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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고후 3: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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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고후 3:7~18)


제가 고등학생 시절의 어느 해에 당시 서울에서 복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고려신학교의 졸업식을 하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 졸업식을 위하여 우리 교단 산하의 교회들이 특별 연합찬양대를 조직한 적이 있었는데 저도 거기에 들어가게 되어서 첫 연습에 참석했었습니다.
각 교회에서 몇 명씩 모인 찬양대인지라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지휘자나 반주자도 처음 만난 분들이었습니다.
  
어쨌거나 함께 연습을 시작했는데, 그 졸업식 때 부르기로 사전에 정해져 있던 찬송이 그 지휘자에게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 찬송을 몇 번 같이 불러 보더니 그 지휘자께서 혼잣말처럼 "신학교 졸업식에는 '영광송'이 좋은데..."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다음 두 번째 연습 때에는 새로운 악보를 가져 와서 연습을 시작했는데 '영광 영광 영광 영광 영광을 주님께 돌리세."라는 가사의 찬송이었습니다.
저는 처음 배우는 것이었지만 참 아름답고 멋있는 찬송이었고, 정말 그 지휘자의 말씀대로 신학교 졸업식에 딱 어울리는 곡이어서 나중에 졸업식 날에도 아주 은혜로운 찬양이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우리 기독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지고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은혜로운 것, 가장 감격스러운 것 - 이런 분위기들과 직결되어 있는 아주 특별하고도 귀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영광'이라는 단어를 아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어떤 주제를 두고 증거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심정은 실로 자기 가슴에 벅차오르는 감격, 은혜, 기쁨 등에 휩싸인 가운데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의 심령을 그처럼 감동으로 가득 채운, 사도 바울의 영안(靈眼)에 그처럼 아름답고도 멋있게 비춰진 영광스러운 것들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오늘날도 참된 기독신자들이 상기하고 체험해 볼 때마다 똑같이 그 심령을 터질 듯한 은혜로 채워 주는 영광스러운 것들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죄인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이 바로 영광이 넘치는 복음입니다.

본문 7절부터 11절까지에 기록하기를 "7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영광 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 될 것이 없으나 11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叢?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구약의 율법이 가지고 있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이 가지고 있는 영광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라는 말은 다시 번역하자면 '돌판에다 문자로 새겨져서 사람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던 율법의 사역에도 영광이 있어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금 사도 바울이 출애굽기 34장 29절부터 35절에 기록된 사건을 회상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에 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영광을 입게 된 것이었습니다.
산 아래서 기다리던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그런 얼굴의 광채를 보고 두려워서 감히 그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을 불러 가까이 오게 하고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전해 준 후에 그 빛나는 자기 얼굴을 수건(베일)으로 가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갈 때에는 수건을 벗었다가 백성에게 돌아올 때에는 여전히 얼굴에 광채가 났으므로 다시 수건으로 가렸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사건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첫째,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사망 선고를 내리는 말씀이었지만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에 따른 영광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말씀을 듣게 될 때마다 그 얼굴의 영광이 빛나고 하나님 앞에서 물러나게 되었을 때 그 영광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율법에도 영광이 분명히 있었음을 잘 보여 줍니다. 즉 '율법의 직분(역할)에도 사람들이 감히 주목하지 못할 만한 영광'이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그러나 그 율법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완전히 드러낸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따라올 훨씬 더 중요한 구원 계시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누린 율법의 영광은 결국 "없어질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그 영광은 장차 나타날 "영의 직분의 영광" 즉 '성령께서 행하실 새 언약의 사역에 넘칠 영광' 앞에서는 자리를 비켜 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사역들을 "정죄의 직분"이라는 말과 "의(칭의)의 직분"이라는 말로 극단적인 대조를 시키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직분"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사역' 혹은 '역할'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정죄를 받고 죽을 일밖에 남아 있지 아니한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그런 저주와 사망 선고 아래에 있던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새 언약' 아래에서 성립된 '칭의'라는 역사인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과 새 언약의 대조적인 사역을 비교해 볼 때, 그 사역들이 각각 지니게 될 영광 또한 얼마나 큰 차이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까 말했던 대로 그처럼 죄인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는 율법의 사역에도 그와 같은 영광이 있었다면, 하물며 그런 죄인을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용서하고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의 사역에는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10절의 "영광 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 될 것이 없으나"라는 말도 바로 그런 뜻으로서, 구약 시대의 율법은 그 당시에는 "영광 되었던 것"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 "더 큰 영광" 때문에 더 이상 "영광 될 것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등불이 밤에는 꽤 밝은 빛을 내지만 동이 트면 희미한 불빛이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11절에서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없어질 영광" 즉 율법의 사역은 일시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며, 반면에 "길이 있을 것" 즉 십자가 구원은 영원히 적용될 새 언약인 까닭에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는" 복음인 것입니? 

