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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롬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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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롬 13:11~14)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습니다. 작년에는 한참 신종플루로 난리를 겪었는데, 신년 벽두에는 폭설과 강추위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기상 관측 100년 사상 최대 폭설이었습니다. 그 후 세계 각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기상 이변과 자연 재해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특별히 금번 아이티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부상자는 아예 집계할 엄두도 못 내고, 어제까지 사망자의 시신 17만 구를 수습했다고 합니다. 이런 추세라면 사망자가 총 35만 명에 이를 것이란 전망도 있습니다. 너무나 참담합니다. 

더욱이 한반도 같이 과거에 지진에 관한 한 안전지대라고 여겨지던 지역까지 지진의 위험성이 고조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작년 한 해 동안 총 60회의 지진이 발생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규모 6’ 이상의 대형 지진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전문가의 분석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무반응으로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호들갑을 떨며 불안한 가운데 살아야 할까요? 그건 아니죠.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앞날을 대비해야 마땅합니다. 예를 들어, 기상 이변에 대처할 수 있는 안전 시스템을 구축한다든지, 건축을 할 때 내진 설계를 철저히 한다든지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에는 지구의 ‘종말’이 닥칠 것이란 사실입니다. 종말을 인식하고 그 때를 대비하는 신앙으로 무장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리켜 흔히 ‘종말론적 신앙’이라 부릅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건강한 긴장감을 가질 수 있고,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종말론적 신앙에 관한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종말론적 신앙을 다시 한 번 회복하시고, 험한 세상을 살지라도 담대히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종말’이란 말과 더불어 ‘말세’라는 말이 나옵니다. 비슷한 말 같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종말은 지구의 마지막 시점(point of time, 신학에서는 ω point라 부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세는 마지막 기간(period)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성탄)부터 재림(종말)까지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이 기간은 언제든지 마감될 수 있고, 그 마감이 바로 종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의 기간 중에서도 종말이 아주 가까워진 시기를 가리켜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 부릅니다. 요즘의 시대 모습을 보면 바로 지금이 말세지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 말세지말의 징조 : 임박한 종말 

본문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이 말세지말에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줍니다. 무엇보다 먼저 말세의 징조를 보면서 종말이 임박했음을 깨달으라고 권면합니다. 다시 말하면 ‘임박한 종말’ 의식을 가지라는 겁니다. 

11절을 보시죠.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이 시기’란 바로 종말이 가까운 말세지말을 가리킵니다. ‘우리 구원’은 종말의 때 즉 예수님의 재림 시 있을 구원의 완성입니다. ‘처음 믿을 때’는 예수 믿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칭의’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구원이란 말은 자주 사용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많은 내용이 포함된 단어입니다. 구원에는 세 가지의 시제가 있어요. 과거의 구원, 현재의 구원, 그리고 미래의 구원입니다. 

과거의 구원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칭의(稱義)를 가리킵니다. 이 때 이미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겁니다. 미래의 구원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종말의 날에 부활해서 완전한 영광을 이루는 영화(榮化)를 가리킵니다. 현재의 구원은 칭의 후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성화(聖化) 과정을 가리킵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칭의는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요, 현재 구원은 이루어가고 있는 구원이요, 영화는 장차 이룰 구원입니다. 11절에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다는 것은 이미 칭의를 얻은 우리에게 종말에 있을 영화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말세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걸 가리켜 말세의 징조(Sign)라고 하죠. 요한계시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특히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소계시록’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 보면, 말세의 징조가 난리, 전쟁, 지진, 천재지변, 기근, 인간성의 타락, 세계 선교 등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사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무덤덤하게 지나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런 현상이 더욱 빈번하게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종말의 시점이 가까울수록 그럴 겁니다.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음악을 연주할 때 지휘자가 크레셴도(crescendo 점점 세게)로 이끌어가다가 갑자기 끊어주면서 곡을 끝내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이런 겁니다. 밤 시간 중 언제가 가장 어둡습니까? 3~4시쯤이죠. 새벽 동트기 직전에 가장 어둡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시대의 모습을 보면서 종말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예민하게 느끼는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종말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그 이전이라도 죽음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죠. 우주적(역사적) 종말과 개인적 종말입니다. 역사적 종말은 재림을 가리킵니다. 개인적 종말은 죽음을 가리킵니다. 시대를 분별하면서 재림이 다가옴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지막 순간이 다가옴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50년 살았다고 하면 죽음의 산간이 50년 다가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죽음은 언제라도 닥쳐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 예수 믿은 지 20년 됐다면 천국에 갈 시간이 20년 가까워졌음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카운트다운 하는 겁니다. 로켓을 발사할 때 ten, nine, eight, seven, ... 이렇게 카운트다운 하는 것처럼 역사적 종말이든 개인적 종말이든 종말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생은, 특히 성도들은 항상 종말을 바라보는 긴장감이 필요합니다. 

[2] 종말이 가까운 말세지말을 사는 성도의 자세 : 영적 각성 상태 유지 

그러면 구체적으로 종말이 가까운 말세지말을 사는 성도의 자세는 어떠해야 될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영적 각성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성도들이 이렇게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종말은 비유건대 마귀의 제삿날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패배한 마귀가 마지막 예수님 재림하시는 종말의 때는 최종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 가까워질수록 발악을 합니다.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영적으로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의 역사가 얼마나 강성하면 우는 사자로 비유하겠습니까? 

