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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닮기 위한 조건 (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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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닮기 위한 조건 (마 5:1~3)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은 멀고도 가까워, 
주님과 함께 함께 걷는 길은 멀고도 가까워
고통도 기쁨으로 변했네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은 멀고도 가까워
주님과 함께 함께 걷는 길은 멀고도 가까워
고통을 나누며 기쁨을 나누며
주님과 함께 걸어가노라면 
나는 어느새 나는 어느새 주님을 닮아
주님을 닮아가 주님을 닮아가

정말 가슴에 와 닿는 찬양입니다.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이 길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함께 걷는 동행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동행자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주님과 함께 가다보면 고통도 기쁨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과 나눕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닮아갑니다. 

<닮는다>는 것은 정말 깊은 의미를 느끼게 하는 표현입니다.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란 말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란 말보다 더 진한 표현입니다. 사랑은 과정이고, 닮는 것은 사랑의 결과입니다. 닮았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라,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닮게 됩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상대방의 모든 것이 우리 영혼에 들어오고, 그의 모든 것을 점점 닮게 됩니다. 습관, 표정, 생각, 취미 등 모든 것을 닮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여전히 우리 마음 바깥에 있고, 그를 닮을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점점 닮게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참 사랑으로 사는 부부는 늙어가면서 닮게 됩니다. 생각도, 식성도, 인생관도 닮습니다. 심지어 외모도 닮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닮기를 원한다면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닮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긴 여행을 떠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부부 사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주님을 닮는 것, 이것이 우리의 영적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닮으면 우리 영혼의 모습, 삶의 모습이 점점 변합니다. 이것이 영적 성형수술입니다. 저는 우리들이 외모를 고치는 성형이 아니라 영혼이 주님을 닮아 가는 성형수술을 받길 원합니다. 외모를 고치는 성형수술은 몇 시간, 혹은 몇 일간의 입원으로 충분하지만. 영적 성형수술에는 평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외모를 고치는 성형수술은 <누구처럼 해 주세요>라고 마음에 드는 모델을 선택할 수 있지만, 영적 성형수술은 선택이 없습니다. 모델은 오직 한 분, 주님이 계실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잘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님은 어떤 분이세요?>라고 물으면 주님께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이 됩니다. 마치 친구가 <얘, 네 남편은 어떤 사람이니?>라고 물으면 할 말이 많은 여인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그 여인 보다 남편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남자의 어머니가 더 많이 알았겠지만, 수십 년 지난 후에는 그의 아내가 그의 어머니보다 그에 대해서 더 정확히, 많이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경험이 길어지면 주님의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알게 됩니다. 나중에는 주님이 기뻐하는 것을 우리도 기뻐하고,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하게 됩니다. 주님과 통하게 됩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주님과 함께 가다 보면 어느 새 <주님 전문가>가 됩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전문가가 있습니다. 얼마 전 가족들과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습니다.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나중에 온 손님들이 소주를 주문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소주를 두어 병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하는 말이 제 귀에 들렸습니다. <시원한 소주로 바꿔 주세요> 그 말을 들은 제가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차가운 소주를 마셔도 어차피 조금 있으면 속에서 불이 날텐데, 저 분은 차가운 소주로 바꿔 달라고 하네.> 그랬더니 제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저 아저씨가 차가운 소주로 바꿔 달라고 한 게 아니야.> <그럼 뭐야?> <저 아저씨는 '시원(C1)소주'로 바꿔 달라고 한 거야!> <시원소주가 뭐냐?> <그거 텔레비전에서 선전하는 소주 이름이야.> 그러고 보니 저는 시원소주를 달라는 말을 차갑고 시원한 소주로 바꿔 달라는 말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원소주란 ‘CLEAN NO.1’이란 말을 줄여 C1이라고 부르고, 우리말로도 시원소주라고 부른 것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아빠는 그것도 몰라?> 

여러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술이라곤 알지를 못하는데요? 혹시 여기 소주 이름 줄줄 꿰는 분이 있다면 나중에 조용히 만납시다. 진로골드, 순한진로, 참나무통맑은소주, 그린, 뉴그린, 금복주, 참소주, 천년의 아침, 백학, 정이품,..... 어떻게 알았느냐구요? 어제 인터넷에서 알았습니다. 

제가 소주 이름을 몰라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아빠, 이거 설교 예화로 써라!> 누가 목사 딸 아니랄까봐 설교 예화까지 걱정해 줍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저 소주 전문가 아닙니다.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주님 전문가가 되고 싶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교회 모든 교우님들이 다 주님 전문가가 되길 기원합니다.

주님을 잘 아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행복과 성공적인 삶이 달려 있습니다. 호세아서 4장 6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화가 나셨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인가를 다양하게 말씀하셨지만, 백성들은 기억조차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 대해 무식해졌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서 6장 3절에서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에 대해 배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그 해답을 찾기를 원합니다.

첫째, 주님께로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셨습니다. 즉 무리를 보신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무엇을 바라셨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따라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산아래 있는 많은 무리들이 따라 올라오길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산에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1절을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무리들, 사람들은 산에 올라오지 않았고, 소수의 제자들만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스승에게로 나와야 합니다. 오지 않는 사람은 배울 수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 배우려면 주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세상의 학문은 독학도 가능합니다. 혼자서 책과 씨름하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인터넷으로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배움에는 독학이 없습니다. 

