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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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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1~3)


창세기 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세기 12장은 마치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의 과정과 같습니다. 창조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가득한 가운데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이 선포되자 흑암이 물러나고 빛이 임합니다. 혼돈이 물러가고 질서가 이루어집니다. 공허가 물러가고 생명으로 충만해집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의 상태는 11장 30절의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는 말씀과 12장 4절의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는 말씀으로 상징됩니다. 불임과 늙음, 곧 절망과 저주와 무능력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이 모든 것은 희망과 능력과 축복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읽은 1절에서 3절까지의 짧은 말씀에는 ‘축복’이라는 단어가 모두 다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네게 복을 주어”,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절망을 희망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믿었던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입니다. 부활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죽은 자와 같이 희망 없고 무능력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복의 근원으로 열국의 아비로 세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도 이와 동일합니다. 마른 막대기와 같이 건조하고 속에서 분노의 불만 토해내던 우리로 하여금 눈물이 있고, 감동이 있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남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염려와 두려움과 의심으로 가득하던 우리 인생을 평화와 기쁨과 든든함과 신뢰함으로 바꾸셨습니다. 인색하고 자기만 알던 우리 손이 이제는 베풀고 사람을 살리는 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고 이것이 부활입니다. 찬송가 495장의 가사처럼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저주스런 우리 인생이 축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축복은 우리가 간구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어는 철저히 하나님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I"라는 단어를 무려 다섯 번이나 사용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그냥 그렇게 인생을 끝내려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이었고, 그 인생을 향한 놀라운 축복과 계획을 말씀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기독교가 믿기 쉬운 것은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인생에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가난하고 비우고 겸손하고 애통하는 심령입니다. 우리 안이 다른 것들로 가득할 때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은 물질, 번영, 명예, 안전, 영향력 등 여러 가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축복들은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보면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땅의 축복이고 둘째는 큰 민족의 축복, 셋째는 복의 근원의 축복입니다. 1절에 “지시할 땅으로 가라”, 2절의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2절과 3절의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입니다. 

이 세 가지 축복은 이후 믿음의 자손들인 이삭의 생애와 야곱의 생애에 반복됩니다. 이삭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26:4) 이삭이 처음 하나님을 만날 때 주셨던 축복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벧엘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주었던 동일한 축복을 다시 약속해주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28:13-14)

이스라엘 역사는 단순합니다. 모세 오경을 거쳐 다윗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 세 가지 축복, 곧 땅의 복과 큰 민족의 복과 복의 근원의 복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실현시키기까지의 과정입니다. 또 이 세 가지 복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것을 다시 회복시키는가가 이후 구약을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신약은 이 세 가지 약속이 다시 교회를 통하여 새롭게 실현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오늘 말씀의 본문은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라 할 것입니다. 

구약을 관통하는 중심은 언약사상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언약은 계약과 같은 말인데 여기서 구약과 신약 할 때의 이 ‘약’자도 곧 언약을 의미합니다. 언약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을 지키시고 축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축복의 내용을 바로 땅과 큰 민족과 복의 근원 이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신약 곧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을 맺게 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이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축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큰 민족의 축복

먼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역사에게 가장 먼저 이루어졌던 축복은 큰 민족의 축복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아브라함의 생애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예수님의 천국비유에 등장하는 겨자씨 한 알의 역사와 같습니다. 겨자씨는 세상의 모든 씨앗들 중 가장 작은 것에 속합니다. 그 크기가 마치 볼펜 똥만큼 작습니다. 그러나 그 겨자씨가 싹을 틔우고 자라면 그 가지에 새가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가 됩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생은 작은 겨자씨에 비교될 정도로 볼품없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역사는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삭과 야곱에 이르고, 야곱 대에 12명으로 불어나며 애굽으로 이주할 때는 70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400년 후 출애굽할 때쯤에는 엄청난 수로 불어났습니다. 출애굽기 1장 7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고 말씀합니다. 출애굽할 때 장정만 60만 명, 아이들과 여자를 합치면 근 200만 명에 이르는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식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이 연약해질 때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넓은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 사방을 둘러보게 하며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겠다”(창13:16)고 하며 용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또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또 어느 때는 바닷가로 데리고 나가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같게”(창22:17)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이 약속의 씨앗이 되는 이삭 한 사람을 얻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22장까지 무려 열한 장이 이삭 한 사람을 얻기까지의 과정입니다.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렵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삭 한 생명을 계기로 그 안에서는 치열한 믿음의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자 그 이후는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이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큰 민족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와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이 심지어 이슬람교까지 자신들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아브라함의 묘를 성지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축복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사60:22)는 비전으로 부르십니다. 이를 표준새번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이라도 한 족속의 조상이 될 것이며, 가장 약한 이가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위대한 가문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장자가 되어 여러분 대로부터 가문이 꽃을 피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은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떡 덩어리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막6:37)고 하였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5천 명의 사람도 능히 먹일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되시길 원하시는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부림을 받는 존재가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그런 사람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20:6)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왕입니다. 여러분이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많은 사람을 다스리는 그런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왕이요 지도자같은 사람이 되시길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강하게 훈련시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 한 사람을 얻기까지 25년이라는 세월이 걸리고 많은 고난을 겪었던 것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컸기 때문입니다.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는 법입니다. 사병은 대략 한 달 정도면 훈련이 끝나지만 장교는 기본 훈련이 6개월이나 걸립니다. 사관학교를 나온다면 최소한 4년의 세월을 필요로 합니다. 그가 혼자만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도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의 졸장부가 아닌 믿음의 대장부가 되시길 바랍니다.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목표는 나 한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큰 민족이요 나라입니다. 왕에게는 왕의 품성이 있어야 합니다.

