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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죽으면 누가 울어줄까? (행 9: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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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누가 울어줄까? (행 9:36~43) 

  
오늘은 주일과 설날이 겹쳐서 주일 지키기 쉽지 않은 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일을 제치고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각별한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저는 개인적으로 가족이나 친척을 만나는 기쁨도 있지만, 무엇보다 인생의 교훈을 배울 수 있어 좋습니다. 분주했던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이런 저런 교훈을 얻게 됩니다. 

무엇보다 명절이 되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됩니다. 어릴 적에 살던 고향에도 가보고,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도 보고, 어른들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도 보고, 그런 가운데 나 자신이 나이 드는 것도 느낍니다. 특히 고인들을 추모하면서 인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과연 어떤 인생이 성공한 인생일까?” 당연히 하나님 앞에 좋은 평가를 받아야 성공한 인생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의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변경할 수 없는 철칙입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인생을 다 살고 난 후 하나님 앞에 가서 어떤 심판을 받느냐 하는 게 인생의 최종 평가입니다. 무엇보다 예수 믿고 천국에 들어가야 되고, 그 다음에는 천국의 상급을 받아야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한편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미리 심판을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어떻게요? 평판(評判 reputation)을 통해서입니다. 누구든 세상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받기 마련이데, 그게 바로 평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과 사람들의 평판이 꼭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대로 사람들의 평판과 하나님의 평가는 엇비슷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좋은 평판을 얻어야 합니다.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은 인생을 사는 동안 실제적으로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을 청빙하죠. 지난번에는 부목사님 한 분 모시는데 이력서가 1백 통이 넘게 들어왔어요. 학력이나 경력만 보고 선발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이럴 때 뭐가 중요할까요? 평판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의 목사님을 모셔야 되니까 같은 신학교를 졸업생들 중에서 선택해야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두 다리 건너면 다 알아요. “아무개 목사님” 하면, “아~ 그 분 ... ” 이렇게 평판이 나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아요. 때로는 거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어디 목사들뿐이겠습니까? 한국 사람들은 몇 다리 건너면 대충 알게 되죠.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의 평판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죽을 때의 평판입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사람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요. 훌륭한 줄 알았던 사람이 나중에 타락하는 경우도 있고, 못된 줄 알았던 사람이 개과천선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개관사정(蓋棺事定)! 무슨 말인가요? 관 뚜껑을 덮은 후에야 그 사람의 인생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모든 인생이 그렇지만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살아있는 동안이든 죽어서든 좋은 평판을 얻어야 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평판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합니다. 롬14: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approved by men)”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게 칭찬받아야 하지만,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또 딤전3:7 보면, 교회의 직분자는 어떤 자질을 가져야 되는지 설명합니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직분자들은 성도들에게서는 물론이고 불신자들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비유해서 말하면, 믿는 성도라면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고후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the aroma of Christ)니”

향기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는 물론이고 사람들 앞에 칭찬을 받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a마치 벌이 꽃향기를 찾아가듯 가까이 다다가고 싶습니다. 함께 오래 있고 싶습니다. 그리고 헤어지지 싫고, 헤어지면 슬퍼합니다. 

꽃에는 향기가 있죠. 장미, 아카시아, 라일락 같은 꽃의 향기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어떤 꽃은 죽어서도 계속 향기를 뿜어냅니다. 선갈퀴(Asperula odoraca)라는 꽃이 그렇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울릉도에서 난다고 하는데, 이 꽃은 죽어서 마른 후에도 향기가 계속 난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선갈퀴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향기를 내야 합니다. 본문 보면,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36절.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 ” 욥바에 사는 ‘도르가’라는 여인입니다. 그녀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교인들이 너무 슬퍼합니다. 차마 장례를 진행하지 못합니다. 유해를 안치한 후 사람을 보내 인근 도시 룻다에 있던 베드로 사도를 불러옵니다. 룻다에서 벌어진 베드로의 기적(행9:32~35)에 대해 소문을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애니아라는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8년이나 누워있었는데, 베드로가 일으켜 세웁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베드로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한 겁니다. 베드로가 급히 와 보니까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잔뜩 모여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39절 보십시오. “ ... 모든 과부가 저희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 ” 