오늘날 주님을 배우는 가장 정확하고 올바른 방법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주님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노라면 어느 새 주님이 우리 마음에 와 계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주일마다, 예배마다 나오십시오. 예배하는 시간의 양만큼 주님과 가까워질 것입니다. 절대로 주일 예배를 범하지 마시고 철저히 주일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 밖의 예배는 위험합니다. 많은 이단들이 우리를 노립니다. 와서 배우라고 유혹합니다. 이런 모임은 정말 위험합니다.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들, 영혼과 가정과 인생을 파괴하는 이단에 빠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교회 안의 예배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또 주님에 대해 기록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주님을 배우는 데 있어서 성경 이상의 교과서는 없습니다. 올해 우리는 성경 읽기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3월 초순에 특별한 성경 읽기 시간을 진행할 것입니다. 한 주간이면 신구약 성경을 1 독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경에 재미를 붙이고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러브레터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 그 맛에 깊이 들어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 직접 배우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이중표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목사님은 신학교에 입학한 후 열심히 신학을 배웠다고 합니다. 교수님들에게 정성을 들였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감동이 왔습니다. <너는 신학교에 왜 왔느냐?> <예, 주님에 대해 배우러 왔습니다.> <그러면 너는 누구에게 배우느냐?> <예, 교수님들에게 배웁니다.> 그 때 마음에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넌 왜 나를 배운다고 하면서 교수들에게 배우느냐? 교수들이 하나님이냐? 넌 내게 직접 배워라. 내게 직접 배워....!> 

그 후 목사님은 주님께 직접 배우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늘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성령께서 주님의 성품과 뜻과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늘 주님과 동행하길 위해, 주님처럼 겸손하고 온유하길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길 원합니다. 주님을 더 잘 알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우리가 주님께로 가까이 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기도 시간을 풍성하게 가지시길 바랍니다. 마치 사랑하는 이와 데이트를 하는 마음으로 속삭이십시오. <주님, 저 지금 출근합니다. 제 마음에 감동을 주옵소서.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옵소서.....사무실 사람들에게 밝은 표정으로 대하게 하시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게 해 주옵소서.. 오늘도 제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옵소서.> 그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줄 믿습니다.

둘째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온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그 첫 마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가난>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신약성경에는 가난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프토코이>요, 다른 하나는 <페네스>라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페네스>가 상대적 빈곤을 의미한다면, <프토코이>는 절대 빈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산이 1억인 사람은 재산이 3억인 사람보다 빈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의 빈곤은 상대적 빈곤, 즉 <페네스>입니다. 그러나 1억은커녕 당장 오늘 먹을 끼니도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런 가난을 <절대 빈곤>이라고 하는데, <프토코이>가 그런 상황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둘 중에서 <프토코이>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심령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심령이 절대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은혜가 없으면 죽습니다. 오직 주님 당신만이 저의 소망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게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완전 빈털털이입니다.>라는 절대 빈곤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주세요>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여기서 못 얻으면 다른 곳에서라도 얻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빈곤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믿는 구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직 주님의 은혜 외에는 희망이 조금도 없음을 고백하는 태도를 말씀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만 목숨을 걸고 주님을 배우게 됩니다. 

1687년 독일의 <뤼네부르크>에 있는 어느 교회의 외빈 숙소 마루바닥에 나이 25세의 젊은 목사님이 엎드려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요한복음 20장 31절을 본문으로 설교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본문으로 설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본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본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을 이렇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기독교 복음의 아주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왜 설교할 수 없다고 울면서 기도했을까요? 성경에 무식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이 분은 어릴 적부터 성경을 배웠고, 성경을 원어로 일년에 일곱 번 이상 읽었습니다.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쳤고, 동료 교수들과 <언어성경연구회>를 만들어서 성경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이처럼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분이 그 다음 날 설교를 했을까요? 하지 못했을까요? 그 분이 남긴 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는 큰 의심과 염려를 가지고 무릎을 꿇었지만, 다시 일어설 때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큰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했지만, 기도를 마치고 일어설 때에는 두려움이나 의심 없이 목숨을 바칠 만큼 확실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다. 나는 잠자리에 들었지만, 너무 기뻐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분은 독일 경건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 할레 대학에서 큰 활동을 했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목사님입니다.

성도 여러분, 프랑케 목사님이 보여준 태도가 바로 절대적으로 가난한 심령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엎드릴 때 우리는 주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역자도 배우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모든 성도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끊임없이 배우고 채우길 기원합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과 함께 걷기를 좋아하십니다. 주님은 교만한 사람은 싫어하십니다. 무식한 사람보다 정말 더 불쌍한 사람은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2010년 한 해는 주님을 더 많이 알아가고, 배우는 해가 되길 원합니다. 이렇게 할 때 믿음이 자랄 것입니다. 삶이 성숙될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은 새가족 교육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새가족 교육이 끝나면 세례 교육이 시작될 텐데, 그것도 잘 배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새가족들로 이루어진 구역이 편성될 텐데, 계속해서 영적으로 배우시길 바랍니다. 오래 믿은 분들도 주님을 평생 배워야 합니다. 봄이 되면 시작될 여러 훈련과 성경공부에 적극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걸고 배우면서, 주님을 더욱 더 닮아가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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