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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성장 신비 (엡 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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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성장 신비 (엡 4:1~16)
 
 
제가 전에 몽골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의료봉사팀과 같이 가서 제가 여느 나라를 다니며 봤지만은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주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초원이 뭔가? 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요, 참으로 맑은 호수, 또 여러 가지 좋은 경험을 했는데……. 특별히 생전 처음 말을 탔는데 2시간을 탔습니다. 아! 그거 되게 재미있더라구요, 말타는 것이 아주 좋더라고요~. 이런 경험을 했는데 이걸 계기로 해서 옛날에 몽골의 영웅이었던 ‘징기스칸’의 대해서 좀 알고 싶어서 책을 읽었습니다. 

마침 지금 ‘CEO 징기스칸’ 이라고 해서 그 800년전 영웅이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읽고 있습니다. 저도 읽어보았는데요, 징기스칸이 말입니다, 그가 정복했던 땅이 얼마나 넓으냐 하면 칠백 칠십 칠만 평방킬로미터! 이것이 얼마나 되느냐하는 얘기냐 하면 우리 역사에서 아는 대로 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 이런 사람들이 정복했던 땅을 다 합쳐도 이 사람 하나만 못합니다. 역사상에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시대의 영웅입니다. 

징기스칸! 150년간을 통치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입니다. 도대체 징기스칸이라는 사람이 누구냐? 그 강인함과 그 지도력과 독특한 철학! 우리가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책을 읽다가 깜짝 놀라고 큰 감동을 받은 부분은 바로 이겁니다. 그가 젊었을 때 다른 부족들이 쳐들어와서 자기가 사는 마을을 몽땅 초토화시키면서 자기 마누라를 뺏어갔어요,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올 능력이 없었습니다. 싸울 힘도 없습니다. 만용을 부려봤자 소용이 없어요, 그는 다시 힘을 키웠습니다. 힘을 키워 가지고 다른 부족들 둘을 연합을 해서 연합군을 만들어 가지고 자기 아내를 빼앗은 부족을 쳐들어가서 당당하게 명분 있는 싸움을 합니다. 승리하고 아내를 도로 빼앗아 왔습니다. 도로 찾아왔는데……. 

그러나 그 아내 버르데는 이미 만삭이의 몸이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적장의 아들은 이름을 “조치” 라고 지었는데 몽골말로 ‘나그네, 손님’ 이라는 뜻이 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름을 짓고……. 그는 그 아들을 그 적장의 아이를 자기 장자로 입적했습니다. 적장의 아들을 자기 장자로 입적시켰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런 얘기 들어봤어요? 글쎄올시다. 우리 좁은 생각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그는 당당하게 족장의 아들을, 자기 아내가 낳은 아들을, 자기 장자로 입적을 시키고 함께 하게 됩니다. 저는 이 한 가지 사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바로 징기스칸의 사람됨 모습입니다. 왜냐고요? 그 아내는 잘못이 없으니까! 자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 그릇은 어느 정도 입니까? 여러분의 사람됨은 어느 정도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것이 그 사람의 그릇이요, 크기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격의 성장,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우린 신체적 성장을 말합니다. 요새 와서는 건강 지수니 건강 연령 이라는걸 말합니다. 나이는 많으나 젊음 같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젊었는데도 벌써 몸이 다 늙어 버렸어요.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호적에서의 나이를 가지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 사람의 건강 연령이 얼마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런가 하면 ‘정신연령’ 이 중요하지요, 몸만 컸지 정신은 멍청하단 말이에요. 이것도 문제 아닙니까? 

요새는 지능지수라고도 하고, 또 감성 지수, 도대체 당신의 가슴은 얼마큼 넓으냐? 감성 지수를 말하기도 하고요. 인격지수,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적 인격에 성숙도를 말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중생함을 말합니다. 그것은 태어나는 것이죠. 겐네테 아노텐 - born again, 신기원입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출생을 말하지만 그 다음에는 성화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장해야 되는 것이죠, 성장하여 어느 수준에 있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씀해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장목표는 인간적인게 아닙니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인해서 평가되는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함에까지! 그리스도인의 장성한, 충만한 거기까지 성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장 목표입니다. 누구를 닮는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리스도를 닮아야 되는 거예요, Christlike personality,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장 목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이 성장이라는 것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로운거죠. 그리고 의식 이전의 일이요, 우리 인간의 마음대로 성장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공부를 많이 했다고 꼭 인격이 성장하는 것은 아니고요, 그렇지 않습디까? 몸이 크다고 속사람도 큰거 아니더라고요, 여러분! 그 속사람의 그리스도인의 크기라고 하는 것은 역시 신비로운 것이에요. 

오늘 성경말씀이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라게 하신다.’ 성장에 원동력은 그리스도의 생명력 이라는 것이죠. 보세요, 식물을 보아도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말하는 논법대로 말하면 “씨를 뿌리는 자도 있고, 물을 뿌리는 자도 있고, 가꾸는 자도 있다. 거두는 자도 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시다.” 그렇지요. 자라게 한다는 게 문제지요. 

