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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묵은 물동이를 버립시다! (요 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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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물동이를 버립시다! (요 4:3~30)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과 한 이름 없는 여인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누구의 딸이었는지, 그녀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지, 그리고 그녀의 교육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여자 분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구약 시대와 예수님 당시에 사람의 숫자를 헤아릴 때에는 어린아이와 여자는 항상 제외되었습니다.  속된 말로 여자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당시의 여자는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의 이름조차도 불리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수넴 여인, 사르밧 과부, 가나안 여인처럼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불렀습니다.  마치 옛날 우리네 할머니들이 부산댁, 서산댁으로 불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여자라고 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라, 리브가, 한나, 마리아 등 성경 속에는 여러 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 여인의 경우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여인의 부끄러운 과거는 오히려 철저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이름도 없다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도 가리워졌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타나는 이 여인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본문 16절부터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인이 대답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대답 앞에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녀에게는 지금까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해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여인은 철저하게 타락한, 간음죄를 범한 과거가 아주 더러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고 했지만, 그것은 남편들과 사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녀의 추악하고 올바르지 못한 행실 때문에 그녀를 버렸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여인의 과거는 그렇게 아름답지가 못합니다.  깨끗하지가 못합니다.  그녀는 이런 여인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너의 남편이 다섯이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여자로서는 가장 아픈 상처인 잘못된 과거를, 모순된 과거를 들춰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거가 있는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녀가 물을 길러온 때가 제 육시쯤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제 육시는 우리 시간으로 정오 열두 시경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유대 풍속으로는 저녁 때에라야 부인들이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물을 길러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사막 지대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낮 시간에, 그것도 햇볕이 가장 뜨겁게 내리쬐는 이 시간에는 물을 길러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이 여인은 깨끗지 못한 과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녀야만 했습니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며 살았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이제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고 어느 누구도 이 여인과 상대하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사람들의 외출이 뜸한 한 낮을 골라, 사막의 햇볕이 가장 강하게 내리 쬐는 시간에 혼자서 쓸쓸히 물을 길러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많은 물을 길어 갈려고 몸부림을 쳤을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런 자신의 문제를 놓고 몸부림치고 있는 이 여인, 찢겨진 과거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 여인에게 주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여인의 상처 나고 찢겨진 아픈 과거를 끄집어내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너라"