여러분, 이게 참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어쩌면 지상에서의 심판인지 모릅니다.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 앞에서 받지만, 예비심판은 장례식장에서 사람들 앞에서 받는 겁니다. 어떤 사람의 장례식장에 가보면 아무도 울지 않아요. 심지어 가족들도 울지 않습니다. 이러면 참 민망합니다. 심하게 말하면, 인생을 잘못 산 겁니다. 오래 살아서 호상이라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90세 가까이 사시다 돌아가신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교인들, 동네 사람들까지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특히 입관하는데 장성한 손자들이 시신에 매달려 울어서 염습하는 사람들이 관 뚜껑을 덮지 못해서 한참 지연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정말 부럽더라고요. 내가 죽을 때 저럴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도르가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이 모습만 봐도 “도르가는 인생을 참 잘 살았구나! 성공한 인생이구나!” 이렇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인생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도르가가 어떻게 인생을 살았기에 사람들이 그의 죽음 앞에 통곡하며 울었을까요? 그녀의 인생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향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평소에도 가까이 하고 싶어 했고, 헤어지니까 헤어지기 싫어서 슬피 울었던 겁니다. 

[1] 인격의 향기 

도르가에게는 크게 두 가지 향기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인격의 향기가 있었습니다. 

36절을 보시죠.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여기서 ‘여제자’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헬라어로 ‘마쎄트리아’(hmaqhvtria)라고 하는데, 성경 전체를 통틀어 이 구절에 단 한번 나옵니다. 당시에는 여권 신장이 이뤄지지 않았던 때였는데, 여제자라는 단어를 쓴 것으로 봐서 도르가는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교회에서도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이름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다비다는 히브리어이고, 도르가는 헬라어로 같은 말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한국 이름 ‘박은혜’가 미국식으로 하면 ‘Grace Park’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이름은 ‘영양’(羚羊) 혹은 ‘사슴’이란 뜻입니다. 그녀는 항상 선행을 했다고 했는데, 착한 행실 즉 훌륭한 인격을 가리킵니다.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행실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은 것은 오직 믿음을 된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예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목적입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to be conformed to the likeness of his Son)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아버지시고 에수님이 큰 형님이시고 우리가 그 동생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하나님의 가족’(God's Family)을 만드는 게 목적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럴 때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서서히 그분을 닮아가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마음 속에 오셔서 인격을 변화시켜주십니다. 이게 바로 셩령의 열매입니다. 갈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7가지 열매가 나오는데, 그 하나하나가 모두 예수님의 품성입니다. 

이와 같은 인격이 형성되면서 저절로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게 됩니다.

고급 향수가 은은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향기는 은은하고 고상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합니다. 반면에 싸구려 향수는 어때요? 요란하지만 골치가 아플 정도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인격이 고급 향수 같아야 하는데, 때로는 싸구려 향수 같을 때가 있습니다. 조심조심해야 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어디서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격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설날인데,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들을 보면, 의무감에서 모이지만 즐거움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신문에서 칼럼을 읽어보니까, 이런 표현이 있더군요. “명절이 뭐냐 하면, 10분 반갑고 3시간 밥 먹고 30시간 짜증나는 절기이다.” 정말 이 말대로라면 그 가정은 비극입니다. 특히 명절에는 여자분들이 많이 힘들어 합니다.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에서 너무 힘들어서 심지어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합니다. 이게 모순인데, 현실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상처를 가장 많이 주고받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줍니까?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족 관계에서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하고, 불신가족들에게 감동을 줄 정도로 거룩한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도 여전히 부족하죠. 예수 믿는다고 당장 천사가 되나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똑같은가요? 그렇지 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성경 말씀이 주어져 있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링컨은 미국 역사 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입니다. 그에게 아주 골치 아픈 라이벌이 있었죠. 아니, 원수였습니다. 에드윈 스탠턴! 변호사 시절에도 같은 변호사로서 무시하고 자주 욕설을 퍼부은 장본인입니다. 한번은 같은 법정에 서게 됐는데, 시골뜨기와 함께 법정에 설 수 없다며 무시하며 인격 모독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러자 화가 난 스탠턴이 이렇게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국가적인 재앙이다!” 

놀랍게도 링컨은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국방부장관에 기용합니다. 후일 링컨이 저격당해 장례식을 거행할 때 부둥켜안고 제일 서럽게 울었던 사람이 바로 스탠턴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격자가 누워 있노라!” 대단하죠. 그런데 링컨이 본래부터 고매한 인격자였던 건 아닙니다. 젊은 시절에는 이판사판으로 결투를 벌인 적도 있을 정도로 거친 성격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성화된 결과 고매한 인격자가 된 겁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도르가처럼 링컨처럼 에수님을 닮은 인격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 사랑의 향기 

도르가에게 있었던 두번째 향기는 사랑의 향기였습니다. 다시 36절을 보시죠.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도르가에게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실천이죠. 

