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13)

  • 잡초 잡초
  • 223
  • 0

첨부 1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13)
  

언젠가 어느 대학 교수팀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무엇인지를 통계적으로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보고에 따르면 일반명사 중에서는 '사람', 고유명사 중에서는 '한국', 동사 중에서는 '하다', 형용사 중에서는 '없다', 그리고 접속사 중에서는 '그러나'라는 단어들을 가장 많이 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만일 기독교인에게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를 찾아보았더라면 틀림없이 '사랑'이란 단어가 되었을 것입니다.
  
'약방에 감초'란 말이 있듯이, 정말 '사랑'이란 단어는 기독신자에게 있어서 감초나 다름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기독신자의 사랑'에 대하여 성경 전체에서 가장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는, 그래서 흔히 '사랑 장(章)'이라고 불리고 있는 실로 유명한 장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장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단어의 정의부터 확실히 해 놓고 시작해야 합니다.
  
본문의 '사랑'을 두고 '사람에게 베푸는 자애나 자선'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기독교계 안에도 꽤 많이 있는데, 영어 성경에도 보면 'love' 대신에 'charity'로 번역한 것들이 옛날부터 있어서 그런 오해들을 부추기는 데에 조금은 일조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의 '사랑'이란 어디까지나 '아가페'란 단어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뜻하는 '필레오'(우정)나 '에로스'(연정)나 '스톨게'(가족애)의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질이 다른 사랑으로서, 바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아가페 사랑은 말할 때에는 항상 '십자가 방향의 사랑', 즉 '수직과 수평 양쪽 방향으로 작용하는 사랑'이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나 사이의 사랑'이 먼저 성립되고 그 후에 '나와 형제 또는 나와 이웃 사이의 사랑'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 장'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수직적인 사랑'을 빼놓고 그냥 '사람끼리의 수평적인 사랑'으로만 알고 들어가면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꼴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본론에 들어가서, 그렇다면 그 진짜 사랑 즉 '십자가 방향의 사랑'이 과연 어째서 기독신자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초와도 같이 요긴한 것이 됩니까?
이에 대하여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영감시켜서 세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이 시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진짜 사랑은 교회 내에서의 각종 은사 활용에 필수요소입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에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먼저 12장 31절 하반절을 보면 거기에 "...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사실 이 부분은 12장이 아니라 13장에 직결되어 있는 문맥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12장에서 여러 종류의 은사들에 대하여 설명하고 난 후에 이제 그 모든 은사들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최상의 방편'이 바로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약 진실한 사랑도 없이 은사라는 것을 활용하려 하면 그 얼마나 큰 부작용들을 낳게 되는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중요한 은사라고 보고 있던 네 가지 은사, 즉 '방언, 예언, 믿음, 구제'를 대표적으로 열거하면서 예를 들고 있습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이란 방언을 위시하여 그 외에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입을 통하여 나오게 되는 모든 종류의 말을 총망라한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가 받은 은사나 직분을 따라 여러 종류의 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이 만약 사랑이 없이 하는 것이 되면 오직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즉 그저 남의 귀를 괴롭히는 잡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자기 딴에는 '좋은 말'이라 해도 거기에 사랑이 없으면 그 소리란 그저 쇳덩어리 때리면 나오는 소리, 아무 인격이 없는 기계적 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속에부터 '예수 사랑'이 전혀 없는 목사가 설교할 때 그것은 그저 회중의 귀에 지겹기만 한, 정말 '설교를 짧게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소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영혼을 아끼는 마음'이 전혀 없는 장로가 당회에서 발언할 때, 그것은 '제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어만 주면 반만이라도 될 텐데.'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시끄러운 잡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라는 말은 그야말로 신앙의 지적 문제에 있어서 완전 통달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란 앞서 12장 9절에서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나니)"라는 말씀에서도 나타나는, '특별 은사로서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 얻게 되는 믿음'은 은사의 종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지만, '남다른 능력을 발휘한다든지 큰 일을 추진하고 실행하는 믿음'은 특별한 은사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은사 역시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사용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nothing'입니다.
그런 사람은 '중요하지 않는 존재' 정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영적 감동이 없이 식은 신앙 지식만 가지고 있는 교인, 그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한 열정적 사랑 없이 그저 의례적으로만 봉사하는 교인 -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신앙 경력이 오래 되고 설혹 중요한 직분을 가졌다 해도 실상은 교회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라는 말은 자기 재산을 다 팔고 자기 몸 전체를 다 바쳐 남을 돕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완벽하게 보이는 헌신적인 구제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으로 남을 구제하면 그 자신에게도 유익이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에게 착한 일을 좀 해 주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자기에게 공로(merit)로 돌아와서 쌓이게 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선행은 본인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즉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 사이에 먼저 사랑 관계가 확실히 성립되어 있지 않으면, 제아무리 기독교의 이름으로 박애를 펼치고 신자 이름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한다 해도 자기 자신의 구원 문제에는 그 선행이란 것이 아무런 효과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사랑', '형제 사랑'이 없는 교회생활이란 것은 피차 듣기 싫은 시끄러운 잡음만 남발하고, 교회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며, 결국 자기 자신에게 아무 유익한 것이 없는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신자들이 교회중심으로 발휘하는 그 어떤 은사, 섬기는 그 어떤 형태의 봉사, 충성하는 그 어떤 종류의 직분에도 결코 이 참된 사랑이 빠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짜 사랑'의 감동과 충동을 가지고서 각자가 받은 은사를 십분 활용함으로써 선한 일의 봉사를 충성스럽게 하며 교회를 질서와 화평으로 온전히 세울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진짜 사랑은 개인의 신앙과 성화 과정에 필수요소입니다.

