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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처를 치료하시는 하나님 (사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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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치료하시는 하나님 (사 61:1~3) 

  
사람은 자신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완전하게 꾸미고 싶어한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기에, 원치 않는 상처가 생긴다. 그때 가장 힘이 되는 말씀은,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쓸데없는 상처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꿔주신다. 어떻게 선으로 바꾸어 주실까?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다.'(고후1:3) 그 하나님은 (사40:1)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신다. 즉 우리를 위로하시고, 위로자가 되게 만드신다. 상처를 사명으로 바꿔주신다. 

위로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줌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시고,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주신다.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신다. 고통 중에 있을 때, 그 사람과 함께 하시며, 이해해 주신다. 상처 입은 영혼을 만져주신다. 

상처는 외적인 육체의 상처와, 내적인 심령의 상처가 있다. 육체의 상처는, 눈에 쉽게 띄기에, 속히 치료하려고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눈에 잘 띄지 않기에, 그냥 방치해 둘 때가 많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를 그대로 두면, 상처는 더 커지고, 점점 더 아파 온다. 그래서 삶이 흔들리게 된다.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게 된다. 자기를 비하하고, 멸시하고, 학대하여, 행복감이 사라진다.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렵다. 사람을 만나도 '저 사람도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할 꺼야'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을 기피하게 된다. 그래서 이웃과의 관계에 담을 쌓게 된다. 이것이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파괴력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으면 좋겠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덜 입히고, 덜 받을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 이미 받은 상처를 잘 치료하여서, 그 상처마저도 우리에게 유익하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상처 때문에 더 잘된 사람들도 많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어린 시절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그 상처를 잘 돌봄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고 있다. 

더 나아가,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있다. 따라서 과거에 받은 상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행복해질 수도 있고, 비참해질 수도 있다. 마음이 아플 때는, 먼저 아픔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한다. 아픈 곳이 어딘지, 또 왜 아픈지를 바로 알아야만, 바로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로 세우셨다(1下).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기서 나는 예수님을 말한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고쳐주시기 위해서다. 상처받은 마음을, 더 나아가 신분 자유인이 아닌 포로 된 자, 죄인 신분인 갇힌 자를 해방하기 위해서다. 이 말씀은 예수님 오시기 700여 년 전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표현한 말이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 가난한 자, 마음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그 당시 상황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눅4:17-21), 이 예언을 자신의 사역에 직접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이 상한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말한다. 

이 세상에는 마음이 상한 사람이 참 많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때때로 몸에 상처를 입을 때가 있다. 자동차에 다칠 수 있고, 넘어져 다칠 수도 있고, 일을 하다가 다칠 수도 있다. 여러 모양으로, 몸에 상처를 입을 때가 있다. 몸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아프기는, 마음의 상처가 더 아프다. 몸의 상처는 눈에 보이기에, 치료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 그 수도 정말 많다. 아마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의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자기 잘못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들이 있다. 남편의 실수로, 아내의 마음이 상하고, 아내의 실수로, 남편의 마음이 상한다. 또 자녀의 잘못 때문에 부모의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성도의 잘못 때문에, 목사 때문에 마음이 상한 성도도 있다. 직장상사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도 있고, 직장동료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도 있다. 또 물질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이 많고, 사업의 실패로, 마음이 상한 사람이 있다. 보증을 섰다가, 문제가 생겨서, 마음이 상한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의 부도로, 마음이 상한 사람이 있다. 실직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신 분이기에, 인간이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처를 받고 괴로워할 때, 함께 아파하신다. 

(렘8:21)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따라서 우리를 위로하신다. (2下)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예수님은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해 주신다. 예수님은 마음이 상하고, 슬픈 자를 위로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상처를 위로하실 뿐만 아니라, 그 상처를 치료하고, 영광스럽게 만들어주신다.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대신이라는 단어를 주의해서, 읽어 보라. 예수님은 재를 대신해서, 화관을 주신다. 재는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한다. 화관은 아름다운 면류관이다. 주님은 슬픔을 대신해서, 기쁨의 기름을 주신다. 

근심을 대신해서, 찬송의 옷을 입혀 주신다. 근심은 절망을 의미한다. 절망 대신 찬양의 옷을 입혀 주신다. 상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그 까닭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 때문이다. 하나님은 상처를 치유하실 때, 꼭 2가지를 사용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는 의사요, 또 하나는 약이다. 예수님은 의사가 되신다. 그래서 우리의 상한 마음을 정확하게 아신다.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해 주실 수 있는 까닭은, 친히 상처를 입으셨기 때문이다. 친히 가난한 자로 사셨고, 친히 상한 자가 되셨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포로가 되셨고, 갇힌 자가 되셨다. 

슬픔을 경험하셨고, 쓸모가 없는 재와 같은 취급을 받으셨다. 근심으로 고통을 받으셨다. 우리가 경험하는 위로는 어떤 위로인가? 우리와 같은 상처를 받아 보고, 우리가 겪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주는 위로다. 그러나 상처를 받아보지 않는 사람은, 상처를 비웃는다. 

