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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아브라함은 예배를 드렸는가? (창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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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브라함은 예배를 드렸는가?  (창 12:5~9)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슨 일입니까? 제사입니다. 신약적인 표현은 예배입니다. 본문에 보면 가나안에 들어간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한 일이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한 일이 제사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가장 우선순위는 예배였습니다. 그는 자식의 목숨보다 예배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얻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100세에 자식을 봤다면 그 자식이 말썽꾸러기일지라도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너무나 착했고 너무나 효자였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전혀 반항을 하지 않는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100세에 얻었고 착한 아들이니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귀한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받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사의 명령, 예배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우선순위는 자식보다 제사 즉 예배였습니다. 
일 년이 넘는 방주 안의 생활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노아는 집도 지어야 되고 양과 염소를 위한 우리도 준비해야 되고 밭과 초장도 만들어야 됩니다. 할 일이 태산 같았지만 노아는 모든 일을 뒤로 하고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그가 가나안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가나안 사람들이 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 땅을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후 그 곳에서 제단을 쌓습니다. 즉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벧엘 동쪽 산으로 옮긴 후에 장막을 치고 다시 제사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도 예배를 들렸습니다.
오늘 설교는 본문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예배를 드린 이유를 살펴보고 예배의 필요성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예배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요단강을 건너서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를 통과하고 세겜에 이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예배로 반응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예배로 반응했으나 약속하신 그 땅을 받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땅에 대한 약속을 받은 나이가 75세입니다. 그리고 약 62년이 흐른 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습니다. 사라가 죽을 때의 나이가 127세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가 10년 차이니까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땅을 약속 받았으나 62년이 지난 137세까지 가나안에서 한 평의 땅도 얻지 못하고 유목민 생활을 했습니다. 

창 23장을 보면 사라가 죽을 때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거했습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헷족속이었고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장사할만한 작은 땅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헷족속에게 400세겔의 돈을 주고 막벨라 굴을 사서 사라를 장사합니다.
이 정도 되면 보통 사람 같으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할만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습니다. 그 증거가 창 24장에 나옵니다.

아내 사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장가보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는 늙은 종을 불러서 자기 고향에 신부감을 데려오도록 명합니다. 아브라함이 늙은 종에게 당부하는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늙은 종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늙은 종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아브라함은 62년의 세월동안 성취되지 않은 약속을 그 때까지도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 6:15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오래 참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갈 3:14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일평생 예배로 반응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반응으로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신앙생활을 출발합니다. 하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지고 불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에게는 현실이 될 수 없게 됩니다. 야고보 장로는 말합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하나님은 약속하시면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항상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면 그 약속이 우리에게 실제가 될 것이지만 우리가 불신앙으로 반응한다면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조급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래 참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래 참지 못한 결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했습니다.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그 때부터 요한은 그 말씀에 복종해서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십니다. 요한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마리아를 봉양하는 도구로서의 삶에 충실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는 90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 여자들은 15세에서 18세 사이에 결혼하여 첫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마리아의 나이차는 많아야 18세입니다. 예수님이 33세에 돌아가셨으니 그 때 마리아의 나이는 50세 정도였습니다. 그 후 마리아가 90이 되기까지 살았다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마리아는 40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요한의 나이가 20대 중반의 청년 이었다면 요한은 무려 60대 중반이나 70 가까운 노인이 될 때가지 마리아를 모셨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한의 친구들은 세계 도처에서 초대교회의 영웅이 되어가고, 예수님이 계실 때는 제자의 족보에도 들지 못하던 바울이란 사람이 자기도 주님의 제자요 사도라고 하면서 세계를 누비고 다닙니다. 그런데 요한은 70 노인이 되기까지 고작 남의 할머니 뒷바라지나 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할머니 봉양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요한도 바울처럼 세계를 향해서 나아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붙잡고 40년을 순종했습니다. 요한은 40년의 세월이 헛된 세월처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요한의 오래 참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년을 젊은 시절보다 더욱 위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40년의 세월을 인내하며 마침내 마리아에 대한 봉양이 끝났을 때, 주님은 이미 노인이 된 요한으로 하여금 요한복음을 쓰게 하셨고,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까지 쓰게 하셨습니다. 
환경 보지 말고, 사람 보지 말고, 자신의 무능함도 보지 말고 주의 약속을 붙잡고 사십시오.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열정적인 예배자가 되십시오.