예수님의 이 요구에 여인은 상당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 그녀의 삶의 내용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대답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말이 옳도다, 네게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니라"  짤막한 대화에서 이 여인의 숨겨져 있던 생활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자신의 아픈 과거를 들추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 낼 때, 이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부인하려고 하지를 않고 그대로 시인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이 여인이 펄쩍 뛰면서 '웬 사람잡을 소리냐?'고 잡아떼었더라면, 그날 예수님과의 만남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서는 성도의 자세가 바로 이러해야만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사람,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 이름이 없으면 어떻고, 부끄럽고 상처난 과거가 드러나면 또 어떻습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문제가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과거의 상처가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을 만나 다섯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여인은 일평생 어두운 그늘에 묻혀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솔직하게 시인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주님 앞에 고백하였던 이 여인, 그녀가 변했습니다.  근심과 괴로움의 여인이 기쁨이 넘치는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눈물과 절망의 여인이 소망이 넘치는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좇아 쾌락을 추구하던 여인이 영생을 추구하는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남들은 그래도 사랑해 줄 남편과 가정이 있습니다.  다른 여인네들은 이 뙤약볕에 혼자서 물을 길러 오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자신은 돌아보니 가정도 없습니다.  내게 남편이라고는 다섯이나 있었지만 모두가 나를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나를 상대해 주지도 않습니다.  거기에다 다른 사람들이 물을 길러오지 않는 이 폭염의 시간에 혼자서 와야만 했습니다.  자기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기구한 여인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변했습니다.  이 여인에게서 위대한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변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에서 참된 변화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해야 바르게 변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세상에 매달리고, 사람에게 매달리고, 돈에 매달리며 살던 사람이 그러한 것들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며 살게 된 것, 이것이 참된 변화가 아니겠습니까?  삶의 방향과 질이 달라진 것이 참된 변화입니다.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던 이 여인은 이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서 그의 삶의 방향과 질이 달라진 이 여인이 취한 행동을 보십시오.  본문 28절을 여러분께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지금까지 육신적인 만족으로 살아보려고 본능적인 쾌락을 추구했지만 그곳에서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물을 길으려고 왔지만 그 물은 먹어도 먹어도 내 갈급한 심령은 해결해 주지를 못했습니다.  아니 그 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영혼 깊은 곳에서는 더 심한 갈증만 밀려왔습니다.  이 여인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여인은 자신이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며 부둥켜안고 살아왔던 물동이를 과감하게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지금처럼 상수도시설이 없었던 당시의 생활에서 물동이는 참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물동이가 없으면 물을 길어다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물동이는 식수 수단이요 생활 수단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지금까지 부둥켜안고 살아왔던 그 물동이를 버렸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우나 고우나 붙들고 살아왔던 그 물동이를 미련 없이 버렸던 것은 지금 이 여인 앞에는 더 좋고, 더 귀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가 그렇게도 갈망해 왔던 인생의 모든 문제가 주님 앞에서 완전히 해결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께서도 어렸을 시절에 해 보셨을 겁니다만, 어린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모래 퍼서 밥 만들고, 풀잎 잘라 반찬 만들어 노는 소꿉장난을 합니다.  그런데 그 소꿉장난이 끝나고 이제 진짜 밥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면 아이들은 모래밭에 그것들을 그냥 그대로 버려 두고 갑니다.  그 모래 밥상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좋은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진짜 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까지 죄에 파묻혀 살면서 여섯 명씩이나 남자를 바꿔가며 소꿉장난 같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생활은 언제나 고독한 것이었습니다.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그 영혼 깊은 곳에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밀려오는 갈증은 더욱 심해져갔습니다.  끝없이 밀려오는 고독과 허무함으로 어쩌면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이 자신을 태워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녀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변했습니다.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부둥켜안고 살아왔던 묵은 물동이를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 모두가 부활의 주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삶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의 성질과 가치관과 삶의 내용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예수를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그의 삶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의 인격과 가치관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삶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인격의 변화가 예수를 만남으로 우리들에게서도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이 묵은 물동이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이 여인에게 있어서 묵은 물동이는 세상의 정욕으로 가득 찬 물동이였습니다.

옛날 그 당시에는 신분이 높은 여인들은 물을 길러 다니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여인은 날마다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것도 불볕 더위가 심한 대낮에 말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아무도 오지 않는 그 시각에 혼자서 외롭게 무거운 물동이를 들고 우물가에 나와야만 했습니까?

우리는 본문의 여러 정황을 살펴보건대, 그녀가 이 시간에 물을 길러 나와야만 했던 이유를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 시간에 우물에 나온 것은, 또 다른 어떤 남자를 찾기 위함이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 시간에 우물에 오는 사람은 양떼를 치는 목동들이거나 아니면 길가는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의 이 남자가 아닌 또 다른 저 남자를 찾아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낮에 우물에 나온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그녀는 세상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여인의 남편이 다섯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남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원인은 두 가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품행이 올바르지를 못해서 보다못한 남편들이 그녀를 버리고 떠나갔던가, 아니면 바람난 그녀가 남편을 버렸을 것입니다.

요즘말로 한다면, 그녀의 남편들이 그녀를 '왕따'시켰던지, 아니면 그녀가 남편들을 '왕따'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녀에게 있어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원인이 어디에 있었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은 이 여인은 자신의 정욕을 따라서 마음대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세상의 정욕을 따라서, 육체적인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마음내키는 대로 살아가면 그 순간은 좋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존재로 느껴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꿀발림 된 독약과 같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꿀발림이 된 독약을 아십니까?  처음에 입에 댈 때에는 달고 맛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삼키게 되면 죽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철학과 교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옛날에 사냥꾼들이 여우를 잡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 여우가 워낙 꾀가 많기 때문입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우가 살구씨를 참으로 좋아한다고 합니다.  여우는 아주 먼 거리에서도 살구씨 냄새를 맡고 달려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사냥꾼이 여우가 잘 다니는 길목에다가 독약을 잔뜩 묻힌 살구씨를 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냥꾼이 숨어서 기다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우가 살구씨 냄새를 맡고 왔습니다.  그리고 여우가 살구씨를 먹는 것을 보고 사냥꾼은 이제 여우를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우가 살구씨를 조금 먹다가 그냥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여우는 이 살구씨에 인간들이 독약을 묻혀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금만 먹었던 것입니다.