그때 상처를 받은 사람은, 더 큰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상처를 받아 본 사람은, 상처 입은 사람을 보면, 긍휼히 여긴다. 예수님은 상처를 입으셨지만, 자신의 상처에 매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 주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의 능력으로 삼으셨다. 

상처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상처를 입은 사람만이, 상처 입은 자를 위로할 수 있다. 예수님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상처를 치유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처를 허락하신다. 상처가 없다면, 남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처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사람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은 상처를 받고,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할 때, 사람을 보는 시각, 사람을 대하는 시각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의 언어와 태도, 시각과 행동은, 그 사람의 과거에 받은 상처와, 많이 연관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을 연구해 보면, 그들 속에 상처가 많다고 한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이 사실을 알면, 그를 이해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2. 상처를 영광스럽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라. 

우리 인생은 상처 때문에, 비참해지지 않는다. 상처에 대한 잘못된 반응 때문에, 비참해진다.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해, 올바르게 반응해야 할 책임이 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1) 우리의 상처를 예수님께 가져가라. 
우리의 상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주님께 가져가야 한다. 많은 상처를 받고도, 상처 때문에 불행해 하지 않으신 분께 상처를 가지고 가야 한다. 예수님은 상처투성이 인생을 사셨다. 

그러나 주님의 인생은, 결코 비참한 인생이 아니었다. 상처가 많다고 비관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예수님께 나아가라. 그리고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보라. 예수님의 상처를 묵상하고, 자신의 상처와 예수님이 받으신 상처를 비교해 보라. 

예수님의 상처는 가난의 상처다. 머리둘 곳도 없는 가난한 삶이다. 배신당한 상처다.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예수님의 상처는 버림받은 상처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았다. 오해받은 상처도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상처는 무시당한 상처다. 멸시와 천대를 받은 상처다. 가장 소중한 것을, 모두 다 빼앗긴 상처다.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보면, 때로는 우리의 상처가 초라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작은 상처에도, 예수님은 아파하신다. 어떤 상처도 작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2) 우리의 상처를 하나님의 은혜 아래 가져가라. 
똑같은 것도 누구의 손에 올려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똑같은 음식재료도 누구에게 맡겨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똑같은 곡도 누가 연주하고,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손에 올려지느냐에 따라, 그 상처의 미래가 달라진다. 예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1:13). 따라서 상처를 흑암의 권세 아래에, 두지 말라. 사탄은 우리의 상처를 조롱한다. 

우리의 상처를 이용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에게 앙금을 품게 만든다. 복수하게 만든다. 쓴 뿌리를 가지고, 한 맺힌 인생이 되게 만든다. 과거 상처의 포로가 되게 만든다. 상처에 대한 아픔을 자꾸 상기시켜, 우울하게 만든다. 상처를 통해 억눌린 인생을 살게 만든다. 

사람들과 담을 쌓게 만들어, 모든 관계를 단절시킨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참소하는 자가 되게 만든다. 따라서 상처를 흑암의 권세, 저주 아래 두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옮기라.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라. 하나님의 은혜는 상처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영광스럽게 만든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상처를 가지고, 십자가로 나아가게 만든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만든다. 상처를 치유하는, 의사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준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치유를 경험하도록 도와준다. 사탄은 우리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려, 더욱 아프게 만든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의 상처에 기름을 부어주신다.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치료해 주신다. 아픔을 달래 주시고, 고통을 제거해 주신다. 그런데 마음 속 깊이 감추어 둔 상처를 다시 꺼내서,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가져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감추어 두는 경향이 있다. 

아무에게도 들러내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아 있으면, 사탄은 그 상처를 이용해, 우리 인생을 파멸로, 이끌어 갈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아프지만 우리의 상처를 꺼내어,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가져가,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한다. 

주님께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도록, 맡겨야만 한다.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심을 믿고, 맡기라. 이렇게 하나님께 우리의 상처를 다 맡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우리의 흉한 상처를 아름답게 만드신다. (3上)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사탄은 우리의 상처에 재를 뿌린다. 상처를 덧나게 만든다. 상처를 더럽힌다. 그러나 하나님은 재를 뿌리는 대신에, 아름다운 면류관을 씌워주신다. 주님은 우리의 상처를 잘 가꾸어, 아름답게 만드신다. 예수님을 아름답게 만든 것은, 예수님의 상처다.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이다. 

우리는 못 자국과 창 자국 없는, 예수님을 상상할 수 없다. 예수님의 몸에는 상처받은 흔적이 있다. 위대한 사람은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 상처를 통해, 더 아름다운 생애를 만든 사람들이다. 찬란한 업적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들지 않고, 역경을 극복함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3)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은, 깨달음과 관련된다. 깨달음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게 해 준다. 우리의 문제는 자기 상처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꾸 포장하고 과장하는데 있다. 

