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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육신을 따르는 자, 성령을 따르는 자 (롬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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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을 따르는 자, 성령을 따르는 자 (롬 8:1~11)

 
우리는 지난주일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의 고민은 바울만의 고민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자기 마음속에 두 개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선한마음이고 하나는 악한마음입니다. 하나는 선한 의지고 하나는 악한 의지입니다. 그 선한소원과 악한소원이 종종 갈등하고 충돌함으로써 바울은 고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7장 19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내가 원치않는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가만 보니까 내 속에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은 내 속에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가 깨달은 한가지 법칙, 선을 행하고자 하는 내 속에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내 속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자 한는 마음의 법과 사단의 조종을 받는 죄의 법이 종종 충돌하고 그로인해 바울은 괴로움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바꿔말하면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이 죽음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분위기가 8장으로 넘어가면서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로 바뀌어집니다. 바울은 이제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죄에게 승리할 수 있는 한가지 길을 발견했다 고백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쁨으로 가득차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로마서 8장 1절 2절 말씀을 다시한번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 보니까 그러므로 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므로라는 것은 앞에 나온 모든 내용을 다 받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렇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1장부터 7장까지 사도바울은 선포하고 있었습니까? 가장 대표적인 말씀을 든다면 로마서 3장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5장 1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따라해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의함에도 의롭다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정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가 있다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지명하는 것입니다. 정죄당하지 않는것은 이제 단죄되지 않는다 유죄선언을 받지 않는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판단하거나 고발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게 더 이상 정죄당하지 않습니다. 

그 정죄당하지 않는 이유를 2절에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여러분 생명의 성령의 법이 뭘까요? 쉽게 말하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죄와 사망의 법은 곧 율법을 의미합니다. 범죄한 사람은 누구나 율법의 멍애를 멜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죄의 삵은 그 결과가 사망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곧 율법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는 겁니다.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우리를 고소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값을 다 치루셨기 때문에.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3절 4절 말씀을 읽지 않았지만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죄인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죄를 다 짊어 지심으로 우리 죄값을 다 치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분이 사업하다가 급해서 은행에게 돈을 꿀 수 있습니다. 돈을 꾸면 그 순간 은행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가 이자나 원금을 갚지 못하면 은행의 매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중에는 차압을 당하고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서 율법의 멍애를 메고 사단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값을 우리대신 다 치러주셨습니다. 

죄값을 다 치러주심으로 너희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셨기 때문에 영원한 자유를 얻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무엇도 죄도 유혹도 사탄도 우리를 얽어맬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쁨 이루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 기쁨을 잘 모릅니다. 여러분 북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그 자유를 위해서 생명을 걸고 탈북하는 것을 보십시오. 자유란 그처럼 고귀한 것입니다. 생명과 맞바꿀정도로 자유란 고귀한 것인데 그 자유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8장 1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해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가 없고 이런 해방이 선포된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이겁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여러분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이런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심으로 그분이 주시는 평화와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걸 바꿔말하면 이런 일로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군인이 전쟁에 나가서 적과 대치하여 서로 총을 쏩니다. 그런데 부대원들이 다 죽었습니다. 혼자 남았습니다. 물론 투구도 쓰고 방탄복도 입고 수류탄도 가지고 있지만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 오니까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옆에 보니까 아주 견고한 요새가 있습니다. 그 요새는 눈만내놓고 상대방을 볼 수 있고 모든 포탄과 총알에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는 잽싸게 그곳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그 견고한 요새는 수류탄이 날아와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는 요새에 자신의 몸을 의탁하는 순간부터 안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요새란게 뭡니까? 구약에선 반석이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고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내 몸을 맡기는 순간부터 보호하심을 입을 수 있습니다. 

