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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세의 뿔 (출 34: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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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뿔 (출 34:29~35)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모세 얼굴의 살결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가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거니, 그 때에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던 말을 다 마치자,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그러나 모세는, 주님 앞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나올 때까지는 쓰지 않았다. 나와서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 미켈란젤로의 착각?

설날 아침,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 ‘설날’이란 말에는 세속의 시간에서 성스런 시간으로 옮겨가는 날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시간을 새롭게 하는 날이라는 의미에서 설은 종교적인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의 어원을 ‘낯설다’라는 단어에서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설’이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시간을 뜻하는 말입니다. ‘삼가다’의 옛말인 ‘섧다’는 말을 ‘설’의 어원으로 보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삼가는 날이라는 뜻이겠지요. 한자로 설날을 ‘신일愼日’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근신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설날은 그러니까 세속적인 시간과 성스러운 시간의 경계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산이나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여겨졌습니다. 물론 회막이나 성전도 있지만 인생의 큰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들은 산이나 광야를 찾곤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에만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 엘리야, 세례자 요한, 예수님은 모두 광야를 체험한 분들입니다. 소설가 이승우 씨는 유대광야에 서 본 느낌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회색의 구릉들이 숨 쉬는 걸 나는 내 ‘눈으로’ 들었다. 광야는 홀로 고요히 신비스런 숨을 쉬고 있었다.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었던 것이다. 광야는 그 고요함과 신비스러움으로 나를 압도했다.”(<<내 영혼의 지도>>, 살림, 1999, 67쪽)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세속과 성스러움의 경계를 오가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인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해 제작한 작품 중에는 <모세像>이 있습니다. 조각으로 표현된 모세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근육질의 사나이입니다. 팔과 다리는 단단해 보이고, 꼬불꼬불한 수염은 배까지 내려옵니다. 

그는 오른손으로 십계명 돌판을 꼭 부둥켜안은 채 뭔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모습은 경외감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당혹스럽게도 그의 머리 위에는 자그마한 뿔이 두 개 솟아 있습니다. 아이들이 보면 도깨비라고 할 겁니다. 애들 말로 이게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이란 말입니까. 그 작품을 본 사람들은 미켈란젤로가 성 제롬이 번역한 라틴어 성경(Vulgate)을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제롬은 히브리어로 ‘빛나다’는 뜻의 ‘콸렌qalen’을 ‘뿔’이라는 뜻의 ‘콸란qalan’으로 읽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을 ‘모세의 머리에 뿔이 났다’는 뜻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머리에 솟은 뿔은 미켈란젤로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는 피렌체 최고의 명문 가문인 메디치가에 속한 로렌초의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그리스 철학과 신화에 익숙했던 그는 눈에 보이는 물질이나 형상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드러내는 것을 예술적 이상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고대 신화에서 ‘뿔’은 대개 ‘영적인 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모세像에 뿔을 덧붙임으로써 모세를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선 사람, 하나님과 하나 됨을 경험한 이상적 인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성경은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나타난 까닭을 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29) 그 빛은 결국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빛’은 어떤 것일까요? 창조의 첫날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창1:3) 했던 그 빛일까요?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춘 참 빛이었을까요? 무엇을 의미하든 빛은 하나님과 연관됩니다. 

진리가 마치 섬광처럼 우리 삶을 비출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다보면 어떤 빛이 섬광처럼 우리 삶 전체를 관통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육체적 욕구와 사회적 관습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삶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빛 말입니다. 평생토록 한 번도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만 있으니,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렸다.”(시82:5)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강 하구에서 썩은 물고기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갈매기들은 높이 그리고 빨리 날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하는 동료 갈매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인력에 끌려 하늘을 잊고 사는 이들은 가련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유다서의 표현대로 “불만에 싸여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요, 자기들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입으로 허풍을 떨다가도,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남에게 아첨을 합니다."(유1:16) 길 잃고 떠도는 별들인 그들을 위해 마련된 것은 짙은 어둠입니다. 하지만 진리의 조명을 자주 받아 거의 밝음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일러 성자라 합니다. 모세의 얼굴에 드러난 환한 빛은 하나님을 만난 이가 맛본 기쁨과 경외심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의 앞부분에는 구름에 싸여 내려오시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출34:6-7)