이처럼 사도 바울은 십자가 구속의 언약을 생각할 때 그의 가슴 속에 감격이 솟구치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율법의 힘, 죄를 지적하고 죄인에게 벌을 내리는 그 율법의 구속력 앞에 꼼짝할 수 없었던 죄인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보혈의 공로로써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받고 의인이 될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칭의의 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의 심령으로는 세상에서 듣게 되는 말 중에, 사람들이 전하는 지식 중에, 종교들이 선포하는 진리 중에 이보다도 더 빛나는 복음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보다도 더 은혜롭고 더 감격스러운 약속은 결코 없었습니다.
아니 구약의 율법의 언약과 비교해 보아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은 도저히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의 더욱 큰 영광으로 충만한, 최고의 언약이요 최고의 구원 역사였던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깨닫고 영접한 신자라면, 그 십자가를 통한 새 언약을 생각할 때 바로 이런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불신자에게 십자가란 피가 흐르는 더러운 것, 고통이 연상되는 끔찍한 것, 죄와 벌을 상기시켜 주는 불길한 것으로만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그리고 똑똑한 현대인에게는 아무리 보아도 무슨 '기쁜 소식'이 되려야 될 수 없는, 실로 '거리끼는' 대상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택자에게만은 그 똑같은 십자가가 이처럼 영광스럽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십가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찬송 471장 3절)고, 세상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가사의 찬송을 뜨겁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에 실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것, 최고의 기쁨과 소망을 주는 것, 항상 황홀한 감격으로 넘치게 하는 것, 문자 그대로 '지극한 영광'으로 충만한 것이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 주신 새 언약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이처럼 강력하게 체험하고 자랑스럽게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고 성화의 생활에 들어간 신자가 바로 영광스러운 인생입니다.

12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12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14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소망" 즉 율법이 사람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을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선포함으로써 그것을 통하여 얻게 해 줄 수 있다는 소망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통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자신만 체험했을 뿐 아니라 남들에게 전도할 때에도 똑같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소망이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고부동한 것이었던 까닭에 사도 바울은 그것을 "담대히" 즉 당당하게 선포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를 백성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으로 가리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율법을 선포하는 자기 사명에 대하여 무슨 마음에 거리낄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전한 율법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 때문이었습니다.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즉 결국 없어지고 말 율법의 영광, 그리스도의 온전한 계시가 올 때에는 쇠하여질 수밖에 없게 되어 있던 그 율법의 영광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최고의 영광인 것처럼 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얼굴을 가렸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모세와는 달리 완벽하게 완성된 복음을 선포하고 있었던 까닭에 자기 얼굴을 가리거나 조금이라도 무엇을 거리껴 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완전히 계시된 복음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라는 문제입니다.
모세의 얼굴을 가렸던 수건은 이제는 완전히 벗겨져서 더 이상 필요 없는 시대가 이미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유대인들 쪽에서 자기네들의 마음을 가리는 새로운 수건을 쓰고 있었습니다.
  
즉 모세의 얼굴을 덮었던 그 수건이 사도 바울 당시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그 율법을 읽고 있던 유대인들의 마음을 덮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배척하고 아직도 모세의 율법에 매달려 있던 유대인들의 완고한 마음, 구약을 읽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성취를 깨닫지 못하는 그 무지한 마음은 마치 자신을 스스로 수건으로 가려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1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에서 "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15절의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는 말씀은, 그런 완악한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6절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는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서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 얼굴에서 수건을 벗었던 사실과 연관시킨 것입니다.
즉 사람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그 마음을 가리고 있던 의심, 무지의 수건이 벗겨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먼저 이해해야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어야 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믿는 믿음만이 사람의 마음을 밝히 열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깨닫는 지혜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17절 제일 처음에 나오는 "주는 영이시니"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이 땅에 사셨지만 또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주의 영"이란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보내신 성령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시듯이 성자와 성령도 하나이시라고 증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속 사역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성취하셨고 그것을 바로 성령께서 오늘날 택자에게 적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시는 죄로부터의 해방이 있다.'라는 뜻이 됩니다.
  
