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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산의 예수님 (마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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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의 예수님 (마 17:1~8)
   

오늘은 ‘산상변모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변화산의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의 사건을 말씀드리기 전에 그 배경을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여러 마을을 다니시는 중에 제자들에게 한 가지를 물어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들은 대로 대답했습니다.  “세례요한이라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신 주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깊은 통찰력과 영성을 칭찬하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때로부터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이 당신의 수난에 대하여 세 차례 말씀하셨는데 첫 번째 말씀이 바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때에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가이사랴에서 신앙고백의 사건이 있은 후 일주일 쯤 되었을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은 ‘엿새 뒤’라고 하였지만, 누가는 ‘여드레쯤 되어’, ‘팔일쯤’ 되었을 때에, 변화산에 올라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차이는 큰 차이가 아니며, 그런 소소한 차이점이 있다고 하여 사건을 부정할만한 수준도 아닙니다. 누가는 신앙고백한 날과 산에서 내려오신 날을 다 포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략 일주일이 지났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세 사람은 전직 어부 출신인데, 처음 제자들이요 주님의 공생애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대동하셨던 제자들이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도 이 세 제자 외에는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공생애의 마지막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 세 제자는 산골짜기 깊은 곳까지 데리고 들어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따로 데리시고 가셨는데, ‘따로’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구별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세 제자만을 데리고 가시는 것이냐?   이것은 몇 사람을 편애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에 비하여 이들 세 제자는 열정이나 인격이나 성품과 활동에 있어 좋은 면도 있었지만 누구를 데리고 가시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그래도 교회사를 통하여 보면 세 사람은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세 제자로 하여금 예수님은 과연 누구시냐 하는 것을 정확히 알게 하시고, 세상에 증인 되게 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의 증거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증언으로 채택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민, 형사사건을 다루며 증인을 세울 때는 반드시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신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 사람의 제자들은 주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기에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큰 책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초대교회의 초석을 이루었습니다.  크게 사용할 사람에게 큰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도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크게 쓰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크게 쓰임을 받고, 소중한 일꾼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올라가신 산은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갈릴리의 다볼산이라고 하였지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까운 헤르몬산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헤르몬산은 안티레바논 산맥에 위치하며, 시돈 사람들은 스닐산이라고 불렀고, 아모리 사람들은 시룐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시편에서는 한번 헐몬이라고 하였는데, 주로 구약에서는 헤르몬이라고 하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모세는 이 헤르몬산을 ‘시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헤르몬산은 해발 약 2,850m로 산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 있으며, 이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요단강으로 흘러 내려 갈릴리바다를 이루고 그 물은 이스라엘 온 땅을 적셔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 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8)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우리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기도하러 올라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사건은 앞에서 말씀하신 고난 받으실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 받고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실 것을 생각하시면서 이 대속의 십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으시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기도하신 것을 살펴보면 주님은 어려운 문제를 앞에 놓고 기도하셨고, 중대한 결단에 앞서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기도하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지금도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중대한 결정을 앞에 두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을 본받아 기도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은 곤하여 잠들었으나, 기도하는 중에 우리 주님은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 주님이 변화되신 것을 보면 먼저 얼굴이 변하였습니다.  그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습니다.  옛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율법의 두 돌판을 받아 가지고 내려올 때에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마주하여 대화를 나누었기에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지만 자신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를 바라볼 때에 그의 얼굴 피부에서 광채가 나므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모세는 백성들과 말할 때에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리고 말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변화되었는데,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입으신 옷이 변화되었는데,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하는 사람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옷은 새하얗게 되었고, 눈이 부시었고, 빛이 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중에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것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차 수난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다시금 그의 영광을 회복하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승천하셔서 지금도 그 얼굴은 해 같이 광채가 나며, 그 옷은 세상에 빨래하는 사람이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나는 옷을 입으시고 계십니다.   장차 재림하시는 주님은 찬란한 영광중에 오십니다. 

이때에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에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때까지 잠들어 있던 베드로가 깨어났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무슨 말씀을 나누는지 자세히 들어보았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서 주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주님이 세상을 떠나가시는 죽으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눅9:31에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나서 말씀을 나누신 것은 대단한 의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 모세와 엘리야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모세는 옛날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모세는 장차 메시아를 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18:15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죽었지만,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였으니,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메시야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산 채로 하늘로 들려간 사람입니다.  말4:5에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엘리야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반드시 나타나야 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반드시 우리 주님이 대속의 죽음을 죽어야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씀을 확인하는 사건입니다.  구약의 모든 계시는 예수님에게 성취되고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활동은 예수님이 오실 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은 예수님이시며, 복음인 것을 확정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별세라고 하셨는데, 그 별세라는 말은 ‘엑소도스 ’라고 하여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이란 뜻입니다.  구약에 출애굽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엑소도스’라는 말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악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죄악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수난 받으실 장소요, 부활하실 장소로,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본 베드로는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과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비몽사몽간에 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려고 하시는 것을 보면서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황홀하고 영광스러운 광경에 베드로는 그런 말을 해놓고도 자기의 한 말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산 위에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실 것도 잊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선 눈에 보이는 영광 속에 거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산 아래에 고통 받는 수많은 영혼들, 죄악으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많은 영혼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시니, 예수님이 그들과 동등하신 분으로 생각하는 것부터 잘못된 신앙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고 안식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수종들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내 문제만을 보고, 나의 안식만 추구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경륜은 무시하고 인간적인 욕심만 내세우고 있습니다.   나만 좋으면 되고, 내 문제만 해결되는 남은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오실 때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하늘에서 들렸습니다.  마3:17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시고, 확정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세 제자들은 산 위에서 일어난 신령한 사건을 접하면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나는 것을 들으면서 땅에 엎드렸습니다.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는 순간 자신들은 한없이 작은 존재요, 보잘 것 없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었고 땅에 엎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연민의 정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따뜻하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고 있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산 위에서 이런 놀라운 변화의 사건을 보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인류의 구원은 모세를 가지고 안 되고, 엘리야로도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뿐이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잠시 잠깐 동안 영화로운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주님은 영원히 영광중에 거하시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변화산의 사건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벧후1:16-18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에 베드로는 그 날의 사건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원의 주님이신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 그 산에서 가졌던 신비한 경험은 “그의 크신 위엄”, “지극히 큰 영광”, “존귀와 영광”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주님이 이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 받으실 것이지만,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려고 하십니다.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히1:3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  그리고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이런 산 위의 신령한 경험이 있을 때에 이 세상에 치우치지 않는 능력이 되고, 강력한 무장이 됩니다.   세 제자가 처음에는 이런 경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몰랐지만, 후에는 엄청난 힘이 되었고,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언하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변화되다는 말은 ‘메타모르포오마이’라고 하는데, 신약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변형을 나타내는데 두 번 사용되었고, 우리 성도들의 변형에 대하여 두 번 사용된 말입니다. 예수님의 변형은 곧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과 같이 그렇게 변화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3:18에서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새번역)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고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가고, 주님의 장성하신 모습을 따라 변화되어 마침내 우리도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변화산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 주님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이셨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구원받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나누어 짊어져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님과 은밀한 교제, 기도의 교제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의 인격도 변화되고, 심지어 용모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산 아래 질병과 고통이 넘치는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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