4절부터 7절까지에 기록하기를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라는 말씀은 남에게 대하여 감정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친절한 자세를 지키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임을 가리킵니다.
"투기... 자랑... 교만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은 자기 인격 속에서 경쟁심이나 명예욕을 제거하는 일도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대로, 대인관계에서 예의를 지키며 공익을 존중할 줄 아는 자세 역시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했듯이, 사람이 흥분하게 될 때 증오나 미움이 쉽게 일어나며 그것이 동기가 되어 남을 해치려는 악한 생각으로 발전되기 마련인데, 물론 사랑만이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해 줄 수 있습니다.
이상의 모든 것들이 바로 '사랑'을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예하는' 성화과정인 것입니다.

사랑은 또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했습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아주 잘 오용되는 경우 중의 하나가 바로 '불의를 덮어 주고 이해해 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신자는 이 문제에 있어서 결코 혼동하면 아니 됩니다.
불의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시편 5편 4절에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말씀하시는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악을 두둔하고 소위 기독교적 사랑이란 말로 슬쩍 얼버무리며 무마시키려는 것은 정말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신성모독적 행위일 뿐인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어디까지나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는 자기가 불의의 반대편인 복음 진리 편에, 죄악의 반대편인 선과 의로움 쪽에 서 있는 것에 대하여 뿌듯한 자부심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참된 사랑이란 이처럼 악에 대한 경각심과 전투의식을 유지하며 항상 진리 편에 요지부동으로 서서, 그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사는 생활입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사랑은 '바른 진리'를 지키는 신앙 사수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란 말은 '어떤 환난이 닥쳐도 결코 믿음을 잃지 않으며'라는 뜻입니다.
즉 앞에서 말한 '진리에 입각한 신앙'을 그 어떤 시험 가운데서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에서 '견디다'라는 말은 '인내를 지속적으로 발휘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내세의 구원을 기다리는 확신을 가지고 모든 연단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시험과 연단 중에서도 참고 견디며 끝까지 믿음과 소망을 지키는 '성도의 견인'을 가능케 해 주는 것도 바로 '사랑'입니다. 
오직 예수님 사랑하는 이 진짜 사랑이 있어야만 그 모든 것을 인내할 수 있는 넉넉한 힘을 얻게 됩니다.
바로 로마서 8장 35절부터 37절의 말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말씀 그대로인 것입니다.

왜 기독신자라 하면서도 그 인격이나 품행이 불신자보다도 못합니까?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먼저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조건적 사랑'의 체험이 전혀 없으니, 그 사랑의 빚을 갚는 '이웃 사랑'이 나타날 아무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왜 교인들 중에 그렇게도 쉽게 신앙생활에서 탈선하고 파선하는 자들이 생깁니까?
애초부터 '처음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어떤 것인지, 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대속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의 뜨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그 사랑의 맛을 조금도 보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독신자로서의 바른 신앙 확립의 근거와 모든 덕행의 배경 역시 오로지 '사랑'일 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 5-7절에도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진짜 사랑이 있어야만 신자다운 성품이 형성되고 성화의 진보를 뚜렷이 보여 주게 되며, 그 성화가 완성될 그 날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신자로서의 믿음과 소망을 끝까지 지키게 되는 것을 깨닫고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진짜 사랑은 천국에서의 영생에서도 필수요소입니다. 