로마서 8장 21절의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율법이 있는 곳에는 죄의 속박만 있었지만 성령의 감화를 받아 진리를 깨닫는 자는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는 영적 해방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은 성도는 "수건을 벗은 얼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 앞에 활짝 열린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 가진 성도는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의 거울은 금속 표면을 잘 닦아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반사율이 낮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거울의 영상은 실체를 분명히 보여 주는 것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성도는 주의 영광을 완전하게 보거나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보여 주시고 반영해 주시는 그 영광이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인 것은 또한 틀림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는 보지 못하지만 분명히 진짜를 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얻은 신자의 심령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 성도는 결국에 가서는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는" 단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십자가 대속의 믿음을 확실히 가진 신자는 이제 남은 생을 통하여 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聖化)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 예수님 재림 때에는 완전한 영화(榮華)의 단계에 도달하게 됨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라고 번역된 부분은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영광을 얻게 된다.'는 뜻일 수도 있고 혹은 '성화의 단계를 지나서 마지막 영화에 이르게 된다.'는 뜻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그것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말씀대로, 성도의 성화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실로 영광스러운 과정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신자의 성화를 두고 요한일서 3장 2절과 3절에서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증거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신자의 성화 과정은 아직은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나타나지 아니한" 즉 '거울을 보듯이 조금 희미한' 상태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이라는 말씀대로 그 성화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가서는 그 주님의 영광과 똑같은 영광을 입게 될 것을 확고부동하게 소망하는, 즉 희미하기는 하지만 분명한 진짜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진행되는 성화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은 성도가 그 신앙과 성화 생활을 통하여 발하는 영광은 적어도 모세의 얼굴에서 빛나던 영광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짜를 반영하는, 즉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영하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인들은 자기의 선한 마음과 행실로 자기를 아름답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속에서 발산시키려는 영광'이지 '주의 영광을 반영하는 영광'은 아닙니다.
참된 신자는 자신이 스스로 발광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짜 '발광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입고 그것을 발산하는 '반영체'인 것입니다.

불신자이지만 그래도 착한 마음씨를 발휘함으로써 자신을 아름답게 하는 영광이 상당히 멋있게 보이십니까?
그것이야말로 '곧 없어질 영광'에 불과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까지도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는 이 놀라운 십자가 구원의 영광을 높이고 증거하는 성도야말로 진짜' 세상의 빛'이요 '산 위의 등불' 같은 찬란한 영광을 발하고 있는 자입니다.
  
생전에 많은 선행을 했다고 해서 무슨 성자니 성녀니 하고 떠받들리면서 오늘도 수많은 천주교 순례자들로부터 절을 받고 있는 그들의 유골들의 영광이 대단하게 보입니까?
그것은 그야말로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그 율법의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어두운 영광'이요 '썩은 영광'일 뿐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고 그래서 장차 누리게 될 그 그리스도의 진짜 영광에 동참할 날을 기다리면서 오늘 하루를 더욱 경건하게, 오늘 한걸음의 인생을 더욱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성도야말로 사람이 발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오늘도 보여 주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통하여 이미 죄의 더러운 것을 완전히 벗어 버린 성도에게서 빛나는 영광을 입고, 남은 생을 통하여 점점 더 그 구원의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로써 더욱 아름다워지는 영광을 발함으로써, 결국에는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저 영화(榮華)의 자리에까지 다 함께 도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재림하실 주님의 영광을 상상해 보십니까?
흔한 성화 같은 것을 보면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나름대로 한껏 영광스럽게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진짜 재림의 영광은 사람의 상상이나 표현력으로는 결코 따라갈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영광이 지금 현재 우리 눈에 부시도록 발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택자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보혈을 흘리신 그 십자가, 죄인을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새 언약의 희생 제사가 된 그 십자가에서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만이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한 영광스런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당 생활의 영광을 상상해 보십니까?
이것 역시 사람이 그리는 그 어떤 유토피아를 가지고도 비길 수 없는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록 그 영광을 100퍼센트 이 세상에서 반영할 길은 없지만, 적어도 그 영광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 기독신자들입니다.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은 성도, 그래서 그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될 영광을 소망하고 있는 성도, 그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천당 영생에 대한 믿음을 거룩하고 경건한 신행일치의 성화생활로써 나타내는 성도가 바로 이 세상 앞에서 그처럼 영광스러운, 정말 아름답고 멋지고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모두는 동계 올림픽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때문에 연일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에 휩싸여 있습니다.
금, 은, 동의 메달들은 특히 국가대표선수들에게 있어서는 다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영광일 것입니다.
  
그 외에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 기독신자의 눈에는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세상의 다른 그 어떤 영광스러운 것과도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지고의 영광 그 자체입니다.
각고의 노력과 인내를 통하여 결국 시상대 위에 올라서 그 반짝이는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고 전 세계 사람들의 귀에 애국가가 들리게 만드는 대표선수들을 보면 정말 그처럼 멋지고 훌륭하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인간사회에서 누리는 그런 잠시 동안의 영광은 우리 기독신자들이 진실한 신앙과 순결한 성화생활을 통하여 경건하고도 거룩한 성도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는 영광과는 정말이지 상대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신행일치의 삶을 통하여 그 영광을 소망하며 세상에 반영시키면서 살다가, 주님 재림하실 때에는 이제 영원한 천국 자녀의 영광에 동참하시는, 실로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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