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을 예배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세겜 땅에 갔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거하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장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민 13,14장에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보고를 하면서 그들 앞에서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고백할 정도로 장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본 아브라함은 분명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 땅을 자기의 땅으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땅을 그냥 순순히 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위축 됐을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의미의 약속으로 들려 왔을까요? “이 땅은 네 땅이 될 거야. 염려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승리를 확신했던 증거 중에 하나가 세겜이라는 지명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세겜이란 말이 히브리어로는 ‘어깨’란 뜻입니다. 여기서 어깨는 권위를 상징합니다. 힘을 상징합니다. 사 22:22에 보면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라고 왕권을 말하고, 욥 31:36에서는 “내가 그것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라고 말하면서 변제의 능력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사 9:6에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주시면서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라고 말합니다. 어개는 힘, 권위의 상징입니다.

지명에다 지나치게 불필요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여기서 지명을 언급하는 것은 성경에서 사용한 어깨의 의미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깨의 의미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아브라함이 가졌던 세겜이라는 말의 뉘앙스하고 아주 비슷한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깨하면 뭘 의미합니까? “어깨, 저 사람 어깨야” 그러면 아주 힘 있는 사람을 연상하게 됩니다. 어깨는 힘, 권위, 능력을 상징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깨가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저의 어깨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십니다. 하나님의 나의 승리의 능력이십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이 세겜 땅에서 제단을 쌓고 가나안 땅에서의 싸움에 승리할 수 있는 에너지를, 능력을 예배를 통해서 공급 받았던 것입니다. 

예배 시간은 영적인 링거를 맡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혹시 포도당주사 맞아 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저는 피곤에 지쳐서 사역할 힘이 없을 때, 포도당 주사 한 대 맞고 나면 이상하리만치 힘이 나는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지치고 피곤하면 가끔 맞습니다. 요즘은 못 맞은 것 같은데 전에는 가끔 맞았습니다. 육체의 상태가 좋을 때는 효과를 잘 모르겠는데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한 대만 맞아도 확실히 효과가 나타나더군요. 효과가 없으면 두 대 정도 연속해서 맞아보면 확실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예배는 지친 영혼의 포도당 주사라고 생각합니다. 지치고 상처입고 넘어져서 일어날 힘이 없을 때 영적인 포도당 주사를 맞아보세요. 새 힘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드리시고 두 번으로 부족하면 세 번 네 번 예배를 드려보세요. 주님이 주시는 새 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가 살면 인생이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신앙적인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새힘을 얻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면 어디에서 위로를 받겠습니까.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안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부자를 한 15분 정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그 분이 일본에 암 수술하러 가기 직전에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평소에 늘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 했어요. “회장님! 평안하세요?” 목사님은 그분의 대답을 평생 잊어버리지 못한답니다. 그 회장님이 목사님을 빤히 쳐다보면서 “평안이라뇨?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초조하고 불안하오. 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 아주 초조하고 불안하오” 목사님은 그때 그 분이 하나도 부럽지 않더랍니다. 너무 너무 불쌍하게 보이더랍니다. 겉으로는 안 그랬지만 속으로 그랬답니다. ‘내가 낫다. 훨씬 낫다.’ 

아브라함은 예배를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 나는 무능하니 나를 도와주세요”라는 의미입니다. 

창 4:26에 보면 아담이 죽은 아벨을 대신하는 셋을 낳았고, 셋은 에노스를 낳았습니다. 에노스를 낳은 후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왜 사람들이 에노스를 낳은 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까요? 그 이유는 에노스를 낳을 때쯤에 사람들이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사람, 인간’ 이라는 뜻도 있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에노스를 낳을 때쯤 되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 즉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존재요. 전능하신 존재이신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 역시 동일한 의미입니다. 장대한 가나안 족속들을 보고 두려웠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무능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능력의 하나님,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고전 1:26-28을 보니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것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혜와 강함과 존귀함과 풍성함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미련한 우리를 들어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우리를 통해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는 우리를 통해서 있는 것들을 폐하실 것입니다. 

