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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속에 있는 두 마음의 갈등 (롬 7: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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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 있는 두 마음의 갈등 (롬 7:15~25)


가끔 일년에 한두차례 가정의 문제에 대해 설교할 때가 있습니다. 가정설교할 때 이런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 저도 목사지만 저도 가끔 부부싸움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2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 번째는 목사님도 부부싸움을 하나, 목사님이 어떻게 부부싸움을 다 할 수 있어?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면 되지 말씀대로 못사시는거 아냐? 이런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보시는분들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부류는 이런 반응입니다. 아~ 목사님도 부부싸움을 하는구나. 그게 무슨말입니까? 나 같은 집사 부부가 싸우는건 당연한거지. 목사님도 싸운다는데 상당히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요 여러분 살다보면 부부싸움도 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부부싸움은 결혼생활에 촉진재가 되고 도움이 된다고 그럽니다. 어떤부부들은 평생 부부싸움 안했대요. 어떻게 사냐하니까 금궈놓고 산대요. 여기는 내영역 저기는 당신영역, 넘어오지마. 이렇게사니 싸울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한 몸을 이룰려니까, 한 가정을 이룰려니까 한목표를 향해 나아가니까 갈등이 생깁니다. 의견충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갈등을 대화로 풀어가면서 사랑이 새록새록 솟아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부부생활에 긴장이 있다면 우리 신앙생활에 긴장은 당연한겁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바울의 놀라운 고백을 들었습니다. 읽었지만 24절에 사도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나를 건져내랴? 곤고한 사람이라는 표현, 이걸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나는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이 죽음의 몸 가운데서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비참한 사람이라고. 우리가 알기에 사도바울은 위대한 승리의 사도인데. 그는 직접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환한빛 앞에서 거듭남을 경험했고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몰려들었고 손이 닿는 곳마다 질병이 치료받았고 그의 말씀에 권세가 있었는데 이런 사도바울이 비참한 사람이라는 비참한 고백을 할 수있었을까하는 겁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23절을 읽어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내 지체속에 뭔가 다른 법이 있어서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바꿔말하면 내가 죄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때로는 죄에게 종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죄 앞에 사도바울이 무릎을 꿇을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어찌보면 부러운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를 위해 그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바울의 이 고백이 시점으로 어느때냐? 바울이 구원받기 전이냐 아니면 구원받은 후냐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구원받기전에야 예수님을 잘 모르고 성령의 능력이 없으니까 그럴수 있습니다. 매번 100번 싸우면 100번 죄에게 패배하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신학자들의 공통된 확신은 이 고백은 사도바울이 구원받고 사도가 된 이후에 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도가 어떻게 죄앞에 비참하게 넘어지고 곤고한 사람이라는 탄식과 절규를 쏟아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그리스도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 20년 믿었는데 난 죄하고 상관없어. 이런사람 없습니다. 30년, 50년을 믿어도 죄 앞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이들은 물질에 약할 수 있습니다. 물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넘어지는 겁니다. 어떤이들은 이성에 약합니다. 그래서 이성의 유혹을 받는 자리에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들은 명예에 약합니다. 감툼반 씌워준다면 다 버리고 쫓아갑니다. 어떤 분들은 권세에 약합니다. 누가 힘을 준다면 거기에 머리를 숙입니다. 어떤분들은 시기심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미움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어떤분들은 자기의 혈기를 다스리지 못해서, 사람은 깨끗하고 단순한데 너무 화를 잘내서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돌아서면 후회합니다. 내가 괜히 화냈네. 안싸울걸 싸웠네. 이게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의 실존이고 실상이다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우리를 위해서 이 부끄러운 고백을 나눠주고 있는겁니다. 사도바울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바로 예수 믿고 구원받았지만 이런 갈등앞에 던져질때가 종종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러나 분명 다른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전에 하나님을 알기전에는 죄를 지을 때 갈등이 없습니다. 내 생각과 죄의 생각이 똑같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는 죄를 지을려면 거부감이 생깁니다.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내 양심의 법이 소리칩니다. 너 이러면 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느냐, 고통과 갈등이옵니다. 줄다리기 하는 겁니다. 마치 우리가 운동회때 줄다리기 하다가 이기는 쪽으로 끌려가듯이 내 속에 두 마음이 싸웁니다. 그러다가 내가 말씀으로 충만하지 못할 때 죄에게 무릎을 꿇을때도 있고 끌려갈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기도열심히하고 성령충만하고 말씀으로 충만하면 그 정돈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유혹 사단이 틈타는구나. 내가 죄를 물리쳐야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물리치고 말씀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늘 기도의 생활, 예배의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분이 그럽니다. 예수믿는 사람들도 2달동안만 예배안드리면 불신자하고 똑같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똑같아 진답니다. 그렇게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도 사랑해야지, 오늘도 용서해야지,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지. 