이런 우스운 얘기가 있어요. 어느 농촌 마을에 새로 그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했어요. 도시에서 젊은 목사가 부임해 왔습니다. 그 해에 그만 가뭄이 들면서 그 농작물이 말라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너무 답답해서 목사님께 와서 “목사님, 우리는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망칩니다. 목사님이 특별히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 좀 해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 젊은 목사님이 그날밤 철야기도를 하고 “주여. 비를 내려주시옵소서.” 간절히 억세게 기도했대요, 그랬더니 비가 왔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 가지고 홍수가 나가지고 농작물 다 떠내려가고 말이지, 근데 교인들이 또 교인들이 모여 가지고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농사를 전혀 모르는 철없는 목사가 와서……. 기도를 해도 정도껏 해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비가 와야 되지만도 적당히 와야 되고 우리가 애쓰지만은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는 역사가 아니면 성장 할 수가 없지요, 하나님께서 목표를 정해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지혜도 주셔서 성장하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하겠구요, 
  
또 ‘성장’ 이라는 이야기는 이건 새로워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전에 나왔던 잎이 떨어지고, 새로운 잎이 나오고, 파충류 같은걸 보면 허물을 벗고 새로운 것을 입고, 계속 새로워지고, 새로워지는 역사가 성장이에요, 그대로 있는 게 아니에요. 낡은 것은 벗어버리고 새로움으로 향해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깨닫는 것! 새로워져야 되고, 느끼는 것! 감동하는 것! 행동하는 것! 전부 성장해야 되요, 새로워질 때 옛것을 벗어버려야 돼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옛것을 버리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버리게 만들어요, 많은 사건을 통해서 내가 버리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새롭게 새롭게 발전하고 성장하게 된다. 또한, 성장이라는 것은 자라면서 내 역할, 내 기능을 알게 됩니다. 좀 더 성서적으로 말하면 내게 주신 소명, 내게 주신 경륜, 내게 맡겨진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성장이에요. 유치할 때는 모든지 다할 것처럼 생각을 해요. 아니에요, 성장하면서 내가 할 일이 이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준 일은 이거다, 그걸 알게 되고 거기에 집중하며 살게 되죠. 

우스운 얘기입니다마는, 저희 집에 유치부에 다니는 손자, 손녀가 있어요. 그 손녀가 어느 날 나한테 와서 진지하게 말합니다. “할아버지, 내가 오빠하고 결혼을 할 라고 했는데 오빠가 엄마하고 결혼한다고 해서 나는 부득불 아빠하고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진지하게 말하더라고요. 생각하는 대로 다 되는 줄 알아요. 그게 바로 유치하다는 것이죠. 

여러분, 소원빈대로 다 됩니까? 기본적으로 태어날 때 남자, 여자! 이건 다르잖아요. 벌서 반은 정해 졌어요. 운명이……. 그뿐입니까? 좀더 성장해 보면 내가 할 일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준 일은 이것이다…… 생각하잖아요. 

오늘 성가대를 보면 반주하시는 분이 있고, 지휘하시는 분이 있고, 성가대가 있고……. 성가대도 파트별이 다 있어요. 소프라노 할 사람이 베이스 하겠다고 고집부리면 되겠어요?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그게 노력한다고 되겠어요? 하나님이 내 목소리를 어떤 방향으로 정해 주었나, 그걸 알아서 그쪽으로 노력하고 그 역할을 해야되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성장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심리학자 하인츠 코후트 라고 하는 분이 인간 성장의 목표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삶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삶의 한계의 능력을 즉시 할 수 있어야 되요. 한계가 있는걸 알아야 되요. 그게 바로 철이 난다는 것이에요. 모든지 다 아는 게 아니고 모든지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철난다’ 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걸 알아 야죠. 그래서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자신을 해방할 때에 가능해 지는 것이고, 자기만의 몰입에서 벗어나서 자기를 확대하게 될 때, 그래서 사랑으로 성숙해 나가는 것이다. 

성숙하게 될 때! 첫째, 창조적 정신으로 노동을 즐기게 된다. 여러분, 아직도 일하는 게 피곤합니까? 부엌에서 일하는 것도 맘에 안들고, 밖에서 일하는 것도 맘에 안들이고, 도대체가 일하는 게 싫어! 그 사람은 아직도 유치원생이에요. 성장을 하면은 그 의미를 알면서 행복한 거예요. 일하는 게 너무 너무 좋아요. 대게 보니까 퇴직한 다음에 깨닫더라구요. 그때 철나는 거예요. 이제 “일하는 게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월급이 문제가 아니다. 일하는 게 중요한거지.” 진작 알았더라면 좋을 뻔했지……. 

일을 즐기는 거예요. 왜요? 정신세계가 앞서 가기 때문에! 정신세계가 육체적인, 물리적 세계를 능가 할 때 우리는 즐겁게 일할 수가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숙’ 이라는 거예요. 또, 아이들보고 공부하라고 해도 공부하기 싫어하잖아요. 그러나 성숙한 다음에는 공부하려고 애쓰잖아요. 스스로 공부를 즐기잖아요. 그만큼 성장한 것이죠. 