제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사냥꾼은 여우가 잘 다니는 길목에다가 먼 거리를 여러 곳에 독약을 묻힌 살구씨를 덤성 덤성 놓았습니다.  여우가 살구씨 냄새를 맡고는 어김없이 왔습니다.  그리고 전날처럼 살구씨를 조금만 먹고 가버렸습니다.  조금 가다보니까 또 살구씨가 있습니다.

여우는 살구씨를 보고서는 먹지 않고서는 못 견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살구씨를 조금 먹고 갔습니다.  조금 가다보니까 또 살구씨가 있습니다.  여우는 이번에도 독약이 묻은 살구씨를 조금 먹고 갔습니다.  그렇게 살구씨를 조금씩 조금씩 먹었던 여우는 결국 독약이 온몸에 퍼져서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냥꾼이 여우를 잡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 인간은 죄에 대해서는 달콤한 맛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은 우리 인간은 죄에 이끌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의 정욕을 따라 마음내키는 대로 방탕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처음에는 좋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살구씨처럼 살콤하고 달싹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결국은 비참해지고야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독이 온 몸에 퍼져 죽은 여우처럼 죄성이 우리의 몸과 영혼을 짓눌러서 어둠의 자녀로, 버림받은 자로 하나님 앞에서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도 처음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섯 명의 남편이 떠나갔습니다.  이웃도 떠나갔습니다.  오직 그녀에게는 세상 정욕의 상징물인 묵은 물동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적인 욕구를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육체적인 정욕에 자신을 내던지게 되면 영적인 욕구를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게 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게 됩니다.

가인이 그러했습니다.  가인은 질투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니까 사랑하고 보살펴주어야 할 동생을 질투한 나머지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땅에서 유리하는 저주받은 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사울은 권력의 정욕에 사로잡혀서 사위인 다윗을 질투하게 됩니다.  겸손하였던 그가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결국에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의 온 집안이 길보아 전투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굶주렸을 때에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목이 마르게 되면 물을 마셔야 한다는 것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영적으로 주리고 목마를 때에 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왜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세상의 정욕을 따라 마음내키는 대로 살아왔던 이 여인은 지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영적으로 매우 주리고 목마른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이 우물에 물을 길러 나왔지만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영혼의 갈증은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더 많은 물을 떠 갈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영혼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그 갈증은 더욱 강해집니다.  그래서 밤마다 영혼의 목마름을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만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생명수 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 앞에 선 이 여인의 간절한 소원을 여러분은 들어보십시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리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앞에 선 이 여인이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본문 28절을 다같이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이 여인은 생명수 되는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렇게도 소중히 여겼던 그 묵은 물동이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그 기쁨을 가슴에 가득 안고 지금까지 담을 쌓고 살아왔던 이웃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생명수 되는 주님을 만났던 이 여인, 분명 그녀 의 삶은 변했습니다.  아름답게 변했습니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과 괴로움에 가득 찬 묵은 물동이를 내던지게 되니까 인생의 모든 문제가 순식간에 다 해결되었습니다.  구원의 손길이 이 여인에게도 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것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베풀었던 그 기쁨의 은혜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사랑으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것을 체험하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근심과 괴로움과 정욕에 가득 찬 묵은 물동이를 부여잡고 버리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여인이 정욕의 상징물이었던 묵은 물동이를 버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영생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던져 버리십시오.  이 여인이 정욕으로 가득 찬 묵은 물동이를 던져 버렸던 것처럼 세상의 욕심 때문에 꼭 붙잡고 있는 그 묵은 물동이를 미련 없이 던져 버리십시오.  그 순간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해결 받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이 은혜, 이 역사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이 여인에게 있어서 묵은 물동이는 너와 나를 비교하던 편견으로 가득 찬 물동이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이 여인은 철저하게 비교하는 편견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곤하여 우물가에 앉아서 쉬시는데 마침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여인이 주님께 대답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본문 9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너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면서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며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내니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0절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야말로 동문서답입니다.  우이동풍 마이동풍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 주전 400년경에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워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이 산이 참 예배의 장소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과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 곳도 이 산이라는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는 유대인이고 너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나는 사마리아인이고 당신은 유대인이요, 또 당신과 내가 예배할 곳은 다르지 않느냐고 비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여인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여인이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있어서 편견된 생각으로 너와 나를 비교하려고 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진취적인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너, 환경과 환경을 서로 빗대어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발전적이지를 못합니다.  그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비교하기를 잘하는 사람은 과거에 얽매여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비교하기를 좋아하고 과거에 얽매이는 사람은 그 스스로가 왜소해집니다.  옹졸해지고, 초라해집니다.  비참해집니다.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남의 잘잘못을 찾아내어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찾아내는데 더 열심이더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짧은 인생길에서 얼마나 낭비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이 여인은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은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 명의 전남편들이 왜 이 여인을 버려 두고 떠나갔을까?  저는 본문을 대하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러나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그릇된 편견을 가지고 남을 비교하는 그 소리에 질려서 떠나갔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아무개의 남편은 어떠 어떠한데 당신이라는 사람은 무엇하는 사람이냐?  아무개의 남편은 밍크 코트도 해주었다는데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느냐? 며 허구한날 비교하며 들뽁는데 견뎌낼 장사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첫째 남편은 떠나갔고 후에 만났던 또 다른 남편도 떠나갔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떠나가 버렸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게 편견과 아집으로 걸핏하면 남을 비교하기를 좋아했던 그 여인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변해도 너무 변했습니다.  비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듬직한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가지고 왔던 묵은 물동이를 내팽개치고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이웃과 담을 쌓고 살아왔던 그녀가 편견과 아집과 비교의 묵은 물동이를 던져버리니까 그 스스로 이웃 속으로 달려들어가는 삶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우리들 중에도 편협된 생각으로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비난도, 정죄함도, 남을 판단도 하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랍 나라의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대에게 잘못한 일이 떠오르거든 모래 위에 적어두고, 그대에게 좋은 일이 생각날 때는 대리석에다 기록하라."