종종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동네에서 아이들이 막 싸웁니다. 싸우다가 한애가 지면 막 도망갑니다. 그러면 막 도망가고 등치 큰애가 막 쫓아갑니다. 그럼 이 아이가 가다가 자기 엄마를 찾습니다. 엄마가 동네아줌마랑 얘기하고 있으면 거기가서 엄마치마를 붙잡고 자기좀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 아이는 보호받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등치큰 아이도 그 아이 엄마앞에서는 어떻게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실비실 도망가고마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이와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또 이런 표현도 가능할 겁니다. 여러분 탈북자들이 대부분 중국을 떠돕니다. 중국을 떠도는데 어린아이들을 꽃제비라고도 부릅니다. 먹을게 없고 너무너무 어렵게 살아가기 때문에 그 아이들을 꽃제비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탈북자들이 여기저기 다니다가 그들의 소원이 뭡니까? 한국 대사관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서 한국대사관의 담을 뛰어넘어서 한국 대사관에 들어가면 아무도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거긴 치외법권 지대입니다. 

거긴 중국경찰도 어쩔수가 없습니다. 거기 일단 가면 얼굴을 봐도 어쩔수가 없습니다. 잡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 거긴 국경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거긴 대한민국 영토입니다. 중국안에 있는 대한민국 영토, 아무도 침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분들은 거기 머물다가 안정을 되찾고 제3국을 통해서 한국으로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삶은 이와같이 놀라운 축복이 임하는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비그리스도인 불신자와의 삶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생각해 보려합니다. 어떤분들은 그럽니다.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차이가 뭡니까? 뭐 별로 차이도 없던데요. 예수믿는 사람들도 때론 욕도 잘하고 거짓말도 하는것 같고 또 예수 안믿는 사람중에도요 그렇게 점잖은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예수는 안 믿어도 점잖고 정직하고 구제도 열심히 하고 자기 양심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겁니다. 그럴수도 있지만 그것이 꼭 옳은 구분만은 아닙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쫓고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육의사람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을 따르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5절과 6절 말씀을 다시한 번 읽어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 영이라는 것은 성령님을 말합니다. 르왓다, 프뉴마라고 하는 바람같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육신, 육신을 따른다는 것은 뭘까? 육신은 대체로 성경에서 3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 번째는, 말그대로 육체입니다. 바울이 말할 때 마음의 할례, 육체의 할례 그럴때. 말 그대로 몸뚱어리입니다. 또 하나의 육체의 의미는 인간의 문화나 족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지만 육체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이간 족보를 이야기할 때 육체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문화, 하나의 족보를 말할 때 육신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육신의 의미는 뭘까? 우리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입니다. 

타락한 죄의 본성, 죄의 뿌리, 그것이 우리속에 계속남아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 유혹의 길을 걷게 하는 것, 죄의 길을 걷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따르는 자다라는 것은 죄의 본성을 따르는 사람들. 자기속에 있는 본능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이라 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의 일을 생각한다. 육의 일이라는게 뭘까? 사람들의 본능의 생각이 뭡니까? 쾌락을 즐기고 즐거움을 추구하고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고 돈많이 벌고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그런 걸거에요.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 보면 육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맺는것과 분쟁과 시기와 당짓는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이라.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게 다 이런겁니다. 음란을 추구하고 호색을 추구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방탕함을 추구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싸우고 편가르고 당짓고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게 죄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겁니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신의 생각속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서 복음과 진리와 평화를 생각할 것입니다. 갈라이다서 5장 22절 이하에 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런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생각자체가 다른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평행선을 그어보면 처음에는 또같은것 같지만 몇킬로만 가면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르는 사람과 영의 생각을 따르는 사람과의 결과는 판이하게 다른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뭡니까? 결국 사망에 이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뭡니까? 평안과 생명에 이르는 것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결과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을 하는사람은 육신적인 관심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들은 죄악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관심을 갖고 살아가느냐 내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때 결혼을 일찍하고 일년동안 신발가게를 한적이 있었는데 제가 그때 관심은 공부하는게 아니라 신발을 얼마나 많이 파느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부터가 아니라 신발부터 봤습니다. 어떤 신발을 많이 신나. 어떤신발을 팔아야 오늘 먹고살수 있을까. 관심이 거기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육신의 관심과 영의 관심은 다릅니다. 오늘 여러분의 관심이 어디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에 이르지만 영의생각은 평안과 생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안에 있는 성령의 생각을 따르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은 자꾸 닮습니다. 그래서 영의 사람은 성령의 생각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러나 육신의 사람은 결국 마귀를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 아비가 마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죄의 본능을 따라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육신의 생각을 거부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생각을 따르십시오. 거기에 순종하기를 다짐하라는 것입니다. 

