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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레스 웃사 ((대상 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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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스 웃사 ((대상 13:1~14)


다윗이 왕이 되어 행한 첫 번째 신앙적 행사가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에게 빼앗긴 법궤를 국경 근처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거국적인 행사를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다윗성에 안치하고 새로운 신정국가의 면모를 갖추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천부장과 백부장 그리고 모든 장수들과 함께 이 일을 논의했습니다. 
다윗은 매우 합리적인 방법으로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냈습니다. 이 거룩한 사업에 동참하지 아니한 지파는 한 지파도 없었습니다. 

본문 13장 2절에 『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 이 말은 '법궤를 옮기고자 하는 계획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한 것이라면'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법궤를 옮기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하는 일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일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계산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법궤 옮기는 일을 진두지휘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새로 만든 수레에 싣고 다윗왕의 신하 웃사와 아히오는 수소가 끄는 수레를 몰았습니다. 다윗왕과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경축 행렬이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법궤를 실은 소가 뛰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법궤는 수레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놀란 나머지 수레를 몰던 다윗의 신하 웃사가 손을 내밀어 떨어지려고 하는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웃사의 이러한 행위는 불법입니다. 왜냐하면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이기 때문에 아무나 이것을 만져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들여다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4장 15절에 『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4장 20절에 『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6장 19절에 『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고 했습니다. 

비록 웃사의 행위가 아무리 불가피하다고 해도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니 웃사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웃사를 충돌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대상 13:11). 그리고 다윗이 분하여 그곳 이름을 '베레스 웃사'라고 칭했습니다. 

Ⅰ. 다윗의 인본주의(人本主義)가 하나님 의 법을 파괴시켰습니다. 

본문 13장 1절에 『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장수로 더불어 의논하고 』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군사들을 인솔했던 각 지파의 지휘관급들과 의논했습니다. 일견 좋은 리더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3장 3절에 『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그의 통치 기간(B.C.1050-1010)중 단 한번도 하나님의 궤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가 블레셋과의 전투 시 법궤를 찾은 적은 있으나 그때는 다만 자신의 아들 요나단의 안전여부를 여호와께 물어보려고 했을 뿐입니다(삼상 14:18). 
이와 같은 그의 무관심은 그의 파멸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다고 한 것은 그의 인본주의적 사고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다윗은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자신의 수하 장수들과 의논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마침내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아 혼이 난 뒤에 묻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대상 14장 10절에 『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고 했습니다.
역대상 14장 14절에 『 다윗이 또 하나님께 묻자온대 하나님이 이르시되 마주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라고 했습니다.
역대상 14장 16절에 『 이에 다윗이 하나님의 명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쳐서 기브온에서부터 게셀까지 이르렀더니 』라고 했습니다.
타인의 잘못을 잘 지적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들의 약점입니다. 다윗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Ⅱ. 다윗의 다수주의(多數主義)가 하나님 의 법을 파괴시켰습니다. 

본문 13장 4-5절에 『 뭇 백성이 이 일을 선히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고자 할새 』라고 했습니다.
『 뭇 백성이 선히 여겼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모든 백성의 눈에 그 일이 선하였으므로'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백성'이란 지휘관의 총회가 아닌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여기 '온 회중'은 헤브론에 모였던 이스라엘 각 지파의 용사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다윗의 말에 적극 동조했습니다. 
여기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선발한 자들을 말합니다. 병행구절인 사무엘하 6장 1절에 3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의 국왕인 경공이 좋아하는 신하 한 사람이 말을 달려 곁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경공이 기쁜 얼굴로 당대의 대학자인 안영에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지, 나하고 장단이 잘 맞는 단 말이야" 이 말을 들은 안영이 머리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 사람은 전하와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하의 단순한 동조자일 뿐입니다." 안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경공이 물었습니다.

"장단을 맞추는 것과 동조한 것은 결국 같지 않은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안영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장단(맞장구)을 맞추는 것은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그것은 서로 다른 요소들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비유하건데 그것은 국물과 같은 것입니다. 물, 불, 초, 고기, 소금 등으로 생선을 끓여 지나친 맛이 나지 않게 맛있게 요리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전하가 긍정하는 것 속에 부정되어야 될 점이 있으면 그것을 검토해서 전하의 부정되어야 할 점을 지적하여 바로 잡고 거꾸로 전하가 부정하는 것 속에 긍정해야 할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강조해 부당한 부정에서 전하를 구하는 것이 조화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고 단순하게 동조를 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전하께서 긍정하면 저 사람은 무조건 긍정하고 전하께서 부정하는 것은 언제나 부정하고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동조하는 것이지 조화는 아닌 것입니다. 이는 물 위에 술을 부어도 아무도 마시지 않으며, 거문고나 비파를 들고 같은 줄을 뜯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윗사람을 망하게 할 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조화를 강조한 공자의 다음 말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군자는 조화롭게 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고 소인은 부화뇌동하되 조화롭게 하지 않는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입니다.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요, 부자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에게 그 어느 누구도 바른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수주의 곧 민주주의가 무엇입니까? 다수주의가 진리는 결코 아닙니다. 

서로 다른 최선이 부딪치는 극한 대립의 결과 민주주의는 고통스러운 협상과정이 아니라 다수결로 환원됩니다. 다수주의 율법에 각자의 주장은 여지없이 박제되었습니다. 다수파가 곧 민주주의라는 이 아메바 수준의 셈법은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20세기 파시즘은 다수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신을 정당화해왔습니다. 소수자에 대한 대량 학살을 정당화한 것도 다수파 민주주의였습니다. 결코 민주주의는 진리와 등식화시킬 수 없습니다. 