물질이 내 우상이 되어선 안되지. 이걸 늘 되세겨야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거기에 새로움이 있고 거기에 변화의 삶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바울이 죄에게 넘어졌다 오해할 것은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큰 죄를 지었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거리끼는 것들, 더 사랑하지 못한 죄들, 누굴 미워하면 안되는데 누굴 잠시 미워한 마음들, 고통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욕하고 남 흉보고 이런것은 죄도 아닙니다. 사람 죽여야 살인죄 져야 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게가서 물건을 샀는데 돈을 거실러받고 집에 왔는데 100원이 더왔네. 마음이 괴로워 견딜수가 없습니다. 100원이 더오다니 갖다 줘야하는데. 마음이 꺼림직합니다. 내가 내 돈이 아닌 100원을 집어넣어 버리면 하나님앞에 내가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까? 내 양심이 소리치는 겁니다. 부끄러워 견딜수가 없습니다. 돌려줘야합니다. 100원이 더 왔네요. 받으세요. 아니 뭘 가지고 왔어요. 내 양심이 깨끗해지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앞에 진실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알고 내가 알아요. 내 양심이 깨끗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내 기도받지 않을 것을 내가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죄의 갈등은 그런 것이었을것입니다. 더 사랑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더 사랑하지 못하는 아픔. 그것 때문에 몸부림 치는 겁니다. 완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괴로움. 그런게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죄의 종류가 다릅니다. 여러분 죄라는 것은 손으로 짓는 것만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해도 살인한것과 똑같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속에서 3가지를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내 안에 선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15절 읽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내가 행하는 것을 도무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행동을 하는거야? 내가 원하는대로 살지않고 오히려 내가 미워하는 일을 행하는 겁니다. 원치않는 일을 행하있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아니 내가 왜 그런자리에 갔지. 내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지. 자신도 모르겠는 겁니다. 답답한 것입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나는 내가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는 일은 하지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원하는 일은 행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만 행하고 다닙니다. 악을 행하고 다닙니다. 나는 원치 않았는데. 이게 뭡니까? 선과 악을 구분할줄은 알지만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18절 마지막을 보니까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런말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은 내게 있는데 선을 행하는 것은 없습니다. 선을 실천할 능력이 없습니다. 알긴 압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무능함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을 실천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무능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의지는 있지만 실천할 힘이 없는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두 번째로 오늘 바울의 고백속에서 아직 내안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17절 읽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가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악을 행한다면 그 악을 행하는 것은 뭡니까? 내 속에 있는 죄라는 겁니다. 내 속에 죄가 있습니다. 무서운 고백입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자꾸 행하는데 그 악을 행하는 것은 내 본심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나를 그렇게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속에는 선한것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죄가 숨어 있습니다. 우린 그것을 죄의 본성이라고 부릅니다. 혹은 옛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에베소서4장 22절에 보니까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악을 쫓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고 의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하는데 아직도 옛사람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옛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유혹당하고 끌려갈 수 밖에 없다. 내 안에 악이 있다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원에 독초가 있는데 닭들이 독초를 쪼아 먹으면 닭이 자꾸 죽습니다. 낫으로 독초를 잘라줘요. 그러나 뿌르가 있어 독초가 다시올라오고 다시올라오고 그러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깨끗한 영혼으로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우린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인간속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 죄의 뿌리가 깊이 박혔습니다. 예수 믿고 우리가 용서받았지만 그 죄의 뿌리는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이땅을 살아가는 동안은 죄의 유혹이 따라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느때까지 우리가 영화의 몸이 될 때까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때까지는 우리는 죄의 몸을 가지고 다닐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육신이다 옛본성이다 옛사람이다 이렇게 성경에선 부르고 있습니다. 마치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듯이 죄의 뿌리가 우리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느순간에 넘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내속에 죄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깨달을 진리가 있습니다. 나는 아직 갈등하고 있는 존재다하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데 악이 나와 함께 있습니다. 내 속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속에 선한 마음도 있고 악한 마음도 있습니다. 선한 의지도 있고 악한 의지도 있습니다. 선한 소원도 있고 악한 소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2가지가 자꾸 갈등하는 겁니다. 