어떤교회 장로님이 정당의 요직에 계신분입니다. 정치인이다 보니까 주일에 골프회동이 많습니다. 안가면 왕따당하는거 같아서 가곤합니다. 근데 골프치러가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내가 장로가 되어서 예배는 안드리고 골프장에 가는게 불안해요. 사고날거 같고 가서 골프를 쳐도 잘 안됩니다. 그는 몇 번 그렇게 반복하다가 결심했습니다. 

내가 이제는 어떤일이 있어서 주일에 골프안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배 자리에 나왔습니다. 예배드릴때 마음에 얼마나 평안이 있는지 모릅니다. 예배드릴때 성령이 주시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성령의 뜻을 따르지 않을 때 내 안에계신 성령님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안타까워 하시는 것입니다. 눈물 흘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가 영의사람인가 육의 사람인가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것을 어떻게 압니까? 가슴을 두드리며 성령님 제 안에 계시나요? 좀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물어보면 될까요? 간단합니다. 9절말씀을 읽어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너희속에 하나님이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그리스도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해보세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셔야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소도의 자녀,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령님도 임재해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성령의 내주라고 그럽니다. 성령이 내안에 계셔 집을 짓고 거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과 동행하고 그분의 음성을 통해서 우리는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쉬운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건 틀림없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기 전에는 죄를 짓는게 쉬웠습니다. 마음으로 미워하고 이런게 쉽습니다. 거짓말하는 것도 쉽습니다. 세상에 거짓말안하는 사람이 어디있어하며. 마음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죄를 지을 때 쉽게 짓습니다. 빨리져요. 후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내 안에 임재해 있으면 마음대로 죄도 못짓습니다. 

죄를 한번 지을려면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지을까 말까 지을까 말까 쉽게 지을수가 없습니다. 어떤때 죄를 짓긴 깃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짓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죄를 짓는지 모릅니다. 왜?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말리시니까요. 탄식하시니까 죄를 짓는게 힘이듭니다. 죄를 짓고나서도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모릅니다. 몇일 후회가 됩니다. 잘못했어. 이제 죄를 짓는거보다 안짓는게 편합니다. 죄 짓는게 얼마나 괴로운가 마음에 고통이 있는가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 이미 내안에 성령님이 임재해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성령이 임재해 있는 사람들은 느낄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을 때 느끼는 겁니다. 때론 물론 내 안에 있는 성령님보다 육의 손을 들어줘서 때론 육의 죄에 굴복할때도 있지만 그건 뭐 자주 있는 일은 아닐겁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고통이 더 큰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넘어진 사도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그 갈등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육의 사람입니까? 영의 사람입니까? 바꿔말하면 육신의 사람입니까? 성령의 사람입니까? 그런말입니다. 당신은 죄를 지을 때 고통스럽게 짓습니까? 너무 쉽게 죄를 짓습니까? 그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죄를 전혀 안짓고 살수는 없습니다. 손으로 발로짓는건 아닐지라도 마음으로 미워하고 마음으로 증오하고 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죄도 짓지 말아야죠. 우리는 종종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짓고 나면 후회가 되고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깨달아지는 겁니다. 육신의 삶과 영의 삶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7절 8절 읽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과 친밀해 질 수 가 없습니다. 왜? 성령과 죄의 법은 하나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생각은 어떨까요? 하나님과 친밀감을 갖게됩니다. 