나의 상처만 크게 보고, 남의 상처는 너무 가볍게 대한다. 성령님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내 상처를 직면하게 만든다. 우리의 상처를 당연하게 생각해, 치유하신다. 우리의 고통은 자기 상처를 극대화해서 생각할 때, 더욱 심해진다. 그러므로 상처는, 다 있다고 생각하라. 

성령님은 우리의 상처에 의미를 부여하신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셨다. 예수님의 피는 사랑의 피다. 자유의 피다. 예수님이 상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치료받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상처에는 의미가 있다. 사명과 목적이 있다. 

우리의 상처에도 의미가 있다. 성령님은 우리의 상처를 올바로 보게 해주신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섭리로, 보게 하신다. 우리의 상처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성숙하게 되는지를 보여 주신다. 우리의 상처 때문에, 오히려 더 잘됨을 보여주신다. 

요셉은 상처가 컸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요셉의 상처를 통해,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그의 상처는 치유되었고, 용서의 사람이 되었고, 축복의 사람이 되었다. 성령님이 도와주시면, 우리가 받은 상처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성령님은 사랑을 부어 줌으로, 상처를 치유하신다. 상처는 사랑의 결핍으로 생긴다. 사랑은 치료의 묘약이다. 1972년 9월 5일, 독일 뮌헨에서, 올림픽경기가 열렸다. 이때 검은 구월단 테러범들이,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에 몰래 잠입해, 이스라엘 선수들이 죽고, 인질로 잡혔다. 

이들은 감옥에 갇힌, 동료 테러범들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지만, 진짜 목적은, 딴 곳에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비참한 모습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를, 국제무대에 알리기 위해 테러를 벌렸다. 테러범들은 석방되지 않았지만, 팔레스타인의 참혹한 실상을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있지 않아, 아라파트가 UN총회에 초대되어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문제가 해결되어, 더 이상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테러를 벌릴 이유가 없게 되었다. 검은 구월단 같은 극단적인 테러 단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아라파트는 즉시 정보국장 아부 이야드에게 명령을 내려서, 기존의 모든 과격 테러범들을 선량한 시민들로 바꿀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했다. 이야드 정보국장 휘하의 정보국 직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많은 연구를 했다. 여러 차례 격론을 벌리고, 한 가지 방안이 채택되었다. 

그 방안은 모든 과격 테러범들을, 결혼시키는 방법이었다. 과격 단체 테러범들에게, 중동 지방에서 가장 아리따운 처녀들을 시집 보내기 위하여, 100명의 최고 미인들이 차출되었다. 드디어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에, 100쌍의 청춘 남녀들이 모여서, 합동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신랑은 한 때 자살 폭탄으로, 온 몸을 칭칭 감았던 테러범들이었고, 신부는 중동 지방에서 뽑힌 최고의 미녀들이었다. 아라파트는 1가정 당, 3천불씩 격려금과, 베이루트에서 평화롭게 일할 수 있는 직장, 그리고 가전 제품들과, 아파트 한 채를 보너스로 주었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아 식구가 느는 가정은, 5천불씩 추가 지급하기로 했다. 그래서 가장 흉악하고, 두려움이 없기로 유명한 '검은 구월단' 테러리스트들은,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 시작했다. 정보국에서 이들 암살단원들이, 평화로운 시민들로 바뀌었는지 시험해보았다. 

그랬더니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정부의 명령에 불복했다. 혹시 과거에 저지른 범죄 기록 때문에 체포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 그들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기에, 더 이상 테러에 뛰어들 수가 없었다. 실제로 일어났던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미움은 우리를 흉악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우리를 부드럽게 만든다는 진리다. 가족 간의 사랑을 직접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을 살상하는 테러범이 될 수 없었다. 오늘 우리의 모든 아픔을 치유하는, 유일한 묘약이 있다면 사랑이다. 

우리의 통증을 누그러뜨릴, 유일한 진통제는 사랑이다. 가족의 사랑만 있다면, 아픔도 위로 받을 수 있고,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모든 대상들을, 용서와 사랑으로 포옹한다면, 상처는 반드시 아물게 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신다.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부어 주신 사랑을, 보도록 도와주신다. 성령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여, 불쾌한 냄새가, 향기로운 냄새가 나도록 바꿔주신다. 우리의 상처를 통해, 영광스런 진주로 바꿔주신다. 

결론이다. 예수님은 상한 인생, 상한 마음의 치유자이시다. 슬픈자를 위로하시며, 화관을 주신다고 하셨다.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한다.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신다고 하셨다. 재는 슬픔을 상징하지만, 기쁨으로 화관을 씌워 주신다. 

그러므로 상처로 울지 말라. 사람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갖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기뻐하여야 한다. 세상을 보고 근심하지 말고, 주님 바라보고, 즐거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 상처를 통해 교훈을 얻기 바란다. 고통을 사명으로 바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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