특히 39절을 보면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 ...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가 도착하자 많은 여인들이 그를 도르가의 시신이 안치된 다락방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아 생전 도르가가 그들에게 베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증거물이 속옷과 겉옷이었습니다.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을 장만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겉옷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밤에 덮고 자는 이부자리로도 사용됐는데, 재산 목록 1호라고 할 정도로 귀한 겁니다. 그러니까 도르가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대리자입니다. 예수님의 발이 되어 연약한 자들을 찾아가야 하고, 예수님의 손이 되어 빈한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표지입니다. 요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일3:18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로만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요일3:17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도르가는 사랑의 실천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부자인지 모르지만, 부자라고 하는 게 아니죠.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어서 가능했던 겁니다. 그녀 안에 사랑이 있었기에 그 향기가 주위 사람들에게 풍겼던 것입니다. 

명절 때가 되면 개인적으로 제 가족이나 친척 중에 고인이 되신 분들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우리교회 성도들 중 고인이 되신 분들 생각이 납니다. 아무개 장로님 이러셨지, 아무개 권사님 이러셨지, 아무개 집사님 이러셨지, ... 그 중에 문득 K 권사님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갑자기 악화되어서 천국에 가셨습니다. 입원해 계신 동안 여러분 심방했는데, 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먼 친척들까지 몰려와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제가 묻지도 않는데, 그분들이 K 권사님이 그동안 자기들에게 베푼 사랑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평소에도 훌륭한 분인 줄 알았지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결국 소생하지 못하고 떠나셨는데, 장례식 내내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습니다. 마치 도르가 같은 권사님이셨습니다. 빨리 갑자기 가셔서 슬펐지만, 어차피 한번 왔다 가는 인생인 것을 감안하면 “정말 인생을 잘 사셨구나! 신앙생활 참 잘 하셨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성격이 쾌활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 소녀를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그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소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렇죠. 먼저 사랑하니까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은 주고받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먼저 주셨지만 우리가 응답할 때 그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는 게 아닙니까? 도르가가 먼저 많은 사랑을 베풀었기에 여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겁니다. 

이렇게 인격과 사랑의 향기가 있었던 도르가에게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하죠? 40절~42절을 봅니다. “41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도르가가 살아난 겁니다. 그녀는 인생을 두 번 살았습니다. 

다시 살아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항기를 발하며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상상해 봅니다. 도르가가 언젠가 다시 죽었겠죠. 그때는 어떠했을까요? 두 번 살았으니까, 살 만큼 살았으니까 사람들이 시원한 마음으로 보냈을까요? 아닐 겁니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도르가의 인생은 정말 감동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구두쇠 스크루지를 잘 아시죠.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812~1870)의 작품「그리스마스 캐럴」(1843)의 주인공입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사람들이 모두 들떠 있습니다. 고리대금업자 스크루지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릅니다. 성금을 요청하는 구세군 사람들을 쫓아버립니다. 추워서 난로에 석탄을 넣으려는 점원을 야단칩니다. 하나밖에 없는 조카가 저녁 식사에 초대하지만, 한가하게 크리스마스가 뭐냐며 거절합니다. 모두모두 가족과 함께 지내는 밤 시간, 스크루지는 혼자서 그 날 수입을 계산하다 상점에서 잠이 듭니다. 꿈을 꾸는데 7년 전에 죽은 동료가 찾아옵니다. 

지금까지의 인색한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죽은 후에 자신처럼 쇠사슬을 몸에 감고 비참하게 떠도는 신세가 될 거라고 경고합니다. 이윽고 유령들이 나타나 그를 과거, 현재, 미래로 이끌며 그의 인생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가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욕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 스크루지는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회개하고 완전히 변화됩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며 사랑을 베풉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새 사람이 된 겁니다. 그냥 그대로 살았다면 그가 죽어도 아무도 울지 않았을 겁니다. 

여러분! 과연 어떤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겠습니까? 돈 많이 벌고 출세한 인생이요? 유명한 인생이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인생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에게 그런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 성도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으면 누가 울어줄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사십시오. 그래서 모쪼록 도르가처럼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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