인격적인 교제를 갖게 됩니다. 하나되게 됩니다. 내가 너안에 너가 내안에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게되는 겁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안에 순종하게 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이게 관심인 겁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사람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의 사람이 된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내 안에 육의생각이 더 많다 육신을 더 많이 따른다면 여러분 다시금 예수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내 모든 죄가 용서받고 내 인생의 주인으로 내 마음의 왕좌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음을 다시한번 확인받으셔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가운데 성령의 내주가운데 거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가 없습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고발할 수 없습니다. 

저는 7남매중에 막내입니다. 그래서 위에 누님이 둘 형님이 네분 있습니다. 그니까 제가 얼마나 든든했겠습니까. 시골에 살았지만 학교갔다 올때나 학교에서나 누구한테 맞아본적이 거의 없습니다. 저를 때렸다간 큰일 나거든요. 위에 장대같은 형님들이 네분이나 계시고 누님들이 두분이나 계시니 누가 감히 저를 못건들입니다. 그게 뭡니까? 지금까진 죄가 우리를 만만히 봤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편에 예수그리스도의 요새에 서는 순간부터 이제 아무도 우리를 넘볼수가 없습니다. 죄가 우리를 공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성령님은 우리의 형님과 같은 분입니다. 누가 우리를 건들일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죄에게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죄를 두려워 하지 마세요. 이제 여러분은 죄를 안짓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죄 안지으면 내일 또 죄짓는게 아닌가? 또 유혹오기전에 빨리 끝내야지. 아닙니다. 오늘 그냥 넘기세요. 그럼 내일은 유혹이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유혹을 향해 명령하시기를 바랍니다. 최를 향해서 추방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나를 보호하시는 것을 그때 느낄 수 있는 겁니다. 

그 내속에 올라오던 욕망, 죄의 유혹들, 어느 순간에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누가 그것을 깨끗하게 걷어갔습니다. 죄 때문에 괴로워 했는데 잠자고 나니까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내가 왜 그런 미친생각을 했지? 내가 잠자는 동안 성령께서 그생각들을 다 걷어가셨습니다. 다 청소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성결의 삶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모신삶은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거긴 놀라운 특권들이 있습니다. 

11절 말씀 마지막으로 읽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고 성령님입니다. 이제 우리안에 거하실 성령님이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주신것처럼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죽어도 영혼이 부활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너희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우리에겐 부활의 확신이 있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빨리 하나님품에 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땅에 거할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땅에서 해야할 선교의 사명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가 심방가서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들께 물어봅니다. 몸이 건강해 보여서 권사님 100세까지는 사셔야죠 그러면 아이구 목사님 누구보고 욕하시는 거에요 그러세요 빨리 죽어야죠 누구 고생 시킬려구요. 여러분 죽는것도 내 맘대로 되나요. 하나님의 사명이 있으시니까 이땅에서 연장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고 죽으면 더 좋은 영원한 천국에 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너희 몸을 살리실 것이다 우리 구원은 보장되어 있고 우리의 부활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내 안에 모든 악한 생각들 이 죄의 찌꺼기들을 다 씻어 버리십니다. 거룩한 보혈로 이 죄의 찌꺼기들을 다 씻어버리십니다. 청소시키세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격과 생각이 변합니다. 전에는 부정적인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어지는 겁니다. 전에는 비판적인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칭찬하고 격려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지는 겁니다. 성령님의 생각을 닮아가게 됩니다. 성령은 부정적인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비판하는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남의 약점 뜯는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칭찬하고 격려해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영입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은 것입니다. 

때로는 나를 낳으신 부모님도 나를 거절할 때가 있습니다. 때론 형제들도 돈꾸러가면 거절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번이야 봐주지 두 번세번가면 누가 좋아합니까. 그러나 우리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린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고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고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린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인생들은 연약하지만 우리를 강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병들었어도 치료해주시고 가난할지라도 부유하게 만드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놀라운 역사인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이 우리안에 계시고 그리스도가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며 이 승리의 삶을 한걸음 한걸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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