땅의 축복

두 번째 주신 축복은 땅의 축복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이 약속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조카 롯과 헤어지고 상심해 있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창3:14) “너는 일어나 종으로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3:17)고 하셨습니다.

이삭 한 생명을 얻어 큰 민족을 이루기까지의 역사가 창세기 출애굽기 시작 전까지의 역사였다면 그 이후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거쳐 여호수아에 이르기까지는 이 땅을 얻기 위한 역사입니다. 여호수아서 11장 23절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이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음에는 그들의 목표는 바로 이 땅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땅을 주시길 원합니다. 시편에서는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2:8)고 말씀합니다. 땅은 곧 물질적인 권세를 말합니다. 옛날에는 땅이 곧 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입니다. 구약의 축복은 물질적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만드셨고, 하나님 나라는 이 땅 위에 건설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하나님의 축복이 물질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물질에 매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인생이 될 것을 염려하여 물질을 멀리하라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우리가 물질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그런 사람이 물질의 권세를 갖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사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사60:5)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축복은 가난이 아니라 땅을 차지하고 재물이 함께 하는 부유한 삶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문제는 의로운 사람은 물질이 없고, 물질을 가진 사람 중에는 의로운 사람이 드물다는 점입니다. 물질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존경받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서 의로운 부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존경받는 부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부자는 물질을 얻는 과정이 정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부자가 되어서 그 물질을 하나님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잘 사용할 줄 아는 부자를 말합니다. 

먼저 주님의 방식으로 물질을 벌어야 합니다. 주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시편 37편 11절과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온유하면 빼앗긴다고 하지만 주님은 온유한 자들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차지하게 되셨는데 이는 사단에게 굴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물질입니다. 

잘 번 다음에는 잘 써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자입니다. 복음서에서 물질과 관련된 비유도 많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는데 그 이유는 물질을 잘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해 소출이 많아 창고를 늘리기만 한 부자를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고,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등장하는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부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인색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었고 자기가 불의로 쌓은 재산이 있다면 4배로 보상하였기에 그는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의롭고 깨끗한 부자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의 축적 과정도 깨끗하지 못하고 부를 얻고 난 후에도 환원하지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세금을 덜 내고 강남이 비강남 지역을 향하여, 수도권이 지방을 향하여 자신의 권력을 내어놓지 않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돈은 말 그대로 돌아야 돈입니다. 그래야 경제가 순환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물을 내려 보내지 않습니다. 한 곳에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막힌 곳은 썩고 없는 곳은 마르게 됩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우리 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자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를 존경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갖은 편법과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위치만 지키려만 하지 사회적 환원이라는 면에서나 도덕적인 면에서 건강한 영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목표가 이런 부자가 되는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더 났습니다. 