Ⅲ. 다윗의 최대주의(最大主義)가 하나님 의 법을 파괴시켰습니다. 

본문 13장 7-8절에 『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하니라 』고 했습니다. 

1) 법궤를 새 수레에 실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장 7절에 『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자신이 만든 수레에 싣도록 명한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에 대한 경외심과 거룩성을 인식하고 새 수레를 만들어서 실은 일을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다윗왕의 조치는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되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는 법궤를 운반할 때 사람의 어깨에 메고 운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법궤 네 모퉁이에는 금고리가 달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어깨를 통하지 아니하고 수레에 실은 것은 하나님의 법을 초월한 인본주의적 방법으로 불법입니다. 

2) 소들이 끌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장 9절에 『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라고 했습니다. 새 수레를 소들이 끌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민수기 4장 15절에 『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찌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7장 9절에 『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치 아니하고 자기 나름대로 수레를 만들어서 그곳에 법궤를 싣고 소들이 끌게 하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법궤는 십자가를 상징하는 모형입니다. 자기 몫의 십자가는 메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십자가를 어깨에 메지 아니하고 그 십자가를 인간의 뜻대로 해석하고 나름대로 의미를 붙이므로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주님의 십자가가 교회운동에 오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3) 웃사와 아히오가 수레를 몰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장 7절에 『 …아미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라고 했습니다. 법궤는 레위지파 중에 고핫 자손이 메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웃사와 아히오는 고핫 자손이 아닙니다. 이들은 다윗의 신하들입니다. 웃사와 아히오는 월권을 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불법입니다.

4) 웃사의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 때문입니다. 
본문 13장 9절에 『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가견적인 보좌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이를 만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율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민 4:15). 하나님의 법궤는 거룩한 것이니 들여다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민 4:20; 삼상 6:19). 

이러한 다윗의 불법적인 처사 때문에 하나님이 웃사를 충돌해서 즉사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일은 너무나 아름답고 탁월한 발상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불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어야만 했습니다. 
다윗은 웃사가 즉사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웃사의 잘못이기 이전에 다윗의 불법으로 인한 참상이었습니다. 

Ⅳ. 자신의 불법에 대한 자학(自虐)입니다.

본문 13장 11절에 『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 분하여 』(하라, )라는 말은 단순히 괘씸한 마음을 품거나 억울한 정도의 것이 아니라 '타오르다', '심히 뜨거워지다'라는 의미 외에 '온몸과 심장이 타버릴 듯한 분노'를 말합니다. 다윗의 분함은 웃사에게 징벌을 내리신 하나님께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분함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분문 13장 12절에 『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라는 말씀을 감안할 때 그의 분함은 첫째 자신의 인본주의 처사에 대한 자기 자신을 향한 후회에서 나오는 개탄입니다. 
둘째는 율법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오는 탄식입니다. 셋째는 자신이 죽을 것을 웃사가 대신 죽은 것에 대한 후회에서 오는 탄식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와 불순종했을 때의 결과에 대한 엄청난 괴리를 깨달은 데서 오는 후회입니다. 다섯째는 왕으로서 백성들 앞에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다스릴 수 없는 발버둥입니다. 

다윗은 그곳을 '웃사를 충돌하심'이란 뜻의 『 베레스 웃사 』라 칭했다고 했습니다. 방치되어 있던 법궤를 찾아와서 새 수레에 싣고 옮기는 것이 무엇이 큰 잘못이란 말입니까? 수레를 끄는 소들이 날뛰므로 흔들리는 법궤를 잡으려 했던 웃사가 무슨 잘못이란 말입니까? 현실적인 이해관계에서나 상황 윤리적으로 볼 때 전혀 문제가 없는 합리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법과 그의 뜻을 거역하는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다윗의 범죄 행위입니다. 마침내 다윗은 레위지파 고핫 자손인 오벧에돔의 집으로 법궤를 옮기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명기 32장 7절에 『 …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끼리끼리 의논해서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호사밧도 모압과의 일전을 앞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열왕기하 3장 11-12절에 『 여호사밧이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이스라엘 왕의 신복 중에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있도다 이에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과 에돔 왕으로 더불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새 수레를 만드는 시대입니다. 지난 2월 2일 화요일 한국기독교총회 대표회장 이·취임식이 W.C.C.(세계교회협의회)에 소속된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회장 이·취임식과 같이 있었습니다. 먼저 오전 7시 30분에 국회의원 회관에서 국회의장과 각 정당 대표와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예배가 있었습니다. 이날 N.C.C.K. 전병호 회장은 한기총과 N.C.C.K.가 왜 나누어져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직 모르겠다면서 W.C.C.(세계교회협의회)와 W.E.A.(세계복음주의연맹)가 손을 맞잡고 하나 된 모습을 보여 나가자고 했습니다. 

이어 오전 11시에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이·취임 감사예배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축하 메시지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대독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회장단은 임직원들과 함께 양화진 선교사 묘역 및 국립 서울 현충원을 방문하고 헌화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참으로 옛날에 없던 이상한 일들이 마구잡이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법대로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다수주의가 진리의 광장을 활보하는 시대입니다. 진리운동은 오히려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4절에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32절에 『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상대적 최대주의만이 환영받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디에도 최선이지 최대를 가르치지 아니했습니다. 성경은 최선 없는 최대가 아니라 최선 가운데 최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절대적 상황에서 절대입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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