하나님의 선하심을 머리가 아닌 존재 전체로 맛본 사람은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몸을 맡겨본 사람은 깊은 평화와 안식을 누립니다. 우리 삶에서 떨쳐버리기 어려운 불안과 두려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아입니다. 지켜야 할 자아로 인해 우리는 다른 이들과 세상을 경계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타자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말은 “내 거야!”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외부 세계를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기 시작합니다. 삶이 고단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깊은 일체감 속에서 말씀을 나눈 사람은 자기를 잊습니다(忘我). 내가 없으니 두려움도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아를 잊은 사람에게서 떠오르는 빛은 평온함으로도 나타나고, 인자함으로도 나타납니다. 깨끗함으로도 나타나고, 거룩함으로도 나타납니다.

하지만 모세의 빛나는 얼굴은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자아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낯선 모습이었기에 사람들은 선뜻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그
때서야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들려주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떠오른 빛으로 인해 그 말씀은 권위 있는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빛은 그들에게 선포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내는 외적 표징이었던 셈입니다. 

• 수건으로 가리다

모세는 말을 다 마치면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자기 나름의 해석을 시도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얼굴에 너울을 썼지만, 그와 같은 일을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고후3:13)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에서 빛이 사라지는 광경을 백성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그 황홀하고도 친밀한 일치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맥락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얼마나 유한한가를 말하기 위해 이 예를 들고 있습니다. 시간이 가면 저절로 스러질 율법의 빛에 비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비춰진 복음의 빛은 결코 스러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조금 달리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모세가 자기 얼굴을 가린 것을 겸허함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는 말씀을 전하는 자이지만,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다가서려면 그들과 같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우리는 겸비의 그리스도를 배웁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2:6-7)

옛 사람은 진리 안에서 사는 사람의 특색을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여 엉클어진 것을 풀고, 그 빛을 감추어 먼지와 하나로 된다”(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老子 4章)고 요약했습니다. 너무 날카로우면 사람들이 다가설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는 더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해야 상대방의 날카로운 것도 무디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생각이나 뜻을 너무 내세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는 별명을 들으면서까지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 수난을 앞둔 주님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염두에 둔 것은 변화산 사건입니다. 수난의 시간을 앞두신 주님은 가까운 제자 셋을 데리고 다볼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거룩하게 변화된 주님의 모습을 뵙게 됩니다.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마17:2b). 그 놀라운 광경을 보면서 제자들이 느낀 것은 경건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신비스럽고 초월적이이서 매혹적이지만, 낯설기에 두렵기도 한 체험을 가리켜 종교학자인 루돌프 오토는 ‘누미노제’(Numinose)라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누미노제를 경험했습니다. 영광의 길이 아니라 수난의 길을 가야 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바울 사도의 서신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후4:6) 

주님의 빛나는 얼굴은 역사의 어둠을 뚫고 살아가야 하는 제자들의 마음에 밝혀진 꺼지지 않는 빛이 되었습니다. 그 빛은 절망으로부터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었고, 매인 데 없는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해주는 거대한 뿌리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질그릇 속에 간직한 보물’이라 말합니다. 바울은 이 보물을 간직한 사람의 삶을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4:8-10)

사순절이 시작되기 직전 주일인 오늘은 교회력으로 산상변화주일입니다. 수난의 골짜기를 걷기 전 주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제자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태초의 어둠을 밝힌 그 빛이 모세의 얼굴을 통해, 그리고 주님의 얼굴을 통해 나타난 것처럼, 이제는 우리의 얼굴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저는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라”(눅11:35)는 말씀을 붙들고 사순절 순례의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사순절은 어둡고 우울한 여정이 아니라, 마음에 하늘의 빛을 받은 이들의 순례 여정이 되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시간과 성스러운 시간의 갈림길인 설날 아침, 주님의 신령한 빛이 우리 마음과 삶을 두루 비추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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