22절 23절 말씀 다시 읽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서 죄에게 굴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안타깝습니다. 내 속에 2개의 마음이 존재합니다. 바클레이라는 주석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 사람 한 가죽안에 두 사람이 싸우고 있다. 한 인간안에 선한 사람과 악한사람이 갈등하고 있습니다. 착한일 하자. 한쪽에서 미워해 죽여야해. 한쪽에선 정직하게 살려하는데 한쪽에선 거짓말하며 살려고 합니다. 이 두마음이 갈등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속에서 2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제어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매번 결단해도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결단가지고는 안됩니다. 거기에 위로부터 주시는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속에는 무서운 전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2차대전보다 심각한 전쟁이 끊임없이 치열하게 휴전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휴전이 언제되느냐? 예수님의 나라에 갈때까지 그 싸움은 진행되고 있는겁니다. 아프리카에 어느 지혜로운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교육하며 이런 교훈을 줬다고 합니다. 얘들아 인간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짐승이 있단다 / 어떤 짐승인데요? / 한 마리는 착한 짐승이고 한 마리는 악한 짐승이야 / 그럼 착한 짐승하고 악한 짐승하고 싸우면 누가 이겨요? / 그래 너희가 누구에게 먹이를 주느냐에 따라 승패가 달라질 수 있단다. 너희가 착한 짐승에게 먹이를 주면 착한 짐승이 힘을 얻고 착한 짐승이 이길거야, 그러나 악한 짐승에게 먹이를 주면 악한 짐승이 힘을내서 악한 짐승이 이길거야. 그렇습니다. 여러분속에서 어찌보면 두 개의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때로 어떤 마음의 손을 들어주느냐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지지하느냐 미워하는 마음을 지지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생의 죄의 승패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와서 예배드린다고만해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속에서 죄와의 싸움에서 이 피흘리는 싸움속에서 우린 이겨 나가야합니다. 미워하고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내 힘으로 안되면 성령의 힘을 의지해야합니다.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가끔 덕이 되지 못해서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한 2주간 심방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듣습니다. 구역심방하다보니 그런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새신자가 등록을 했는데, 어떻게 등록했습니까 했더니 자기 동네에 너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있어서 그걸보고 너무 부러워서 나도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 그러냐니까 자기 예수 믿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아, 나도 예수 믿으면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그래서 자기도 그 사람처럼 살고 싶어서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 분의 삶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리스도인이다. 아 나도 예수 믿으면 저 사람처럼 아름답게 살 수 있겠구나. 그래서 예수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간단합니다. 이유가. 얼마나 기분이 흐믓한지. 그런 삶의 모범이 되는 교인이 우리교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런데 반대로 안좋은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교회 나오라고 전도를 했답니다. 그 분이 어느동네에 산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 동네에 사는 집사가 생각이 나서 혹시 그 동네 오래사는 그 집사 아느냐고 했더니 잘안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런데 그 분이 그 교회 나간다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했더니 훌륭한 집사라고 했더니 그러면 나 그 교회 안나가겠다고 그러더랍니다. 그 집사는 고 동네에서 덕이 안된답니다. 사람들 손가락질 받는답니다. 남의 말 잘하고 험담 잘하고 그래서 인기가 없답니다. 그래서 난 그사람 때문에 영신교회 별로 나가고 싶지 않다고 그러더랍니다. 당황했습니다. 저도 듣고 난감합니다. 적어도 아무개 집사 아 그분이 영신교회 교인에세요. 너무 훌륭한데 나도 영신교회 나가야겠네. 아무개 권사 영신교회 권사님이세요 아 그분 동네에서 인기 좋아요. 그런데 반대더군요. 그 분이 영신교회 나가면 영신교회 안나갈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십니까? 혹시 여러분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제가 누굴 찝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하나님앞에서 돌아봐야합니다. 정말 누가 예수 믿으려할 때 나를 보고 예수 믿을 수 있겠는가. 아니 교회 등록하려다가 나 때문에 시험들지 않을까 생각해 봐야합니다. 전도는 못할지언정 전도길을 막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사람은 왜 그럴까요? 죄에게 패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집, 자기 욕심을 죽이지 못하고 늘 악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때문에 죄가 자신속에 왕노릇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욕심이 자기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선하게 살지 못하는 겁니다. 