군대에서 전방 GOP 부대(휴전선 지키는 부대)에 근무하는 병사들이 보초를 설 때 항상 숙지해야 되는 수칙이 있습니다. “졸면 죽는다!” 보초 서다 졸고 자면 간첩에 넘어와도 속수무책입니다. 보초를 서나 마나 철조망이 뚫리고 큰일 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각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이런 각성 상태를 유지할 때 신앙생활에 활력이 있고 항상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고대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기독교 2천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분입니다. 방탕한 사람이었지만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어린 기도로 변화된 것으로 유명하죠. 그가 결정적으로 변화된 회심의 간증이 있습니다. 386년 밀라노의 정원 벤치에 친구와 함께 앉아 있는데, 어린아이들의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를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책을 펴서 읽어라 ! 책을 펴서 읽어라!” 성경책을 펼쳐 보니 롬13:13~14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죠. 그때 그의 나이가 32세였습니다. 그 후 그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였고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영적 각성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만큼 우리 인생이 바뀝니다. 영적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다시 11절을 보면, 바울이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11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 ” 벌써 됐다는 말은 종말이 코앞에 닥쳐왔음을 느끼라는 겁니다. 

그러면 영적인 각성이 있을 때 어떤 모습이 있을까요? 세 가지입니다. 

① 기도 :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를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로 기도를 강조합니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만물의 마지막은 종말을 가리킵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더욱 기도하라는 겁니다.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면 어떤 일이 닥쳐도 괜찮습니다. 고난도 축복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가운데 고난이 닥치면 실족합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정신을 놓고 가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반대로 정신을 차리고 가면 돌부리에 걸려도 딛고 지나갑니다. 동일한 돌이라도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디딤돌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종말이 닥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느 때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회개 :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회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본문 12절~14절을 보시죠.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13 ...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밤은 죄악의 때를 가리킵니다. 낮은 종말이 닥쳐와 광명한 천국이 이뤄짐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종말이 임박한 말세지말에 더욱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어둠의 일은 죄악된 삶을 가리킵니다. 어두운데서 바쁜 짓을 하잖아요. 방탕, 술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 각종 육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일 ... 

영적으로 각성된 사람만이 이런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눅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영적인 무감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죽어가고 있는데도 자신은 전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개구리를 가지고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이 담긴 비커에 집어넣었더니 개구리가 펄쩍 뛰어올라 달아났습니다. 이번에는 찬물이 담긴 비커에 개구리를 넣자 여유 있게 헤엄치며 놀았습니다. 잠시 후 개구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보려고 비커를 서서히 가열했습니다. 개구리는 태연히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서너 시간 후 과연 개구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물 위에 둥둥 떠 있었습니다. 삶아져서 죽은 겁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환경은 마냥 도취되어 놀기에 적당한 온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영적인 각성 상태를 놓치면 영성을 상실한 채 죄악에 노출되어 점점 악에 빠져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악에도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고 혹시라도 작은 실수를 범할 때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돌아서는 겁니다. 빠져나오는 겁니다. 

③ 성화 :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성화의 과정을 착실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12절~14절.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 ” 죄악에서 벗어나 단정한 삶을 살라는 겁니다. 마치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처음 예수 믿을 때 이미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의 새 옷을 입을 때 예전의 더러운 옷을 벗지 않으면 희한한 모습이 됩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옛날 구제품 얻어 입고 살 던 시절에 보면 희한한 복장이 있었죠. 아랫도리 바지는 한복인데, 윗도리는 양복저고리 이런 식입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것은 예수님을 항상 의식하고 예수님과 일체감을 갖고 살라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유니폼을 만들지만 그 후에는 유니폼이 사람을 만든다.” 예수님으로 옷입으라는 것은 예수님을 의식하면서 닮아가라는 겁니다.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22~24 보면, 회개와 성화의 연속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old self)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new self)을 입으라” 옛사람의 모습을 벗고 새 사람의 모습을 입으라는 겁니다. 이게 쉽게 되지 않죠. 그러나 계속 사이클이 돌아가듯 반복 또 반복해서 성화를 이루라는 겁니다. 

심리학에서 이런 게 있어요. 행동이 인격화되는 과정입니다. “무의식적 미숙달 → 의식적 미숙달 → 의식적 숙달 → 무의식적 숙달” 마음속에 생활 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을 의식하면서 삽니다. 맨 처음에는 미숙하죠. 그러나 갈수록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인격화가 됩니다. 그래서 언제 종말이 닥쳐도 역사적 종말이든 개인적 종말이든 예수님을 반갑게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 때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뿐입니다. 마24:36

마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22:20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런데 왜 아직 오시지 않느냐고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벧후3:8~9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살전5:3,6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우리나라 전통 육아교육법 중에 이런 게 있죠. 신문의 칼럼에서 읽었는데, 도리도리, 짝짜꿍 짝짜꿍, 곤지 곤지, ... 등이 있는데 본래 한자어로 각각 뜻이 있다는 겁니다. 그 중에 ‘깍꿍’이 있죠. 어릴 적에 영문 모르고 들었는데 어른들도 그냥 했는데, 본래 각궁(覺躬)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자신을 깨달아라!” 이런 뜻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각성’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입니다. 영적 각성! 

아무쪼록 언제 주님을 만나도 부끄러움 없도록 깨어 기도하고 늘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향해 성화됨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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