저는 이 속담을 이렇게 풀어보고 싶습니다.
"형제에게 어떤 잘못된 단점이 떠오르거든 모래 위에 적어두고, 형제에게 좋은 점이 생각날 때에는 대리석에다 기록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남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비교할 자격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이 어떻게 남을 비난하고 비교할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비교하지 마십시오.  차별하지도 마십시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일평생 편협된 생각으로 남을 비교하면서 살아왔던 사마리아 여인이 과거 지향적이면서 남을 비교하며 헐뜯는 올바르지 못했던 과거의 묵은 물동이를 미련 없이 던져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잃었던 이웃을 되찾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함을 받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서 묵은 물동이는 그의 지나간 상처투성이의 과거였습니다.  어두운 삶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묵은 물동이를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버려야 할 것들과 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귀한 것과 필요한 것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가치 있는 것은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해로운 것은 버려야 합니다.  결코 유익하지 않은 것은 버려야 합니다.  나쁜 것들은 미련 없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묵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달려간 이 여인의 결단은 오늘 우리들에게 참으로 많은 도전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동네도, 사람도 겁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묵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뛰어가던 이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뛰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웠을 것입니다.  걸어가는 어깨는 덩실 덩실거렸을 것입니다.  입에서는 노랫가락이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을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여인은 그 이후로 자신의 그릇된 생활을 버리고 예수님의 일행을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충성스러운 여제자가 되었고 열렬한 전도자로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생을 바치고 그의 열정을 바치고 일생을 헌신하는 이런 놀라운 삶의 변화는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묵은 물동이를 버림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는 그 옛날 2천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묵은 물동이를 버리십시오.  아직도 무슨 미련이 남아서 묵은 물동이를 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내게 있는 한 나의 문제는 해결 받지 못합니다.  묵은 물동이를 붙잡고 있는 한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갈증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묵은 물동이를 버리십시오.  과거에 얽매여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 묵은 물동이입니다.  나로 하여금 주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 묵은 물동이입니다.  그 묵은 물동이 때문에 지금까지 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묵은 물동이 때문에 친구도, 이웃도 잃어버렸습니다.

그 묵은 물동이를 버리십시오.  버리면 여러분의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버리면 한숨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입니다.  버리면 불평과 원망하는 삶이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삶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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