닌 이웃들의 지배의 동기로 변질된 경우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교하고 섬긴 대상들을 부리고자 했을 때 이런 선교는 역사를 통해서 "제국주의적 선교"(imperialistic mission)라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 보다 더 상황적으로 취약한 이웃들을 대상으로 선교할 때 이것을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돕고자 할 때에나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에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조건 없이 섬기고, 조건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자신의 동기를 설명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고 고백합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바울의 고백처럼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아 줄지라도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봉사하고 전도하면서도 이웃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이웃의 자존심을 세워주며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하여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고전13:4-5)라고 말한 것입니다.

2. 선교는 "가능한" 헌신으로 준비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만 명 가까운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치유를 받으면서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제자들은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이들의 저녁 식사를 해결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았습니다. 무리를 마을로 보내어 저녁 식사를 해결한 다음 다시 오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15절) 그런데 예수님의 응답은 의외였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은 말도 안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6장에 보면 빌립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6:7) 이백 데나리온이면 약 7개월의 당시 월급에 해당하는 거금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대신에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은 제자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 제자는 안드레였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요한6:9) 다시 마태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18절입니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없는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그것을 주님에게 드릴 수 있을 것인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기적은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일어나는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 근교에는 크리스쳔 명문 학교인 휘튼 칼리지(미 코스타가 열리는 곳)가 있습니다. 이 학교의 교장으로 레이몬드 에드먼 박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한 학생이 찾아와 등록을 못해 자퇴할 상황인데 도움을 받을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학교도 재정난을 겪고 있어 도움을 줄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 그때 에드먼 박사는 자네가 가진 돈이 모두 얼마나 되나?고 물었습니다. 학생은 머리를 극적이며 “75센트 밖에 없습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에드먼 교장은 다시 그 밖에 자네가 돈을 마련할 방법은 없는가? “네, 별로요. 하더니 아, 제가 앞으로 학교 식당에서 노동을 하겠습니다.”하자, 백지를 한 장 내 놓고 “(75센트식당 노동)쓰게 한후 학장이 다시“기도(5병2어)”라고 쓰더니 간절하게 기도한 후 그를 보냈습니다. 

그 이 튿날 그 학생의 서류함엔 등록비가 지불되었다는 통지서가 도착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돈은 교장이 지불한 것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드먼 교장은 먼저 그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기적이 필요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나는 나의 상황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를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다음 정말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십시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날 세계 선교의 과제는 너무 엄청나게 커 보이고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무슨 세상이 바꾸어지겠는가라는 절망감을 안게 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시대의 한 성도로서 이 시대의 주님의 몸인 공동체의 지체로서 우리가 과연 가능한 우리의 헌신 우리의 5병2어를 드리고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3. 선교의 책임은 일회성의 헌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기적의 결과를 어떻게 기록합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왜 그렇게 거두게 하셨을까요? 낭비가 아닌 절약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였을까요? 그럴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두 바구니는 어쩌면 12제자를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아마도 이 기적의 현장에서 12제자는 각자 12바구니를 가지고 부지런히 남은 빵을 거두며 아직도 굶주리는 저 건너편 마을의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귓전에는 예수님의 기적 전에 주신 말씀이 자꾸 생각나지 않았겠습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저 빈들 건너 편 마을 사람들에게도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고. “아직 먹을 것을 나누는 너희의 사역은 끝나지 않았다”고.

사실 오늘의 본문 마태 복음 14장을 계속 따라가 보면 마태 15장에도 다시 비숫한 또 하나의 기적사건이 기록됩니다. 마태15:32-39의 사건을 가르쳐 우리는 흔히 7병2어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자유주의 학자 중에는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마태 16:9-10에 보면 이것이 별개의 두 개의 기적 사건인 것을 예수님 자신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몇 가지 면에서 이 두 사건은 명백하게 구별됩니다. 기적의 대상이 오천 명과 사천 명으로 다르고, 기적의 도구로 쓰인 떡이 다섯 개와 일곱 개로 다르고, 또 하나 주목하실 것은 5병2어에서 남은 것은 12바구니에 거두었지만 7병2어에서는 7광주리에 거두었다는 사실입니다. 

바구니와 광주리는 영어로는 다같이 basket이지만 희랍어로는 바구니는 ‘코피노스’(kopinos,복수-kopinous)이고 광주리는 ‘스푸리스’(spuris,복수-spuridas)로 되어 있습니다. 바구니는 버들가지로 만든 작은 것으로 품에 안을 정도의 크기이지만 광주리는 갈대로 만든 것으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입니다.(사도행전에 바울이 이런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에서 벽에서 달아내는 방법으로 탈출-행9:25)

메시아닉 유대인 학자중에는 12바구니가 12지파로 된 유대인 선교의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7광주리는 소아시아 7교회에 보낸 편지처럼 이방인 선교의 책임을 의미한다고 본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아주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바구니가 아닌 광주리를 준비하고 세계 선교의 마당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때보다 더 넓혀진 추수의 마당은 바구니(코피노스)가 아닌 광주리(스푸리스)를 필요로 합니다. 바구니만 준비하면 하나님은 바구니만 체우십니다. 광주리를 준비하시면 하나님은 광주리를 채우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광주리에 복음의 떡, 사랑의 떡을 가득 담고 global market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 1세기 탑가의 빈들 이상으로 굶주린 21세기의 이웃들이 생명의 떡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존재하는 한 우리의 선교적 책임은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7병2어,아니 8병2어, 9병2어의 기적을 위해 다시 광주리를 들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지난 세기에 위대한 부흥전도자로 쓰임 받은 촬스 피니가 도시의 중심가를 걷다가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에 서서 지나치는 행인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왜 그러세요?”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죽어 가고 있잖아요. 저 사람들이저 배고픈 영혼들이, 저 목마른 영혼들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감춰진 울음 소리 주님 들으시네/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People needs the Lord!> 

누가 그들에게 나아가 예수님이 예수님만이 생명의 떡이라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누가 목마른 그들에게 나아가 예수님이 예수님만이 생명의 물이라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누가 그들에게 이 생명의 떡이 담긴 광주리를 운반하도록 도우시겠습니까? 우리가 안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지금 안하면 언제 하겠습니까?  
(이동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