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지적 요소 (빌 2:13, 3:13~14, 엡 2:3~4)

  • 잡초 잡초
  • 545
  • 0

첨부 1


의지적 요소 (빌 2:13, 3:13~14, 엡 2:3~4)


지금 우리는 구원의 신앙이라면 꼭 갖추게 되는 요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그 발휘를 할 때에 『지.정.의』라고 하는 인격적인 요소를 사용하게 됩니다. 따라서 중생하는 순간에 영혼의 변개가 일어나고 그 영혼이 작용할 때에 움직이는 지.정.의 의 인격적인 요소들이 새롭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중생하는 순간에 지적인 작용에 변개가 있게 되었고 정서적인 작용에도 변개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의지적인 작용에도 변개가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중생자가 어떻게 의지적인 발휘를 정상적으로 하게 되는가를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중생하기 이전에 우리의 의지적인 작용은 어떠하였으며 중생한 이후에도 어떻게 달라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의지의 작용이 새롭게 발휘되기 시작한 후부터 어떻게 우리의 의지가 합목적(合目的)적으로 작용하게 되는지를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Ⅰ. 사탄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광의 정점에 
      소원을 두고 合目的적으로 움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우리 인생을 지으셨을 때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거룩하신 목적과 목표를 향하여 소원을 두고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천지 만물과 인생을 지으시고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설하신 동산을 잘 가꾸어 궁극적으로 이르기를 원하시는 영광의 정점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소원을 두고 목표를 두고 마음을 기울이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뜻을 따라 순종하여 영광스런 나라로 자꾸 가꾸어 갈 때에 그 인생들을 통해서 전피조계는 하나님께서 생각하셨던 영광의 정점에 이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는 얼마동안 이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정하신 영광의 정점을 목표로 삼고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고 소원을 두고 살아 갔을 것입니다. 처음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영광의 정점을 향하여 합목적(合目的)적으로 움직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한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이르기를 원하시는 영광의 정점에 소원을 두거나 마음을 기울여 목표를 삼고 나아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기억하면서 찬양하며 섬기면서 그분이 명하여 이르기를 원하셨던 영광스런 나라에 이르기를 힘쓰는데서 돌이켰습니다. 소원이 달라졌습니다. 마음을 다른 곳에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명예와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영광의 정점을 바라보거나 거기에 목표를 두거나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서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이르게 될 영광의 정점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여 타락하였습니다.

1. 사람들의 계획(의지)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에서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되 항상 하나님의 창조의 본의에서 이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게 하신 영광의 정점을 향하여 나아가는 계획이 아니라, 오히려 더러움에 떨어지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시대에 와서 타락한 인류의 죄악상이 극에 달하였는데 그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창6:5-7)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더 이상 함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타락상 중에서 눈에 띠는 대목이 있습니다.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본의에 따라서 나아가는데 소원을 두고 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데 부합한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의 의지의 작용이 하나님께서 창조시 갖으셨던 본의에 합당하게 영광의 정점을 향하여 나아가는 쪽으로 발휘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영광의 정점에 목표를 두고서 의지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영광의 정점에 마음을 기울이거나 거기에 이르기를 소원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의지의 작용이 창조의 목표에서 이탈하여 발휘되어지고 있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와 다른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사람의 의지가 합목적적으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2. 그 이유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엡2:1-3에 보시면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비중생자들의 상태를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창조의 거룩하신 목표를 향하여 의지가 움직이지를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움직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엡2:2-3)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의지가 사탄의 지배를 받아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사탄의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를 방해하여 이루어지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 나라의 대적입니다. 따라서 사탄의 지배하에 있게 되면 그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의 거룩한 목표와 영광의 정점을 향하여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사탄은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런 정점을 향한 거룩한 행진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게 합니다. 거기에 소원을 두지 못하게 합니다. 그 사람의 의지가 그 영광스런 정점을 향해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와 정반대로 움직이게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계획이나 의지가 창조의 본의와 정반대로 세워지게 합니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3. 의지나 소원이 부도덕한 모습으로만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정점을 향하여 나아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비중생자는 사탄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그래서 비중생자의 의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의 정점을 행하여 움직이지 않고 그와는 정반대로 움직입니다. 비중생자들이 품는 소원이나 계획은 항상 악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항상 비도덕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비중생자들도 상당히 도덕적인 소원을 가지고 도덕적인 계획을 세워서 열심히 덕을 추구하는 쪽으로 의지가 발휘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의 정점을 향하여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기를 원하시는 그 목표에 마음을 기울이고 거기에 소원을 두고서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비중생자들 중에서도 상당히 고도의 덕성을 추구하고 나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중생자 보다도 훨씬 고고한 덕을 추구하면서 나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고도의 덕성을 추구하는데 소원을 두고서 마음을 기울이고 의지가 발동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기울이고 의지가 발동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르기를 원하시는 거룩한 전범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중생자들이 고도의 덕성을 추구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덕성을 최고로 발휘해 보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최고로 높여 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최고로 발휘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가 최고로 발휘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옛사람의 자기를 발휘하여 고도의 덕성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르기를 원하시는 영광의 정점에서 오히려 멀어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비중생자들은 그 의지의 작용이 하나님께서 이르기를 원하시는 영광의 정점을 향하여 발휘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거나 소원을 두거나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지를 않습니다. 비록 고도의 덕성을 추구하는데 소원을 두고 그 쪽으로 의지를 발휘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르기를 원하시는 정점으로부터 더욱 멀어져 갈 뿐입니다.