또한, 감정이입에 능력이 생긴다. 나 하나의 감정에 붙들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좀더 큰 보람을 내가 이입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지기도 하고, 자기 삶의 한계를 즉시 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이렇게 될 때에 높이 성장하게 되는 여유가 생겨서 유머 감각이 생깁니다. 내 이 설교를 하면서 가만히 보면요, 오늘처럼 웃는 얘기를 해도 안 웃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유치한 사람이에요. 몸과 마음이 쪼들려 가지고 안 웃기로 결심한 거예요. 참 비참한 사람이지요, 왜 이럴까? 넉넉해지면 웃을 일도 많고 재미있는 일도 많은 세상입니다. 모든 일을 다 재미있게 볼 수가 있어요. 이게 바로 성숙함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그랬어요.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거예요. 사랑을 먹고 자란다는 것이에요. 얼마나 사랑하느냐? 얼마나 사랑을 받았느냐?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느냐? 그것이 문제지요. 

세네카라고 하는 철학자는 말합니다. “다음과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의 본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누구냐고요?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 자기를 욕하고 다니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 자기 마음을 결코 열어주지 않는 사람! 이 세 가지 사람을 사랑할 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 원수를 사랑해 보셨습니까? 참으로 원수를 사랑해 보세요. 내가 이만큼 높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나를 괴롭히는 자를 위해서 정말로 기도하며 사랑해 보세요. 어느 사이에 나도 모르게 신비롭게 내 영적인 능력이 높은 수준에 성장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원수 사랑!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입니다. 그래야 사랑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범사에 잘 할지라! 여러 가지경우에 모든 사건을 통해서 성장한단 말입니다. 말씀으로 성장케 하고, 성령으로 성장케 하고, 그리고 모든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계속 성장하도록 인도하시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커리큘럼이 있어요. 우리를 교육하고 우리를 성장시키는 교과과정이 있다는 말씀이죠. 

철학자 딩거(J.E. Dinger) 라고 하는 분이 이런 재미있는 얘기를 합니다. “나에게는 친구 세 사람이 있다. 하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요, 하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요, 하나는 나에게 무관심한 자다. 다 친구다.” 왜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겸손해야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니까! 나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조심성을 가르친다.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나에게 자립성을 가르치더라. 모든 사람이 다 나에게 스승이 되고 나를 성장케 하는 분들이요. 그래서 다 세 가지 친구가 있다는 뜻이죠. 

성장은 신비입니다.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장정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것을 주어서 나로 하여금 성장하게 하십니다. 요새 와서 군복무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를 듣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닙니다. 이거는요, 본래 그랬어요. 더 심했고요. 

옛날에는……. 어느 할아버지가 청와대에다 편지를 했대요. 편지에 ‘내 손자가 군대에 갔는데 제발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세요.’ 전쟁이 있을까바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군대 안에 복잡한 문제가 많다고 하는데 제발 무사히 돌아왔으면 하는 얘깁니다. 역시 군인 세계에 문제가 있긴 하지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제가 옛날에 전쟁통에 군대 생활 할 때는 질서가 없어서 더 무서웠습니다. 되게 맞았습니다. 말도 안되게 때립니다. 매일 때리는데 좌우간 어떤날은요, 때리지 않는 날은 좀 불안해요. ‘이거 또 밤중에 깨워가지고 때릴 거 아니야?’ 맞고 자야 편하더라고요. 맞고 자야……. 그게 군대 생활이에요. 이게 생명이 걸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강한 훈련을 필요로 하는데요. 이런 모순, 저런 모순! 모순을 견뎌 내는 게 바로 훈련이에요. 다른 거 없어요. 이치에 맞다고 해결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 많은 시련을 통해서 인격이 성장합니다. 

여러분, 보다 더 성장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많은 시련을 겪은 사람이에요. 지금도 가끔 꿈을 꾸고 그라는데요. 군대생활하고 북한에 가서 광산에 가서 고생하고 강제 수용소에서 살던……. 그런 시련이 없었다면 오늘 내가 없지요, 그러한 시련이 오늘 나로 나되게 한 것이다. 

여러분, 은혜가 뭡니까? 신학적으로 말할 때 은혜란 그리스도를 닮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 병들어서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면 병드는 것이고요, 실패해서 나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들면 실패가 은혜요, 많은 환난을 겪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면 그 자체가 은혜란 말씀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범사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사랑으로 순종해 나가면 모든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에 그 인격에 가깝도록 계속 나를 성장 시켜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이만큼 믿음을 주시고 이만큼 성장케 해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바라오니 더 확실한 믿음을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 높이 성장한 인격을 주시사 이 고된 세상에서도 늘 승리 할 수 있으며 이 모순된 세대에서도 초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소서.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는 주의 성숙한 자녀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곽선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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