뉴욕에 가면 허드슨 강이 있는데 그 강의 하류에 가면 쏠트라인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소금물과 상류에서 내려오는 민물이 만나는 선을 말합니다. 날이 가물어서 강물이 약해지면 바닷물이 역류해서 허드슨 강으로 올라옵니다. 그러면 식수를 공급하는 수원지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비가 적당히 내려서 어느 정도 물이 계속 흐르게 되면 결국 민물이 바닷물의 세력을 계속 밀어내어 수원지가 안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허드슨강의 쏠트라인은 끊임없이 당기고 미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 인생살이, 신앙생활에도 있습니다. 영력이 강하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지만, 영력이 약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밀려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쏠트라인을 지키는 힘은 예배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렸고 그 힘으로 세상을 이겼으며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예배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왜 아브라함은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을까요? 그 이유는 자꾸만 하나님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아브라함은 그렇게 자주 하나님이 생각났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미나를 가거나 부흥회를 가면 제 아내는 저에게 하루에 몇 번씩 전화를 합니다. 저도 아내에게 수시로 전화를 합니다. 제 아내가 저에게 전화를 하는 것은 아내가 저를 부르는 겁니다. “경훈씨”라고는 안 해도 저를 부르는 겁니다. 저도 “은미씨”라고 안 해도 아내를 부르는 겁니다. 왜요? 사랑하니까.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제가 최은미씨를 처음 만나서 사랑에 빠졌을 때에는 제게 은미씨 생각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기도를 해도 은미씨 생각이 맴돌아서 기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은미씨도 제 생각 밖에 없었을 겁니다. 직장에 가면 쉬는 시간마다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저를 찾는 것이지요. 은미씨 퇴근시간이 되면 제가 회사 앞에서 기다리다가 만나서 데이트를 했습니다. 함께 저녁식사도 하고, 함께 차도 마시고, 함께 걸었습니다. 

밤이 늦도록 함께 있었고, 헤어지기 싫어서 동네를 몇 바퀴씩 돌았습니다. 시간이 너무 늦어지면 할 수 없이 집에 들여보내고 저는 버스도 끊겨서 걸어서 교회로 돌아갈 때도 많았습니다. 그 때는 심야 버스가 없던 때라 은미씨와 헤어지고 나면 거의 대부분 걸어서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교회에 도착하면 은미씨는 제가 도착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옵니다. 제 아내가 저를 찾는 겁니다. 그럼 또 전화통 붙잡고 사랑을 속삭였습니다. 가끔은 밤도 지새워가면서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아브라함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이 가득했습니다. 그의 머리가 하나님 생각으로 가득하니 그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제사에는 다른 사람들의 제사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제사했다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7절 하반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8절 하반절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 13:18에서도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라함의 제사는 자신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여호와를 위한 제사였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있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아내와 연애를 할 때 전도사 사례비를 한 달에 5만원 받았습니다. 그 중에 절반 정도는 어머니에게 드렸던 것 같습니다. 22년 전이지만 몇 만원으로 한 달을 살기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데이트 비용은 아내가 전부 부담을 했습니다. 차를 타면 차비, 식사를 하면 식사비, 차를 마시면 찻값, 극장을 가면 입장료, 놀이공원을 가면 입장료 거의 전부를 아내가 부담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자존심 상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돈을 쓰면서도 계절이 바뀌면 양복에 잠바에 장갑에 구두까지 사주죠. 그런데도 돈이 아깝다고 생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게 저만의 확신은 아닐 겁니다. 왜 아내가 그렇게 손해를 보는 장사를 하면서도 손해 본다는 생각을 안 했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아내가 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합니다. 아내는 사랑에 빠져서 눈이 멀었고 눈이 머니 계산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계산하지 않습니다. 계산을 하는 사이라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향한 사랑에 눈이 멀었습니다. 그러니 계산도 안 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까지 내어주셨잖아요. 이게 사랑에 눈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요 3:16에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이유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멀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그토록 받는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 하나님께서 사랑에 빠져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는 그 때 참 밑지는 장사를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보통 청년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다른 청년들보다 가진 것이 없어도 한참 부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도 가진 것이 없어서 결혼식 축의금은 아버지 빚 갚는데 사용했고, 누구나 가던 제주도 신혼여행도 못 갔습니다. 집 얻을 돈도 없어서 처가 집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저에게 전적으로 주고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사랑에 빠져서 그런 겁니다. 

저는 그 때를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더욱 사랑하려고 합니다. 저는 돈이 생기면 만 원짜리 한 장 숨기지 않고 아내에게 다 줍니다. 간혹 다른 주머니 차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 때를 생각해서 참습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셨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런 계산도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시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시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사 49:15,16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은 자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머니가 자식을 잊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잊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나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손바닥에 기록한 것이 아니고 새겼습니다. 기록한 것은 지워지는데 새겼으니 지워지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예배로 표현하십시오. 우리는 약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시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하나님께 예배하십시오. 

잠 8:17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님이 쓴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마음”이라는 글에 나오는 소녀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님이 몽골 이레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처소를 방문해 예배를 드리던 중, 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돼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때 선교사님은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이 자매의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찾아온 것입니다.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이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소녀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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