의롭고 깨끗한 부자가 많아져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과 사회를 생각할 줄 아는 부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요케 하신 까닭은 혼자만 잘 먹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 되어 그 이웃에게도 축복이 넘치도록 하라는 뜻에서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 회사를 하나님의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사업 목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업이 도덕적으로 건강하고 건실하며 효율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원들의 복지나 인권이나 만족도 면에서 우수한 그런 회사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근본정신으로 하는 기독교 기업에서 이익 때문에 비정규직을 방치하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이랜드 사태는 신앙인의 기업이 어떠해야 하는지 교훈을 줍니다. 우리 영향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받은 복의 영향력이 미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도요타 자동차가 대량리콜사태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렇게 위기를 맞은 근본 원인중 하나로 사람들은 도요타가 원가절감을 위해서 마른 수건도 쥐어짜는 생산방식을 문제 삼습니다. 이것이 곧 부품업체에게 전가되어 불량 부품을 공급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은 성공했는데 자칫 잘못하면 한 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제 값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공정무역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원산지에 제 값 받고 구입하자는 운동입니다. 축구공 생산지는 파키스탄입니다. 

월드컵 공인구들은 이곳에서 주로 생산되는데 어린아이들의 바느질로 만들어집니다. 축구공을 만드는데 오각형과 육각형 모두 32조각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1620회의 바느질을 해야 합니다. 그 결과 아이들이 받는 하루 일당은 300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축구공은 15만원에 팔립니다. 커피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산지에서는 1kg 원두에 100원이고, 하루 종일 일해야 1-2달러에 불과하지만 선진국 커피 점문점에서는 그 200배의 가격에 팔립니다. 그러니 동티모르 네팔 에티오피아 등의 나라는 가난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에게 제 값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값을 받고 팔았다면 이들의 가난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아이티 지진으로 20만 명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엄청난 자연재해가 원인이지만 또 하나의 원인은 가난의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프랑스와 미국의 식민지였고, 그들의 농촌이 미국 등의 대기업에 의해 파괴되고 모두 도시로 몰려와 도시빈민을 형성하는 바람에 이번 피해가 더 커졌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 또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되 깨끗한 부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자가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가 부요하고 물질적으로 풍성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깨끗해야 하고 그 부요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부요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 이런 깨끗한 부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복의 근원의 축복

세 번째 복은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에 대해서 창세기 18장 18절은 보다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복의 근원의 축복은 무엇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복은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복도 없이 어떻게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되겠습니까? 3절의 말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는 그 바탕에 강대한 나라에 대한 생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강대한 나라가 되면 그 나라를 저주하는 나라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 나라를 축복하는 나라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남한이 물질적으로 잘 되고 북한이 가난하게 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남한은 미국과 잘 지냈기 때문이고 북한은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강대국을 저주하고서는 작은 나라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즘 북한이 우리나라를 제치고 자꾸 미국하고만 상대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가난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존심 굽히지 않고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려니 힘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이 약속은 다윗 솔로몬 시대에 성취되었습니다. 열왕기상 4장 20절 이하는 그 때의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 솔로몬이 하수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 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그 나라들이 공을 바쳐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섬겼더라” 다윗 솔로몬 시대는 강대한 나라가 되어 주변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 주변국들은 이스라엘과 관계를 잘 이루어야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법도와 이스라엘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주변 나라가 성공하기 위해서 삼아야 할 모범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에서 사사기 사무엘 상하에 이르는 말씀은 이스라엘이 강대한 나라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입니다. 이후 역사는 다윗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이고, 메시야는 바로 이런 다윗 시대의 이상을 실현할 자로 기대되었습니다.

땅과 큰 민족만 있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보잘것없이 사는 민족은 볼품없습니다. 힘과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힘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여러분을 아무도 우습게 여길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질그릇 같아 보이나 그 안에는 보배가 담겨 있습니다(고후4:7). 

우리 안에 있는 보배를 보지 못하고 우리는 스스로 자조적이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는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하게 보시고 영향력 있는 인생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려 하시는데 스스로 마음을 닫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 안에 있는 자가 복 있는 자이고 그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힘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냥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며, 민족 이기주의에 빠진 그런 나라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합니다. 복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마치 샘에서 물이 솟아 주변까지 적시듯 복이 흘러 주위 사람들도 복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관심은 자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향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기에 세계 전역으로 흩어져 살았지만 그들은 역설적으로 그 곳에서 자신들의 위대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둠을 밝히는 빛들로 세우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쓰였던 이사야 49장 6절에서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우리들 때문에 세상이 맛을 내고 세상이 어둠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일 잘 되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고 낙심한 자가 다시 살아나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실제 복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옷가게를 들르면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 사람이 있으면 왠지 힘이 솟습니다. 복 있는 사람 요셉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복 있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와 함께 하는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십니다.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아브라함의 이름은 정말 유명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실상은 유명한 자입니다(고후6:9).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그분에게 우리 인생을 맡길 때 하나님은 우리 이름을 창대케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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