Ⅱ. 중생한 사람 안에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생명을 주셔서 중생케 하시면 우리의 영혼에 변개가 일어납니다. 영혼의 그 기능이 달리 발휘가 달라지고 의지의 발휘가 달라집니다. 앞의 두 가지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고 지금은 의지의 발휘가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1.하나님께서 이르기를 원하시는 영광의 정점을 향하여 
의지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뜻을 향하여 소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향하여 의지가 발휘되기 시작합니다(빌2:13). 하나님께서 이르기를 원하시는 영광의 정점을 향하여 의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기를 원하시는 영광의 정점이요, 목표, 거기에 소원을 두고 거기에 목표를 두고 거기에 마음을 실어서 그 족으로 의지가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소원을 갖기 시작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려는』소원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목표를 두고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고 그 쪽으로 의지가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목표와 소원과 계획이 합목적(合目的)적으로 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 그 이유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소원을 갖게 하시고 
의지를 발동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사탄의 지배하에서 사탄이 갖게 하는 소원과 목표를 향하여 우리의 의지가 움직였기에 하나님께서 이르기를 원하시는 영광의 정점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쪽으로 의지가 발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소원을 갖게 하고 생각을 품게 하고 계획을 세우게 하고 목표를 정하게 하시고 의지를 발동하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에 부합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의 행보가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고 마침내 이르기를 원하시는 그 영광의 정점을 향하여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의지가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그 정점을 향하여서 발휘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어 가실 그 영광의 정점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성군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시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평생토록 인도하시되 마침내 여호와의 집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 영광의 정점에 이르게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룩한 소원과 목표와 의지를 가지고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사탄의 지배하에서 그릇된 소원과 목표를 향하여 우리의 의지가 움직여 지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살전5:23-24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살전5:23-2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Ⅲ. 목표와 소원이 

합목적적으로 뚜렷하여 가는데서 자라가야 합니다!

◉ 두가지의 소원 가운데서의 갈등이 끊임없이 있지만, 
거룩한 소원에 마음을 더욱 기울이는 모습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안에서 항상 거룩한 소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때로는 육체의 소욕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소욕을 거스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거룩한 소원을 갖게 하시는 성령님의 소욕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이 장성해 갈수록 성령님께서 갖게 하시는 소원에 마음을 기울이고 삶의 목표와 가치관을 거기에 두고 살아가는 모습이 더욱 뚜렷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거룩한 목표를 향해서 적극적으로 계획을 가지고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게 하시는데 처음부터 그 목표나 소원이 뚜렷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아주 미미하게 보이지만 점점 뚜렷하여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려는 세계가 어떠한 곳인지를 점점 더 뚜렷이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욱 뚜렷이 보고서 거기에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소원을 두고서 마음을 기울여서 나아가게 하십니다. 


◉ 따라서 신앙 장성의 또 하나의 기준점은 
목표와 소원이 뚜렷하여 가는데서 찾아야 합니다. 

   가야 할 길이 더욱 선명하여 지고 합목적적인 소원을 가지게 되는데서 신앙의 장성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위엣 것으로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적인 소원과 목표와 가치관을 점점 뚜렷이 가져 가는데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빌3장에 있는 바울 사도의 신앙고백에서 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과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서는 해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가치관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서는 과거에 추구하고 자랑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7-8).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자기와 같이 땅의 일을 생각지 않고 하늘에 시민권을 두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키실 날을 기다리면서 그 영광의 정점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역시 같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게 될 것인데 거기에 소망을 갖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는 날에 이르게 될 영광의 정점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것을 귀하게 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목표와 가치관이 땅엣 것에서 하늘의 것으로 바뀌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께서 갖게 하시는 소원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여 점점 더 뚜렷하게 그 쪽으로 움직여 나아가는 모습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와 가치관이 점점 하나님 나라의 것으로 뚜렷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상대화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것을 절대시 하는 쪽으로 의지가 움직여 나아갑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