8절 이하 13절의 말씀에 "8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라는 말씀은 '사랑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 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 활동과 기독교인의 복음 전파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때를 말합니다.
확대해서 말하자면 계시와 전도의 중심인 성경 그 자체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때가 온다는 뜻입니다.
모든 기독신자와 교회가 목숨처럼 중히 여기고 붙들고 있는 성경이 필요 없어지는 때란 도대체 언제이겠습니까?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기독신자들의 현재는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과 일반계시를 통하여 깨닫게 되는 진리는 사실은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알 수 없으며 마지막 재림과 심판과 내세에 대한 지식 역시 아무도 완전히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의 전체란 것은 신구약 66권에 완전히 다 기록할 수 없는, 아니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한 책을 두기에 부족한"(요 21:25) 방대한 양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이 세상에는 그 성경조차 100퍼센트 완벽하게 해석하고 가르칠 수 있는 목사는 한 명도 없기 때문이며, 또한 아직 성화가 완성되지 않은 죄인으로서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기독신자가 가지고 있는 영적 지식이란 '부분적 지식'이며, 비유하자면 '어린아이의 지식' 즉 단순하며 현재적인 지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장성한 사람"은 보다 종합적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폭넓게 파악하는 지식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완성되는 때에 가서는 모든 기독신자들이 바로 그런 '장성한 사람의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각 개인 성도의 '성화'가 완성되는, 즉 영적으로 완전히 장성한 '영화'의 수준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라고 한 것은 당시에는 청동 따위의 금속면을 닦아서 거울을 만들었으며 그런 거울은 반사율이 낮아서 그저 '희미하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희미하게 보이더라도 그것이 실재하고 있음은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거울에 얼굴이 희미하게 비쳐도 분명히 내 얼굴이요, 별빛이 희미하게 보인다 해도 그 별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완성인 천당 세계가 이 세상에 사는 우리의 눈에는 아직 희미하게 보여도 그것들이 분명히 실재하고 있으며 반드시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즉 우리가 부분적으로 안다 하더라도 적어도 구원에 관한 기본적 진리, 복음의 요지만 정확히 알고 믿고 전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즉 믿음의 눈으로만 뵈옵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이제 직접 내 육안으로 뵈옵게 될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온전히 아는" 지식 역시 얻게 됩니다.
완전 성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는 부분적으로 몰랐던,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 어떤 신앙 문제에 대해서도 완전한 해답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모든 신자에게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했습니다.
'신망애(信望愛)'는 신자가 적어도 현세에서는 항상 보유하고 살아야 할 필수요소들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셋 중에 천당에 가서도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당에 가면 거기에서는 더 이상 '믿음'이 필요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마주보고 있는데 무슨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믿음은 이 세상에서 아직 '부분적으로 알 때'에 필요할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천당에 가면 거기에서는 '소망'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이미 천당에 가서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천당 소망이 따로 더 필요하겠습니까?
소망은 아직 천당이 '희미하게 보이는'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사랑'만은 우리가 천당에 가서도 여전히 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이 세상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그 천국에서도 여전히 조금도 변함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사랑'이 천당에 들어갔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줄어들 리도 만무합니다.
오히려 그 사랑은 더욱 충만해지고 완전한 사랑으로 완성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은 이 세상에서만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오직 '사랑'만이 금세와 더불어 내세의 천국에서도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신자의 유일한 필수품입니다.
바로 그래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인 것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방언할 줄 몰라도 되고 설교를 다 못 알아듣는다 해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직도 모른다면 이것은 정말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혹 교회생활에 관해서나 신앙 지식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나 약간 의문 되는 것이 남아 있다 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사랑, 이 사랑만큼은 절대로 몰라서는 아니 되며 털끝만큼도 의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이 '제일 되는 사랑'은 천당에 가서야 새로 배우게 되는 과목이 아니며 천당에 가서야 더 자세하게 알게 되는 지식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 십자가 사랑'은 진짜 신자라면 반드시 이 세상에서 완전히 떼고 평생토록 통달하고 있어야 할 필수과목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예 천당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에 가서 영생하며 사는 데에 필수적인 조건, 그리고 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조건인 '예수 사랑', 이 진짜 사랑만큼은 꼭 잘 알고 끝까지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약방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감초라면 그것은 또한 반드시 진짜라야 할 것입니다.
어느 약재에나 들어가야 할 것이 만약 가짜가 되면 그것을 섞어서 지어 놓은 모든 약들을 다 망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봉사와 성도 교제, 개인 신앙과 경건 생활 - 다 중요한 것들이지만 만일 그것을 '질 떨어진 사랑'으로 섞으면 다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 확신과 천국 소망 - 정말 좋은 말이고 최고의 복이지만 '가짜 사랑'을 가지고는 절대로 성취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입에 발린 듯이 남발하고 있지만 거기에 정작 '십자가 대속의 사랑'이 빠져 있는 천주교와 기독교 이단들이 바로 그런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의 교회', '아무 유익도 없는 복음', '아무 것도 아닌 교인'을 양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진짜 사랑은 교회 내의 모든 직분, 봉사, 교제에 필수조건입니다.
또한 사랑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성화 생활을 성장시키는 데에도 필수과목입니다.
더욱이 사랑은 나중에 천당에 가서 살 때에조차 절대로 빠지지 않는, 신자의 영원한 필수 지참물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아무 사랑만 가진다고 되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오직 진짜 사랑, 참된 '예수 사랑'으로만 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통하여 믿음을 바로 지키는 '참된 사랑의 소유자(所有者)'로 살다가 바로 그 사랑을 가지고 천당 소망까지 이루고야 마는 '예수님 사랑의 영원한 수혜자(受惠者)'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