손가락질 받고 비난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올 한해를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 우리에게 남은 생액를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비난받으며 사시겠습니까? 칭찬받으며 인정받으며 사시겠냐는겁니다. 작은 욕심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지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어차피 손해보는 사람입니다. 손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영광받으실 수만 있다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물질 하나님이 갑절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돈 몇푼 때문에 인심 다 잃습니다. 동네에서 손가락질 받고 직장에서 인기잃고 그럽니다. 그렇게 하지 마세요.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눠줘라, 내가 풍성히 부어줄 것이다. 물질에 인색하지 마세요. 물질에 시험들지 마세요. 

오늘 7장 24절까지 읽어보면 절망할뻔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25절에 보면 얼마나 희망적인 이야기가 있는지 모릅니다. 25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은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지만 때론 탄식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고맙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해 주셨습니다. 새 번역으로 읽으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그는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늪속에 갈등하고 고통당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죄의 승리자가 된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고백이고 선언인 것입니다. 이 사망의 자리에서 죄의 늪속에서 나를 건져 주셨습니다.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절망에 빠진 인간들에게 오늘 희망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이 치열한 영적싸움, 내면의 전투, 두 마음의 갈등속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편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셨다면 그 분을 따라가는 자마다 승리할 줄 믿습니다. 크롬웰이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습니다. 

영국에 내전이 일어나서 크롬웰이 병사를 이끌고 내전을 치루게 됐는데 크롬웰은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이렇게 썼습니다. 승리편에 서 있는 올리버 크롬웰로부터. 그 편지를 받는 사람들마다 아 크롬웰장군은 이기는 비결이 있는가보다. 우리는 승리하는 군대구나. 그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세는 뒤집어지고 크롬웰군대가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승리편에 서 계신 분들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왜? 예수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이미 승리하셨기때문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승리할 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네가 세상에서 많은 환난을 당하겠지만 담댕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다면 저와 여러분도 승리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승리의 편에 서야될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사셔야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안에 내주 하시면서 우리에게 힘과 격려를 주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에 보니까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고 그랬습니다. 우리속에 성령과 육체의 소욕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께 순종한다면 성령은 반드시 승리하시고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성령님 나를 도와주세요. 내가 완전히 성령께 순종시키고 나를 쳐서 복종시킬 때 성령님은 당당하게 승리하실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십시오. 성령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마지막으로 피흘리기까지 이 싸움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히브리서 12장 4절에 보니까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워 보셨습니까? 우린 대부분 중도에 포기해 버립니다. 내가 졌다. 내가 죄한테 또졌네. 

오늘 히브리스는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우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편에서서 싸우십시오. 그러면 승리할 것입니다. 한번 두 번 우리는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우리의 손을 붙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너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것이다. 내 손을 잡아 너는 나와 함께하면 승리할 수 있어. 내가 너를 일으켜 줄거야. 최후의 승리는 바로 우리 모두의 것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십시오. 승리하신 그분을 바라 보십시오.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우리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이제 승리의 그 새벽을 향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손을 붙들고 한걸음 한걸음 승리의 행진을 거듭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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